“처음엔 사람들이 절 알아준 계기라 마냥 신기하고 신났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계속 같은 모습만 원하시는 거예요. 너무너무 같은 것만요. 한동안 딜레마였어요. 왜 계속 크롭티만 입으라고 하지? 다른 것도 해보고 싶은데…. 물론 그것도 제 모습이지만, 저한텐 다른 모습도 많거든요.” 2018년 12월 남성지 [GQ]와 가진 인터뷰에서, 설현은 자신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이동통신사 등신대 광고를 ‘딜레마’라고 표현했다. 자신에겐 더 보여줄 수 있는 모습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사랑해주는 모습이 진짜 자기라는 생각 때문에 그 틀을 깨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지 못했노라고. 어깨와 카라가 강조된 팬츠 수트 중심의 중성적인 화보를 진행하며 [GQ]는 에디터와 포토그래퍼, 스타일리스트, 헤어와 메이크업 스태프를 전원 여성으로 꾸렸다. 분명 설현을 ‘딜레마’ 안에 가둔 ‘사람들’, 즉 ‘남성들’의 욕망이 혹시라도 다시 화보에 반영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설현이 속한 그룹 AOA가 Mnet <퀸덤>에서 선보인 ‘너나 해(Egotistic)’ 무대를 두고 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무대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멤버 전원이 검정색 팬츠 수트를 입고 직선이 강조된 중성적인 안무를 선보인 무대로는 소녀시대의 ‘Mr. Mr.’가 있었고, 드랙퀸들이 무대 위에 함께 올라와 성별 이분법을 깨부쉈던 무대로는 엄정화가 2006년 MKMF에서 선보인 ‘Come 2 Me’가 있었다. 그럼에도 ‘너나 해’ 무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건, 그 무대를 기획하고 선보인 것이 AOA이기 때문이다. 설현이 등신대 광고 이미지 안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AOA 또한 그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전작들 ‘짧은 치마’, ‘단발머리’, ‘사뿐사뿐’, ‘심쿵해’가 그어 놓은 선 안에 갇혀 있었다. 신체의 굴곡을 강조한 노출 의상과 가슴을 강조하는 안무, “그대는 나만의 늑대 나는 그대의 귀여운 고양이”(사뿐사뿐)나 “나 어쩌면 좋아 자꾸만 네 품에 꼭 안기고 싶어/너의 작은 관심이라도 받을까 아등바등 거려”(심쿵해)처럼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성 역할을 강조하는 가사들. 그러나 자신들이 무대를 기획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자, AOA는 기다렸다는 듯 그 틀을 깨부수고 나와 보란 듯이 선언했다. “솜털이 떨어질 때 벚꽃도 지겠지. 난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
지민이 기획하고 랩을 새로 써넣은 ‘너나 해’ 무대 위에서, 멤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활짝 웃는다. 그리고 그 웃음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웃음이 아니라, 자신이 욕망하는 바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사람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자긍의 웃음이었다. 무대가 끝난 직후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웃어 보이는 설현의 얼굴 위로, 그가 인터뷰에서 남겼던 말이 스친다. “물론 그것도 제 모습이지만, 저한텐 다른 모습도 많거든요.” 그 다른 모습의 일면을 마침내 온 세상이 함께 보았다.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