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나의 이야기는 아직 쓰고 있는 중이고 내 인생은 아직 진행 중이라는 것. 중반은 거뜬히 넘었지만 엔딩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았다는 것. 천재지변이 생긴다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중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아니 그렇더라도 그 뒤에 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대체로 내 손 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노지양 작가의 에세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인터뷰 - 노지양 작가 편>
오늘 모신 분은 “번역하는 사람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 천천히 이동 중”인 분입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이 분 덕분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책들을 읊어볼까 해요. 『나쁜 페미니스트』 , 『헝거』 , 『하버드 마지막 강의』 , 『그런 책은 없는데요…』 제목만 듣고도 이 분의 성함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요. 오늘은 번역가가 아닌 작가로서 측면돌파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첫 번째 에세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를 쓰신 노지양 작가님입니다.
김하나 : ‘첫 책을 갖고 싶다’라는 작가님의 열망이 정말 자세하게 적혀 있어요.
노지양 : 너무 과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많이 들어가 있는데요(웃음). 사실은 프롤로그가 10장 정도 됐어요. 거의 대서사시처럼 ‘나는 왜 글을 쓰지 못했나, 왜 책을 내지 못했나’에 대해서 쓴 장문의 프롤로그였는데, 많이 줄인 게 이 정도예요(웃음).
김하나 : 첫 책을 출간한 소감은 진부한 질문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소감을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책을 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노지양 : 유리상자의 노래가 있잖아요. ‘조심스럽게 얘기 할래요. 용기 내볼래요. 오늘부터 나를 작가로 불러도 될까요’ 같은...(웃음).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이 너무 길었고 그게 더 익숙한데, 앞으로 조금 더 작가가 익숙해지겠죠.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다린 만큼 제목이나 표지나 내용이나 제 마음에 쏙 들게 나왔어요. 또 (독자 분들이) 좋아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만족하고요. 제가 20대 중반에 방송작가를 시작했을 때 라디오 작가들이 책을 내던 시기였어요. <이소라의 음악도시>의 작가가 쓴 『그 남자 그 여자』 같은 책을 보고 ‘책 내고 싶어!’ 하고 서점 문을 열고 나왔는데, 그로부터 20년 후가 지났죠(웃음).
김하나 : 되게 영상적으로 다가오네요(웃음). 처음에 라디오 방송 작가로 커리어를 시작하셨고, 그러면 번역가로 일하신 건 몇 년쯤 되신 거죠?
노지양 : 만으로 15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김하나 : 지금까지 80여 권의 책을 번역하셨고요.
노지양 : 네.
김하나 : 80여 권을 번역하셨다는 건 정말 부지런히 하신 것 아닌가요?
노지양 : 내 글을 쓰고 싶을 때마다 오히려 번역을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제가 일 욕심도 있어서 많이 하기는 했어요. 또 번역이라는 게 ‘이제 그만해야지’ 하다가도 일주일 정도 있으면 하고 싶어요. 많은 번역가들이 그럴 거예요.
김하나 : 프롤로그에 “글을 쓰고 싶고, 써야만 이 들끓는 마음이 진정될 거라는 생각은 나를 떠나질 않았다. 먹고 살고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행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으니까”라고 쓰셨어요. 책 제목에 담긴 의미가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제목은 직접 지으셨나요?
노지양 : 제목은 편집자 님들이 회의하셔서 지어주셨어요. 처음에는 조금 ‘너무 트렌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거예요. 책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면서 프롤로그 쓸 때 ‘바로 이거야’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책을 안 내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 적도 굉장히 많거든요. ‘나는 번역도 많이 하고, 아이도 키우고, 잘 살고 있어’ 생각하면서도 퍼즐이 하나 빠진 것처럼 ‘이게 전부가 아닌 날이 있어’ 싶은 거죠.
김하나 : 소설을 써볼까 생각도 하셨었고, 예전부터 여러 시도를 하셨었는데요. 이번에 에세이를 쓰시면서 ‘글을 쓴다는 게 나한테 뭘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노지양 :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책 한 권이 나올 지경인데요(웃음). ‘나는 왜 글을 쓰려고 할까, 글을 쓴다는 게 나한테 뭘까’ 생각을 했었어요. 번역가들이 하루 종일 앉아서 문장을 계속 다듬고 있잖아요. 약간 미술관의 큐레이터나 복원하는 미술가 같은 생각이 들어요. 눈이 높아져서 글을 못 쓰기도 하고, 좋은 글을 번역하면서 해소되는 부분도 있는 거죠. 그런데 저도 표현욕구가 약간 강했던 것 같아요. 저도 SNS도 많이 하고 관종지수도 낮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웃음). 어떤 때는 책을 많이 읽으면 ‘나도 쓸 수 있는데, 비슷한 내용이지만 나만의 언어와 표현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라는 욕구가 생기잖아요. 동시에 책을 많이 읽으니까 자신감이 없어지기도 하고요.
김하나 : 번역을 하시면서 때로는 ‘나도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이 작가보다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실 때도 있었나요?
노지양 : 그럴 때 있었죠(웃음). 그런데 막상 써보면 그렇게 나오기가 쉽지 않아요(웃음). 그 간극을 이기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머릿속에는 아름답고 완벽한 그림이 있는데 직접 그려보면 초등학생 수준이잖아요(웃음). 그래도 일단 그려보고 내 한계를 알기까지 거의 10년 넘게 걸린 것 같아요. 지금 글 쓰면서 드는 생각은 ‘일단 쓰고, 아니면 고치거나 버리면 된다’는 거예요. 이 책 속의 어떤 글은 다섯 번 정도 다시 썼어요. 결국 다섯 번째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괴롭지는 않았어요.
김하나 : 다섯 번을 쓰시면서 즐거우셨어요?
노지양 : 네. 네다섯 번 정도 쓰면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그제야 알게 되더라고요.
김하나 :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정말 솔직하다’는 거예요. 첫 책을 내기 위한 간절함이라든지, 글 쓰고 싶은 욕망을 포기 못해서 망신을 자처한다든지, 그런 부분을 저 같은 사람은 숨겨요. 안 그런 척,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는 척, 가장을 하거든요. 뭔가 쉽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고요. 그런데 이 책에는 제가 느꼈던 부분이기도 하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한 것들이 너무 솔직하게 쓰여 있어요. 그걸로 인해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부분이 있었고요. 정말 솔직한 글이고 『헝거』 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노지양 : 그게 조금 연결이 돼요. 제가 ‘내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번역에 쓰는 건 그만해야겠다’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번역한 게 『헝거』 였어요. 『헝거』 까지 번역하고 3개월 정도 쉬면서 제 글을 쓰게 됐는데요. 『헝거』 원문을 봤을 때 어려운 단어가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그 솔직함이 정말 내장을 다 드러낸 것 같잖아요. 미국에서는 자전적 에세이 분야가 발달해서 솔직한 글을 많이 쓰는데, 그 중에서도 록산 게이는 조금 놀라웠거든요. 그 글을 보고 제 글을 썼을 때 ‘다 드러내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에세이들을 읽을 때 약간 머뭇거리는 듯 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어요. ‘조금 더 끝까지 이야기를 해보지, 왜 할 듯 할 듯 하다가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하지? 나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가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게 외국 책을 많이 읽은 영향도 있고요. 약간 의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함을 나의 무기로 삼아볼까’라는(웃음). 그런데 그 힘이 얼마나 큰지는 한 번 경험을 했어요. 다른 곳에 글을 올렸었는데, 제가 볼 때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을 다 썼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면 다들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쓴 건데, 저도 나이가 드니까 이렇게 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30대에 썼으면 약간 예쁜 척을 하고 싶었을 텐데 ‘나의 찌질한 욕망, 질투심, 열등감, 이런 걸 한 번 드러내 보자’ 싶었어요. 나에게 해소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공감해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김하나 : 이 책의 형식도 재밌죠. 영어 단어나 표현을 하나씩 놓고, 그에 얽힌 작가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인데요. 제가 결정적으로 읽다가 사랑에 빠진 챕터가 「Down to Earth」였어요. 그 글을 읽고 울었어요.
노지양 : 그 글을 많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엄마가 읽으시더니 뭐 그렇게까지 썼냐고...
김하나 : 어머니, 그렇게까지 썼기 때문에 이렇게 감동이 있는 겁니다(웃음).
노지양 : 그렇죠(웃음). 그런데 그 세대 분들은 자신의 모든 걸 이야기하는 게 익숙하지 않으시니까 그냥 고생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쓰지 뭘 그렇게까지 썼냐고 하시는데, 구체적인 사실이 들어가야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시고, 오히려 저희 가족들은 ‘우리 가족이 너무 이상적으로 그려진 거 아냐?’ 그러더라고요(웃음). 그게 ‘Down to Earth’라는 단어 뜻하고 내용이 잘 맞지 않았나 생각돼요. ‘소박한, 가식 없는, 허세 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거든요.
김하나 : 이런 형식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온 건가요?
노지양 : 일부러 만들어낸 건 아니고요. 되게 자연스럽게, 어떤 단어들은 계속 머릿속에 남아요. 그래서 적어놨다가 브런치에 ‘번역가의 단어들’이라고 몇 개 연재를 했었어요. 번역가라서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 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단어 이야기를 하면서 내 이야기를 섞어볼까’ 하고 시작하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까 단어들이 모이더라고요.
김하나 : 그러면, 번역가로 일하시면서 가장 다루기 까다로웠던 단어나 표현이 있다면 뭐였을까요?
노지양 : 책에도 썼는데 ‘commit’예요. 다른 번역가들도 이 단어를 번역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는데 계속 나와요(웃음).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한 번 써볼까?’ 생각했었고요. 최근에 접한 것 중에는 ‘at the end of the day’라는 게 있는데요. 그대로 번역하면 ‘하루의 끝에는’이 되는데, 그냥 ‘결국에는’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조금 멋있게 표현한 거죠. ‘그 날의 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고 1년 후의 이야기도 되는데, 그러니까 번역하기 되게 힘든 거예요. ‘결국에는’이라고 하기는 싫은데 ‘그 날의 끝에’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하는 과정이 재밌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요.
김하나 : 재미를 지금도 느끼시는군요.
노지양 : 그렇죠.
김하나 : ‘아, 이걸 써야겠다!’ 하고 발견했을 때 뿌듯하기도 하시고요.
노지양 : 너무 뿌듯하죠.
김하나 : 저는 노지양 번역가님이 번역하신 건 진짜 다 재밌게 읽었어요. 술술 읽혔고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을 기울였다는 게, 본인의 센스가 많이 발휘됐다는 게 느껴져요.
노지양 : 제가 조금 성격도 급하고 한 번에 쉽게 읽히는 글을 좋아하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또 방송 작가이기도 했고 제 글도 계속 쓰다 보니까 상생한 면도 있는 것 같고요. 영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너무 다르잖아요. 어디에서 끊어서 문장 구조를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서 읽히고 안 읽히고가 갈리는 것 같고, 어휘와는 조금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고민을 계속 하는 거죠. 읽고 또 읽고, 문장 바꾸고, 주어도 빼보고... 그 과정이 정말 오래 걸리고, 진이 빠지기도 하죠.
김하나 : 번역가의 일상에 대해서 궁금해지는데요.
노지양 : 궁금할 게 없어요.
김하나 : (웃음) 궁금할 게 없어요?
노지양 : 책에도 ‘복붙’이라고 썼잖아요(웃음). 일상이 정말 답답하고, 밥도 여유 있게 먹어본 적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책 보면서 먹고...
김하나 : 진짜요? 그 정도예요?
노지양 : 네, 정말 시간 싸움이거든요. 저는 글 쓰면서 너무 좋았던 게, 글은 생각보다 빨리 쓰는 게 가능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번역은 항상 내가 생각한 시간의 2.5배가 걸려요.
김하나 : 음... 생각이 잘못된 것 아닐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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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작가)
브랜딩, 카피라이팅, 네이밍, 브랜드 스토리, 광고, 퍼블리싱까지 종횡무진 활약중이다. 『힘 빼기의 기술』,『15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등을 썼고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