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언 라디오 PD “일기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추천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이분이 부디 계속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 부분을 보고 새삼 용기를 얻었어요.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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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버티고 있는 이곳이 조금은 버거울 때, 왠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을 때, 나에게 꼭 맞는 ‘내 자리’란 것이 있을까 의문이 들 때, 지금까지 지나온 자리와 앞으로 걸어갈 길들을 가늠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분기점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선택을 한다. 그것은 인생을 바꿀 큰 결심이 되기도 하고, 가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새로운 다짐이 되기도 한다. 이 책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은 이러한 다양한 선택과 그 과정에서 저자가 만난 사람들 그리고 삶의 표정이 담고 있다. 신문사 기자에서 방송사 시사교양국PD로 그리고 다시 라디오PD로, 어떨 때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어떨 때는 떠밀리듯 자기만의 자리를 찾아 이동해 현재는 MBC 라디오PD로 일하고 있는 박정언이 그 진했던 시기를 자연스럽고 솔직한 필치로 담았다.


첫 책을 쓴 소감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나온 책인가요?

 

스무 살부터 꾸준히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글들이 모여서 책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책을 쓰려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고, 이석원 작가님( 『보통의 존재』 ,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저자)의 적극적인 지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는데요. 제가 10대 시절부터 이석원 작가님의 열혈 팬이었던지라 팬레터(?)를 가장해서 제 일상 얘기를 많이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 편지를 오랫동안 봐오셨던 이석원 작가님께서 책을 내볼 것을 권해주셨고, 그렇게 묵혀뒀던 제 일기와 편지글들이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오게 된 거고요. 책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일기들을 다시 세어보니 천 편이 조금 넘게 모여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책’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썼던 글이 아닌 만큼, 제 책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은 이십대의 길목에서 듣고 보고 느꼈던 풍경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문사와 방송사라는 직장을 가지게 되면서 그 안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들도 많이 녹아 있고요. 또 보통의 20대들이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고민, 그러니까 제게 맞는 자리가 과연 세상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했던 시절부터, 조금 더 제게 맞을 것 같은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글들이 많습니다.물론 아직도 그 과정은 계속되고 있지만요.


일간지 기자로 교양PD로 라디오PD로 일하셨고 일하고 계세요. 세 가지 일이 PD님께는 어떤 의미인가요?

 

기자는 멋지지만 버거운 일, 시사교양 PD는 첫사랑 같은 직업, 라디오 PD는 동반자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퍼뜩 듭니다. 기자로 일한 시간은 1년도 되지 않아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지만, 순발력이 필요하고 빠른 사람에게 맞는 일인 것 같습니다. 판단하고 실행해야 하는 시간은 적은 데 비해, 다뤄지는 사안이 커서 제게는 버거운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기자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안함 사건이 발생해서, 평택의 제2해군기지에서 숙식하면서 유가족들을 취재한 기간이 있었는데, 데일리로 떨어지는 지시를 처리하는 데 급급해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깊게 고민하질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전사자의 가족사진을 1등으로 구해오는 데 눈이 멀어 유가족이 있는 집으로 무작정 찾아간다든지 하는 일들을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소위 ‘기레기’였구나 싶기만 합니다.

 

시사교양PD는 오랫동안 동경하고 사랑하던 직업이었습니다. 정확히는 MBC 시사교양국에서 만든 프로그램들의 오랜 팬이었다고 해야겠네요. 결국 원하던 직업을 가졌지만 오래 가진 못했습니다. 저의 일방적인 환상이 너무 컸다고 해야 할까요. 시사교양PD로 입사하자마자 6개월간 파업을 했고 그 이후에 저는 다른 직종으로 전직을 택했습니다. 오랫동안 동경했지만 결국에는 씁쓸하게 끝난 첫사랑 같은 느낌이 드네요.

 

그렇게 기자, 시사교양PD를 거쳐 지금은 라디오PD로 일하고 있습니다. 라디오PD라는 직업이 사람이라면, 사려 깊고 차분한 동반자나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일단 일이 다루는 소재가 사람과 이야기 그리고 음악이다보니 훨씬 더 다정다감한 측면이 있고요. 다이내믹하진 않지만 매일 조금씩 마음의 온도를 올려주는 동반자 같은 일이라는 점에서 제겐 가장 잘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줄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라디오 PD로 현재 갖고 있는 고민은 무엇인가요?

 

라디오라는 매체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수치로 증명되고 있거든요. TV조차 올드미디어가 된 마당에, 라디오는 말할 것도 없는 구식 매체지요. 라디오말고도 들을 것과 볼 것들이 넘쳐나니까요(당장 저도 집에 가면 유튜브를 봅니다). 라디오PD로 갖고 있는 고민들 역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재밌는 것들 속에서 어떻게 조금 더 들을 만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편안하고 따뜻한 재미를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게 요즘의 주된 고민입니다. 라디오 매체에 종사하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비슷하게 가지고 있을 고민이지만요.

 

주말의 산책자 일상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일상은 무엇인가요?

 

주말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주로 빵을 사러 갑니다. 저희 집이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어서 아침만 되면 조기축구 동호회 분들의 함성 소리 때문에 자동으로 일찍 일어나게 되거든요. 그렇게 일곱시에서 여덟시 사이에 눈을 뜨면 빵집이 오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나갑니다. 맥도날드에서 맥모닝을 사올 때도 있고 스타벅스에서 베이글을 사올 때도 있지만 가끔은 택시를 타고 집에서 좀 먼 빵집에 가서 빵을 사올 때도 있습니다.

 

빵을 살 때는 꼭 그날 먹을 만큼만 사둡니다. 빵을 사는 일 자체가 행복하기 때문에 내일의 빵을 사는 기쁨은 내일의 저에게 남겨두고 싶거든요. 좋아하는 빵은(TMI인가요?!) 조금 올드하지만 팥이 들어간 모든 종류의 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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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를 이석원 작가님이 써주셨어요. 추천사를 읽고 어떤 기분이 드셨는지요?

 

추천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이분이 부디 계속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 부분을 보고 새삼 용기를 얻었어요. 책을 내게 되긴 했지만 첫 책이고, 사람들이 과연 어떤 평가를 할지 두려운 면도 많았거든요. 이 추천사를 읽고 나니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내가 쓴 글과 앞으로 쓰게 될 글을 지지해주는구나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무엇이 되든 계속 써야겠다는 다짐도 했고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좋았던 책 1권만 추천해주세요.

 

『어느 독일인의 삶』 (열린책들, 2018) 지금 읽고 있는 책입니다. 나치 선전부 장관 괴벨스의 전직 비서였던 ‘브룬힐데 폼젤’이라는 여자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 내용인데요. 어떻게 보면 제 책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과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평범한 20대의 여성이 일을 시작하게 되고, 직업의 세계를 겪으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책이거든요. 다만 저는 2019년 한국의 방송사에서 일하고 있고, 그녀는 1940년대 괴벨스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어떻게든 남들보다 잘 살려고 하고, 어떻게든 자신이 맡은 일에서 최선을 다해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한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요?” 책 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말입니다. 악의 평범성을 다룬 책으로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 떠오르는 구절이지요.

 

하지만 일을 대하는 개인의 내면을 다뤘다는 점에서 저는 상당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도 딱 저런 태도로 일한 적이 많았거든요. 당장 눈앞에 떨어진 일을 잘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모범생 같은 마음으로요. 나치나 괴벨스라고 하니까 굉장히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우리가 우리의 일을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너무 거창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일상 속에서 스스로 깨어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책입니다. 

 

앞으로 어떤 사람, 어떤 PD가 되고 싶나요?

 

일기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디 가서 하기 어려운 말을 왠지 털어놓고 싶은 사람, 오늘 하루 시시콜콜한 일들에 대해 하염없이 대화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요. 큰 위로는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한 존재 있잖아요. 사람으로서도,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빵 터지게 웃겨준다거나 엄청난 깨달음을 주진 못하지만, 자주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존재가 되고 싶어요.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박정언 저 | 달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과 길을 걷다 스치듯 지나가는 익명의 타인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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