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기념한 창작뮤지컬 <1446>이 개막했다. 제목인 ‘1446’은 한글이 반포된 연도로, 무대는 세종대왕의 업적뿐 아니라 남다른 애민정신을 드러내며 겪어야 했던 인간 이도(李?)의 고뇌와 갈등을 녹여냈다. 트라이아웃 공연을 시작으로 2년간의 탄탄한 제작 과정을 거친 작품답게 초연임에도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사하고 있지만, 많은 국민이 존경하는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담은 만큼 배우들의 어깨는 무겁다. 특히 태종은 세종과는 전혀 다른 면모로 극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데, 역사극에서는 만나기 힘든 배우 고영빈 씨의 활약이 눈에 띈다. 공연 전 고영빈 씨를 직접 만나 봤다.
한글날도 있었고, 무대에 서는 마음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여러 면에서 배우로서 참 만족스러운 공연이에요. 전반적인 내용이나 구성, 음악이 좋아서 제가 등장하지 않을 때도 무대 뒤에서 후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울고 웃어요. 작품에 늦게 투입된 데다 체력적으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극장에 빨리 오고 싶게 하는 작품이에요.”
<그리스>부터 <바람의 나라>, <컴퍼니>,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등 고영빈 씨는 대부분 스타일리시한 모습으로 무대에 섰기 때문에 처음 태종 역을 들었을 때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하지 않았던 스타일이긴 하죠. <바람의 나라>의 무휼도 강인하지만 부드럽고 내면적이라면 태종은 표출하니까. 그런데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때부터 주변에서 사극과 어울린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평소 세종대왕은 존경하는 분이라서 이번 작품에는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고요. 다만 역사적인 인물은 배우로서 더욱 책임이 따르는데, 역사를 고증하는 작품은 아니니까 부담감 없이 다가가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무엇보다 대본과 음악에 집중했고요.”
극 중 세종이 ‘아버지의 피’를 언급하는데, 세종과 다른 태종의 ‘피’는 어떤 걸까요?
“피를 좋아하는 피겠죠. 다른 사람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세종이 좀 더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모두 명분이 있는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너무 잔인하죠. 내가 겪었던 수모와 불안을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지만 자신의 욕심도 있는 것 같고. 하지만 태종은 끝까지 자식을 위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 부분은 연기하면서도 많이 고민되더라고요.”
표정이나 음색이 기존 작품과 너무 달라서 놀랐습니다. 특별히 노력한 면이 있나요?
“저는 무엇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공을 들이지는 않아요. 대신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는 편이에요.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팍 터질 때가 있거든요. <1446>은 작품의 힘이 큰 게, 대본에 집중하고 음악을 부르다 보면 태종의 에너지와 음색이 나오더라고요. 연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캐릭터가 잡힌 거예요. 특히 제작발표회 무대에서 확실한 캐릭터가 서서, 거기에 살을 붙이면서 연습했어요.”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도 못내 아쉬워하잖아요. 고영빈 씨 역시 워낙 주인공을 독차지했던 배우라 세종이 아닌 태종으로 캐스팅된 것에 조금 섭섭하지 않았을까요(웃음).
“아니요, 아니에요. 이미 그 시기는 지났어요(웃음). 이 작품에서는 태종이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세종이 더 크게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만족하고 있어요. 주인공에 대한 생각을 다 내려놨다면 솔직히 거짓말일 거예요. 때로는 슬프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재밌어요. ‘세월이 이만큼 흘렀구나, 흐름에 잘 따라가고 있구나!’ 싶어요. 이제는 주조연을 떠나 다양한 작품에서 다채로운 캐릭터를 많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제 나이에 소화할 수 있는 주역이 있다면 정말 감사하지만, 이제 후배들을 받쳐주는 무게감 있는 조연도 선배로서의 역할인 것 같고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나 전환점이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작품은 <프리실라>였어요. 드래그 퀸에 코믹한 인물이라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때부터 많이 깬 것 같아요. 이후에는 강인한 캐릭터도 많이 주문하시더라고요. 제가 싫증을 잘 내는 편인데 슬슬 재미가 없어질 즈음, 화려함은 예전만 못하지만 소소한 재미로 무대에 설 수 있는 캐릭터가 오더라고요(웃음). 예전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있어야 만족스러웠는데, 지금은 ‘안 멋있으면 어때?’ 싶어요. 무대 위에서 흐트러지고 망가진 모습도 좋아하는 관객들이 있을 테고, 그러면서 배우로서 더 많은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멋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어떤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고 싶나요?
“태종처럼 분량이 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웃음). 전체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인물보다는 확실한 캐릭터로 무대에서 많이 즐길 수 있는 역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게 좀 더 내공을 쌓고, 이후 중견 배우로서 참여할 수 있는 창작뮤지컬의 주역을 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이 <바람의 나라>처럼 고영빈 하면 바로 떠오르는 콘텐츠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죠. 또 예전에는 무대만 고집했는데, 이제 배우 고영빈의 색깔을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에도 참여하고 싶고요. 할 수 있는 게 연기밖에 없어서 계속 배우로 관객들을 만나고 싶어요.”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