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통찰력 강의는 언제나 시대를 꿰뚫고 미래를 향해 있다. 교정을 떠나 대중들을 위한 인문학자로 제 3의 인생을 살고 있는 김경집이 그리는 노년은 어떤 모습일까?
서른 살 무렵, 생의 첫 25년은 배우고, 다음 25년은 가르치고, 마지막 25년은 글 쓰며 살겠다고 다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계획은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음 그런 생각을 한 건 삼십대였어요.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학생들을 25년쯤 가르치고 나니까 더 이상 강의가 즐겁지 않더라고요. 신입생이 들어오면 어떤 아이들일까 궁금하고 강의 준비하면서도 설레고 그랬는데 그런 기쁨들이 사위어 가는 걸 보면서 느꼈죠. 그만둘 때가 된 건가 보다. 그 때부터 제 남은 삶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과감하게 그만두고 지금은 글쓰고 대중들을 위한 강연을 하고 있어요.
책 『마흔 이후, 이제야 알게 된 것들』 은 마흔 이후에 알게 된 인생의 우선 순위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지금 가장 1순위에 놓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여전히 알고 싶은 게 많아요. 호기심. 궁금증. 저희 아버지는 공무원에 장손이었는데도 진보적이셨어요. 자식들과 대화하는 걸 참 좋아하셨죠. 당시만 해도 밥상머리에서 말하는 걸 용납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저희 집은 밥상머리가 가장 시끄러웠어요. 오만 얘기가 다 나왔죠. 그래서인지 형제가 육남매인데, 전공이 다 달라요. 사실 전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무슨 콤플렉스가 있었냐면 과다한 관심사였어요. 언젠가는 제 누이에게 그런 고민을 얘기 했더니, 그건 지적 산만함이 아니다. 그런 애정과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돌이켜보면 다양한 것에 걸친 관심과 호기심이 큰 자산이 된 거 같긴 해요. 호기심이 멈추는 순간이 노화의 어떤 중심이 아닌가 싶고요.
책은 “속도를 얻으면 풍경을 잃고, 속도를 잃으면 풍경을 얻는다”는 문장으로 읽히기도 하는데요, 속도와 풍경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린 교육 받기도 그랬고, 삶도 그렇고, 그냥 직진이잖아요. 옆길 샛길 이런 것도 용납이 안 되고요. 직선적이고 철저한 속도의 삶이죠. 물론 그게 통했던 건 시대적인 상황도 있었다고 봐요. 사실 20세기 전체를 관통했던 힘이 속도와 효율이었고, 패스트 무빙의 사회였잖아요. 20세기 전반은 전 세계가 전쟁이었어요. 전쟁하는데 누가 인격적이고 도덕적이고 창의적인 것들을 생각하겠어요? 누가 적을 먼저 쓰러뜨리냐의 문제였죠. 그러다 전쟁이 끝나고 세계는 산업화 패턴을 따라갔죠. 하지만 이 때의 산업화는 소수의 몇 나라만 성과를 누렸던 19세기의 산업화와는 달라요. 현지에서 대량 생산해서 현지에서 대량 소비하는 구조의 산업화에요. 똑같아요, 속도와 효율이. 그니까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게 속도와 효율이라면, 우리가 60년대 이후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철저하게 이 속도와 효율에 맞는 교육과 삶을 살아서예요. 그러다 1997년에 IMF를 당하는 이유는 20세기 후반, 서서히 탈속도화 돼가는 흐름에 맞추지 못해서이죠. 창조?혁신?융합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한방에 나간 거죠.
우리사회에서 속도와 효율은 여전히 힘이 세요.
맞아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도 속도의 삶을 살아요. 속도에서 어느 정도 획득이 생겼으면 슬슬 둘러 볼 수 있고, 곡면의 길을 갈 수도 있는데 그러질 못해요. 제가 40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균형을 갖출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에요. 운전을 예로 들면, 초보 운전자는 바깥의 풍경이 안보여요. 목적지를 안전하게 가느냐가 중요한데, 차츰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속도도 낼 줄 알게 되고 바깥을 둘러 볼 여유도 생기죠. 저는 그럴 수 있는 나이가 40대 아닌가 싶어요. 사람들은 풍경을 자꾸 경치로 생각을 하는데, 책을 보는 것도 느린 행위잖아요. 그런 느린 행위들이 다 풍경이에요.
『나이듦의 즐거움』 이라는 책에는 ‘잃은 것은 시력, 얻은 것은 심력’이라는 구절이 나와요. 몸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로 대체되는데요, 나이 들어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또 무엇일까요?
저는 머리가 빨리 하얘졌는데, 직업상 염색할 필요도 없고, 전혀 스트레스가 없었어요. 근데 노안이 왔을 땐 서럽더라고요. 원래 고도 근시였는데 안과 의사 말이 한 만 분의 일의 확률로 원래 따로 있는 근시 근육과 노안 근육이 맞물려있대요. 그래서 노안이 오면서 근시가 풀렸어요. 노안이 왔다는 푸념을 했더니 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야, 지금까지 가까운 것만 보고 살았으니까 좀 먼 거 보라고 하는 거야. 그게 나잇값을 하는 거야. 가까운 거를 못 본다고 서러워 할 게 아니라 이제 먼 걸 자연스럽게 볼 수 있고 거기에 집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번 해 봐.” 친구의 말을 듣는데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력은 나빠졌지만 심력을 얻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 드는 걸 몸으로 느낄 때 서럽고 슬프고 당혹스럽고 그렇잖아요. ‘있던 게 없어진다’고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얻는 것도 분명히 있어요.
그렇게 얻은 심력으로 우리의 노년들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그때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그 나이가 되지 않아서 말을 아꼈는데, 이제는 저도 60대니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나라 노인들은 사회적인 삶이 정말 안 되어있긴 하지만, 본인들 스스로도 좀 무책임하지 않나 싶어요. 솔직히 노인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는 사람들이잖아요. 더 이상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그렇다면 그 시대가 가야 될 길까지 방해하는 걸림돌은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나이가 들면 보수적으로 되는 게 아니라 진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왜냐면 젊은 시절이야 ‘이건 아니다’ 싶은 것도 대놓고 싸우거나 고치려고 하기가 쉽지 않아요. 밥줄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나이 들면 여러 의무에서 해방도 되고, 살아온 경험도 있고 내 밥줄을 쥐고 흔드는 놈들도 없잖아요. 근데 그렇게 사는 게 익숙해져서 비겁하게 입 다물고 있고, 공부하지 않고 그러는 건 아니라고 봐요. 특히 지금의 60대 70대는 최초로 고등학교까지 보편적인 교육을 받은 첫 세대, 이른바 ‘쎄시봉 실버 세대’거든요. 뭔가를 배우긴 제대로 배웠어요. 그러면 내 자식들을 위해서, 내 손자를 위해서 ‘내가 살았던 세상보단 좋아져야지, 단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나 같은 그런 고민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라는 게, 지금의 노인 세대가 해 줘야 되는 몫이에요. 전 손자들 사진을 보면서 웃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이렇게 말해요. “네 손자랑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 세대 아이들이 전혀 행복하지 못하면, 과연 걔가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직 힘이 남았을 때 걔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면, 한 뼘씩 이라도 좀 고쳐놓고 가자”라고요.
해마다 유서를 쓰신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쓰시나요?
지금은 애들이 눈치 줘서 안하는데, 그래도 짧게는 써요. 근데 예전하곤 좀 달라진 것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만약에 내가 갑자기 부재 상태가 되면 얘들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에 그런 것 위주로 썼는데, 지금은 애들도 다 크고 다들 자기 알아서 살겠죠. 대신 요즘 제 유서는 12월 마지막 날에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의, 저한테 보내는 편지 같아요. 일 년 동안 이렇게, 이렇게 사는 건 참 잘 했어, 이렇게 사는 거는 좀 별로 맘에 안 들어. 내년엔 이런 거 했으면 좋겠어. 뭐 이렇게요.
지금 같은 정보화 시대에 노년은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의 시대에 노년의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라고 봐요. 예전의 노동은 몸을 써야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늙은 사람들 몫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몸 쓰는 노동이 없잖아요. 머리 쓰는 노동이지. 나이가 드는 사람은 물론 기억도 조금씩 쇠퇴하고 판단 속도도 더디긴 하지만, 경험이 있고, 지식이 축적돼 있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잖아요. 지금이야말로 나이 들어도 멋지게 노동을 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해요.
『나이듦의 즐거움』 에서 “권세나 막강한 재력이 아니라 부드럽지만 어긋나지 않는 인격에서 비롯된 것”이 권위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노년의 권위는 어떤 건가요?
가지고 있는 게 없으면, 내가 너보다 많은 게 나이밖에 없어요. 경험이나. 그래서 그걸로만 유세를 부리는 거죠. 헌데 저는 나이 들면서 갖는 가장 큰 힘이 관용이라고 생각해요. 젊은 애들이 어떤 고민 때문에 끙끙거리면 “야 그거 별거 아니야. 나도 해봤는데”라면서 자신의 경험을 얘기해줄 수 있겠죠, 그리고는 “내가 뭐 도와줄 일 없니?”라고 물으면서 들어줘야 해요. 훈계하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의 큰 힘은 들어주기와 너그러움이에요. 나이 들수록 그걸 마련해야 해요.
대중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을 많이 하시는데요. 노년의 대중들에게 인문학은 왜 필요할까요?
강연을 갔을 때 노인들이 많으면 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여러분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세요?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다 보수라고 해요. 특히 경상도에 가면 말할 것도 없이. 그러면 전 나이가 들어가면, 보수가 될 수가 없다고. 사실 보수나 진보의 개념은 미국에서 다르고, 유럽에서 다르고 유럽에서도 영국과 독일에서 말하는 게 달라요. 저는 그들에게 제가 생각하는 보수에 대해 얘기해요. 보수는 내가 집에서 배운 가치, 학교에서 배운 가치다. 그러니까 사람으로서의 도리, 예의, 자유와 평등, 공정성, 정의, 민주주의 그런 것들이죠. 보수란 살아가면서 그런 가치를 실천하고 사는 거라고, 그게 망가지거나 억압되거나 왜곡되면, 비판하고 저항하고 때론 맞서 싸워서 쟁취하는 게 진짜 보수다. 문제는 보수하고 진보의 구조가 아니라, 보수 속에 감춰져 있는 수구가 있다는 거예요. 노인 세대가 해야 될 가장 큰 일은, ‘나는 보수지 수구여서는 안 돼’라고 하는 분기점을 정확히 인식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인식이 안 되니까, 하는 행동은 수구인데 본인은 보수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말했듯이 노인들은 진보적이어야 되고 진보일 수밖에 없다. 생각을 좀 바꿔라. 그리고 생각이 바뀌려면, 내 사고와 지식이 머무르는 순간 그냥 고령화 되는 건데, 아니 옛날에는 바빠서 책을 못 읽었다고 치지만, 지금은 남은 게 시간이니 책 좀 읽으라고 말해요. 이상한 페이크 뉴스에 빠져들지 말고. 책을 읽어서 내가 주체적으로 판단 할 수 있고, 그런 힘을 키울 수 있는 게 노년의 시간이라고요. 처음엔 화를 내는 사람들도 좀 있는데 끝날 때쯤 되면 “그런 생각들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반응들이 많아요.
우리 모두 노년을 맞이할텐데요. 좀더 지혜로운 노년을 위한 방법이나 노력들이 있을까요?
저는 지금의 40대, 50대의 몫이 참 크다고 생각을 하고요. 이 세대는 인류사에서 거의 유일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아날로그의 끝자락 세대잖아요. 아날로그는 온기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디지털도 누리고 있는. 60대는 아날로그 끝자락에서 끝난 거예요, 디지털로 들어가지 못하고. 디지털은 해봐야 스마트폰을 쓰는 정도가 다에요. 하지만 지금의 40대 50대는 디지털의 첫 단추를 열어본 세대에요. 속도도 누려요. 그러면서 아날로그의 감성도 가지고 있죠. 따뜻한 온기와 속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세대죠. 그런데 이게 엇박자가 나면 감성은 윗세대 보다 딸리고 메말라 있는데, 다음세대의 디지털 속도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밀리는 거죠. 뒤엉킨 스텝으로 가니까 정신은 하나도 없고, 밑에선 치고 올라오는 거 같고, 불안하고 이런 거죠. 그 속도를 누려봐야 얼마를 누린다고. 하지만 이 속도에 삶의 어떤 온기라고 하는 게 결합 됐을 때 갖게 되는 컨텐츠의 파워, 그걸 극대화하고 전달해줄 수 있는데 지금 40대 50대의 의무이자 권한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만 제대로 하고 넘어가도 속된말로 나잇값을 하고 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나잇값을 위해 필요한 게 인문학일까요?
비슷해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하는 의제는 누가 권력을 갖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 시대가 생산한 가치를 미래에 유의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느냐예요. 이건 빈부와 지위 고하를 떠나서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몫이잖아요. 결국은 인문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 교양 이런 게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미래 의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어떤 대안을 도출할 수 있는 어떤 동기? 그런 걸 마련하는 게 인문정신이 아닌가 싶어요.
기낙경
프리랜스 에디터. 결혼과 함께 귀농 했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해 빡세게 적응 중이다. 지은 책으로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시골은 좀 다를 것 같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