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2018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포드는 ‘가장 미국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로 손꼽힌다. 1976년 『내 마음의 한 조각 A Piece of My Heart』을 시작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절대적인 행운 The Ultimate Good Luck』, 『와일드라이프 Wildlife』, 『여자에게 약한 남자 Women with Men』, 『캐나다 Canada』, 『스포츠라이터 The Sportswriter』, 『독립기념일 Independence Day』 등 미국식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썼다.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스웨덴 등 여러 나라에서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특히 『독립기념일 Independence Day』 로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을 받으며 명실공히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박경리 문학상’ 심사위원들은 리처드 포드의 ‘일상적 삶의 사실주의’를 높게 평가하며 그를 수상자로 선정하는 데 전원 합의했다. 김우창 심사위원장은 “포드의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오늘의 삶이 벗어나지 못하는 여러 크고 작은 불행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삶의 길”이라고 말하며 “포드는 보통 사람의 보통의 삶-고통과 비극을 멀리할 수 없는 보통의 삶,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성실한 삶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수상을 위해 방한한 리처드 포드 작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국 독자와의 만남을 잊지 않았다. 지난 29일 저녁 합정동의 한 북카페에서 이루어진 만남으로, 『스포츠라이터』와 『독립기념일』 을 번역 출간한 문학동네가 마련한 자리였다. 이날의 행사는 문강형준 문학평론가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그는 리처드 포드 작가의 약력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1944년 미시시피 주 잭슨에서 출생한 리처드 포드는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이후 로스쿨에 다니다가 그만둔 후 소설 창작을 시작했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에는 잡지 편집자, 대학 강사, 스포츠 잡지 기자로 일했다. 1986년 『스포츠라이터』를 시작으로 ‘프랭크 배스컴’을 주인공으로 한 4부작을 쓰기 시작했는데, 배스컴은 작가의 문학적 페르소나이자 미국 문학사상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배스컴 4부작’은 『독립기념일』 , 『지형 The Lay of the Land』, 『솔직하게 말하도록 해주세요 Let Me Be Frank With You』로 이어졌다.
포드 작가는 ‘박경리 문학상’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한국 독자들이 나의 소설을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것이 너무 고맙다”고 답했다. 동시에 “만약 수상자 선정이 실수였으면 되돌려도 된다”고 말하며 특유의 유머 감각을 드러냈다. 수상 이전에는 박경리 작가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그는 “수상 소식을 듣고 나서 『토지』 를 읽기 시작했는데 (워낙 내용이 방대해) 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다”면서도 “ 『토지』 속에는 한국의 역사와 기원이 들어있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해야 되는 일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낙관, 선, 희망을 재정의한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한 문학동네에 감사 인사를 전하며 『독립기념일』 의 앞부분을 낭독했다. 뒤이어 문강형준 평론가가 한국어판의 같은 부분을 읽은 후 질문했다.
문강형준 : 자신의 작품이 번역된 것을 볼 때의 느낌이 어떤지 궁금하다.
리처드 포드 : 아주 흥분되고 기분이 좋다. 나도 대학 시절에 영어로 번역된 많은 유럽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번역이라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거기에서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과 내가 얼마나 비슷한지’를 항상 발견할 수 있다. 기술적인 것을 번역하는 일은 쉬울지 몰라도 문학처럼 인간의 마음에 관해 쓴 작품을 번역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번역가들에게 굉장히 고마운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문강형준 : 『스포츠라이터』와 『독립기념일』에 대해 소개한다면?
리처드 포드 : 『스포츠라이터』는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썼다. 스포츠 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한 남자-결혼에도 실패하고 죽은 아들을 항상 그리워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을 쓰기 전에 나의 아내가 ‘행복한 사람에 대해서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행복한 삶에 대해서 쓰려면 그가 극복할 불행에 대해서 먼저 써야 된다고 생각했다. 『안나 카레니나』 의 첫 번째 문장처럼 ‘모든 행복한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는 말은 진실이다. 하지만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져야만 하는 상태다. 그래서 『스포츠라이터』에는 유머와 슬픔이 같이 결합되어 있다. 유머 속에서 슬픔을 찾고 슬픔 속에서 유머를 찾는 것이 작가로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스포츠라이터』의 주인공의 10년 후를 그린 작품이 『독립기념일』 이다. 아들 하나는 죽고, 남아있는 한 아들을 데리고 독립기념일 휴일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가서 즐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여행을 하는 전형적인 플롯이다. 그 과정 속에서 아들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보여주려고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문강형준 : ‘독립’의 의미에 대해 묻고 싶다.
리처드 포드 : 독립이라는 것은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깊게 박혀있는 개념이자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독립을 ‘자신과 나머지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로부터 독립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난 너와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미국의 독립이라는 것은 영국으로부터 미국이라는 나라를 분리시켜버린 것이다. 나는 ‘이미 분리돼 있는 사람에게 독립이라는 것은 다시 다른 사람과 엮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노래 「Independence Day」에 ‘우리 이제 작별할 때가 되었어, 오늘은 독립기념일이잖아’라는 가사가 있는데, 큰 영향을 받았다. 노래 자체도 아들과 살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돌아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떠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독립기념일』 은 궁극적으로 매우 낙관적인 타이틀이라고 생각한다.
문강형준 :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리처드 포드 : 다른 모든 직업이 그러하듯, 직업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대한의 것을 뽑아내는 것이다. 소설가가 다른 직업보다 더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소설가라는 직업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내가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세상에 주는 것이다. 다른 직업들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소설가라는 직업은 조금 더 독특하고 특이한 것들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설가일 수 있는 것은 독자이기 때문이고, 독자가 아니었다면 절대 소설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위대한 소설들을 읽으면서 그 전에는 절대 느껴보지 못했던 것을 느꼈다. 나도 사람들에게 이런 걸 느껴보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문강형준 : 난독증이 있다고 알고 있다.
리처드 포드 : 그렇다. 난독증이라는 것은, 일단 독자로서 장애물이었다. 느리게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빠르게 읽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언어는 단지 정보가 아니다. 단어이고, 의미이고, 소리이고, 그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매체다. 언어로부터 그런 아름다움을 흡수할수록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문강형준 : 『스포츠라이터』, 『독립기념일』 에는 이렇다 할 극적인 해피엔딩이 없다.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리처드 포드 : 매우 낙과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독립기념일』 의 마지막에 퍼레이드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프랭크가 동참한다. 그에게 구원을 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직업 소설가로서 내가 하는 일이란 낙관이 무엇이고 선이 무엇이고 희망이 무엇인지 재정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개념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 부분을 쓸 때면 항상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여기에 과연 좋은 것(good)이 있는가’ 낙관주의와 선,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히 당신을 찾아오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어떤 것이다.
문강형준 : 두 소설에는 삶에 대한 성찰이 많이 나온다. 프랭크 배스컴이 삶을 보는 관점이 자신과 비슷한가? 삶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리처드 포드 : 프랭크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프랭크는 나보다 더 친절한(nice) 사람이다. 나는 아주 괴팍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한다(좌중 웃음). 삶은 나의 아내다(Life is my wife). 내가 생각하는 삶이라는 것은 아내와 거의 일체된 어떤 것이다. 내가 하는 일에 굉장히 애착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와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애착이 가지는 않는다. 이 질문을 40년 전에 받았더라도 똑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삶’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독자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 독자들이 보내온 질문에 더해, 즉석에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소설을 쓰기 전에 다른 전공과 직업을 가졌었다고 알고 있다. 결국 문학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책을 쓰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 기여할 수 있는 것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1960년대를 주로 살았는데, 그 당시 삶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유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문학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
어디에서 영감을 얻나?
독서를 할 때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은, 삶이라는 것이 반드시 우리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단어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을 너무 기쁘고 즐겁게 생각한다. 항상 메모를 하는데, 내가 듣고 보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적어 놓는다. 그것들이 이곳의 삶이고 삶의 일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들 중에 아주 많은 것들을 놓친다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상실이다. 잃어버린 삶(missing life)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인 것이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writer’s block)는 어떻게 하나?
writer’s block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 쓰기 싫으면 안 쓰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서 지배받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만약 내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다면 ‘아, 난 이걸 하기 싫은가 보다’라고 생각한다. 어떤 신비로운 힘 때문에 갑자기 쓸 수 없게 된다거나, 그런 일들은 믿지 않는다.
비평가나 독자들의 리뷰를 읽는지 궁금하다.
읽지 않는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쓰는 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읽었다. 악평은 나를 너무 불행하게 만들었고, 좋은 서평도 나를 충분히 기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내가 ‘왜 읽어? 읽지 마’라고 했고 나는 ‘그래, 안 읽을게’라고 했다. 그게 30년 전의 일인데, 그렇게 된 이후로 훨씬 행복해졌다.
코미디와 비극 중에서 무엇을 좋아하나?
코미디를 더 좋아한다. 즐겁지 않은 것이라면, 진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울기보다는 웃고 싶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어머니는 나를 코미디언이라고 불렀다. 항상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 했고, 모든 것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현재 74세인데,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필립 로스가 그랬듯 은퇴할 것인가?
아마 은퇴를 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군가 나에게 ‘이제 (당신은) 그만 써야겠다’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고 싶다. 그래서 필립 로스의 결정을 아주 존중한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왜 하나만 대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나의 중요한 가치만 좋아하는 것은 삶의 모습과도 맞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고, 나의 행동을 통해서 최소한의 해를 끼치며 살고 싶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유용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들이 내 삶의 가치들이다.
리얼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내가 나무라고 쓰면 그걸 읽는 독자가 나무를 떠올리는 것이다. 책에 쓰인 단어가 당신이 알고 있는 삶 속의 실제적인 어떤 것으로 당신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보다 소설 속에 쓴 단어와 묘사들이 더 생생할 때가 있다. 소설 속에 있는 리얼리티라는 것은 전적으로 리얼한 것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굉장히 미학적인 것이고, 상상적인 것이고, 한 단계 높여진 리얼리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모든 문학 속에서 순수한 의미의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일한 목표는, 그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 삶에 있는 어떤 것을 더 잘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독립기념일』 을 읽으면서 발견했으면 하는 가치가 있는지 궁금하다.
단어들에 집중하면서 읽어 가면 뭔가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이 담고 있는 어떤 것과 나 자신과의 관계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들에 집중하면서 읽으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소설을 ‘내가 이미 생각한 어떤 것을 담는 용기’ 같은 것으로 삼고 있지 않다. 당연히 독자들은 자신만의 방식 속에서 단어들을 읽어내고 소설을 다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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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일리처드 포드 저/박영원 역 | 문학동네
고통과 비극을 멀리할 수 없는 보통의 삶”과 그 속의 일상적 불안과 소외, 상실감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통해 성실한 삶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촘촘하고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