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세상에서 가장 뜻이 긴 단어 중에 '마밀라피나타파이'가 있다고 한다. '서로에게 필요하지만 내가 먼저 하고 싶지 않은 어떠한 것에 대해 상대방이 먼저 해주기를 바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눈빛'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믿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아니지만, 오전과 오후, 저녁, 새벽의 내가 일을 앞두고 열심히 서로에게 눈빛을 보내고 있다. 이제는 어릴 때처럼 추파춥스를 쭙쭙 빨며 나는 잘 모르겠고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고 몸을 비비 꼴 수 없다는 게 슬프다. 싫은 일과 싫은 관계를 나보다 능한 어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빠질 수 없다니. 학생 때까지는 어느 정도 도망치기가 가능했다. 조모임에서 가상의 친할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관에 넣어 과제를 회피하는 일, 솔직히 해봤다. 그렇게 아프지 않지만 일하기 싫어서 아픈 척 회의를 빼먹은 적이 있다. 물론이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늘 나의 바쁨이나 아픔을 전시해서 일을 줄이는 방법은 양심을 찌른다. 일은 대개 소멸하지 않는 제로섬 게임, 내가 안 하면 누군가 해야 한다. 눈치를 보는 순간이 자릿하다. 누구는 안 바쁜가? 누구는 안 아파? 그러면서도 배운 인간이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동시에 생각하고 다시 마음이 안 좋다. 힘들다잖아, 아프다잖아,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으니까 내가 해야 하지 않을까.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다시 양심이 따끔거린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아는데, 내가 못 할 거라는 걸 아는데 덥석 하겠다고 해?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과 나만 챙기고 싶다는 마음이 충돌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같이 일을 하는 상대방의 등 뒤쪽을 본다. 등 바로 뒤에는 대개 피로가 붙어 있고, 아주 멀리 보면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산맥이 보인다. 일을 방해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등에 붙어있는 저 꼬리들이다. 멀리 보면 감정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일은 아무리 멀리 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자, 이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나만의 고민은 아닌 게, 지난 주에는 친구가 일하기 싫다고 울부짖었다. 나도 장난으로 으아 일하기 싫어! 일하기 싫다! 하면서 바닥을 굴렀고 친구는 한술 더 떠 장난감 코너 앞 다섯 살 아이처럼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흉내를 내다 그만 실제로 울어버렸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웃겨서 웃다가 같이 울었다. 그리고 일하기 싫다고 바닥을 구르며 울었다는 사실이 너무 웃겨서 다시 웃다 배가 아파서 눈물이 났다. 사람이 없는 곳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모두가 보는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이래서 글 쓰는 사람을 사귀면 안 되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일하기 싫은가. 배차 간격이 늘어난 지옥의 지하철 9호선 때문인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점점 나빠지는 건강 때문인가. 아니다, 이것은 모두 호르몬 탓이다. 우리는 교양 있는 30대 직장인다운 결론을 내리고 우아하게 커피를 마셨다.
밤은 깊어 가는데 기상시간은 정해져 있다
잠은 오질 않는데 기상시간은 정해져 있다
새벽이 밝아오는데 기상시간은 정해져 있다
- 「기상 시간은 정해져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
일-나-일-나 상태로 일이 나보다 먼저 오면 더욱 일하기 싫어진다. 울면서 따라잡아도 기껏해야 이인삼각으로 일과 내가 발을 맞춰 뛰어야 한다. 내 앞이 조금이라도 벌어지면 늘 일이 치고 들어온다. 지지난주에는 일이 나를 쫓는 기분이 너무 불쾌해서 마음을 다잡고 하룻밤을 지새워 일-나-일-나 순서를 나-일-나-일 순서로 바꾸고 뿌듯해했다. 그리고 '하루를 밤새면 이틀은 죽어 이틀을 밤새면 나는 반 죽어'(「Go Back」, 다이나믹 듀오)를 외치며 일주일을 컨디션 난조로 날렸다.
일하기 싫다는 건 일하기 위한 예열과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1일'을 위해서는 '10일싫'이 필요하달까. 하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대개 일은 실제로 된다. 못 하겠다고 하지 않고 하기 싫다고 말하는 건 언젠가는 하겠다는 의미다. 일하기 싫다고 읊조리는 건 결국 더 일하고 싶다는 말일 수도 있다.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서 요새는 일하기 싫을 자유가 얼마 없다. 일하기 싫다며 회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네잎클로버를 찾을 수도, 일주일 정도 잠수를 탈 수도 없다. 데굴데굴 방바닥을 구르며 우는 게 전부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울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신기하게도 울고 나면 일이 된다. 무엇보다 그 일은 사실 내가 만들었다. 원망할 일 없이 그냥 울면서 하면 된다. 울면서 하다 보면 끝나 있다.
마라톤 주자의 러너스 하이처럼, 워커스 하이(worker's high)도 분명 있다. 아침부터 기합을 팍 넣은 채로 있는 날이면 어떠한 추가 업무가 들어와도 나는 이미 일에 젖은 몸! 이라고 외치며 미루지 않고 불타오른다. 그때 나는 무적상태에 가까워서,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효율이 높아진다. 그런 날은 대개 걱정했던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다.
이제는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은 목록을 짜면서 꿈에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 이게 끝나면 다른 게 온다. 노는 건 열심히 짬을 내서 놀아야 한다. 누구도 나 대신 짬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자, 이제 울면서 일을 하자. 잠깐의 짬과 워커스 하이를 위해서.
아, 일하기 싫다.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