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나 콘세이요
* 폴란드 <가제타 비보르챠> 잡지 특별부록 ‘책’에 2017년 7월 21일자로 실린 인터뷰 전문.
(인터뷰어 : 미하우 노가시 | 인터뷰이 : 요안나 콘세이요, 올가 토카르축) 작품과 작업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브로츠와프에서의 10월 오후. 올가 토카르축과 포르맛 출판사에서 만났다. “난 『잃어버린 영혼』 을 굉장히 기다려 왔고, 감탄하고 있어요.” 올가 토카르축이 말했다. “우리의 협력 작업이 이렇게 아름다운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는 사실 상상도 못했어요.”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을 보며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콘세이요는 파리 근교의 자기 집에 있는 컴퓨터 화면 안에서 미소를 짓는다. 포르맛 출판사의 사장 도로타 하르트비흐와 토마슈 말레이키는 몇 년 전부터, 두 작가가 함께 책을 만드는 것을 염원해 왔다.
뭐가 먼저였나요? 텍스트와 일러스트레이션 중?
요안나 : 물론, 텍스트였죠.
올가: 이 이야기는 그냥 술술 써졌어요. 저는 어디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이 책의 첫 문장이 떠올랐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을 아주 많이, 빨리 하는 사람이었지요. 자기 영혼은 어딘가 멀리 두고 온 지 오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인 “시계에서는 종 모양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자라났습니다. 꽃은 모두 다른 색깔이었지요. 트렁크에서는 커다란 호박들이 열려, 몇 해 겨울을 조용히 지내기에 충분한 식량이 되었답니다.”를 쓰고는 원고를 옆으로 치우고, 좀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어요.
그러다 한 2년쯤 전, 예상치 못하게 포르맛 출판사의 도로타 하르트비흐 사장이 전화를 했어요. 그리고는 제게 동화나, 동화처럼 보이는 원고가 없냐고 물었죠. 그래서 저는 바로 이 ‘잃어버린 영혼’을 보냈고 그때 바로, 도로타와 제 머릿속에 이 작은 이야기의 그림을 요안나가 그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몇 년 전, 우연찮게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을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었어요, 저녁 내내 모니터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요안나의 작품을 구경했었죠. 이름이 스페인 사람이나 프랑스 사람 같아서, 당연히 외국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바로 그때부터, 이 작가가 창조한 비전 속에 들어가고 싶은 꿈이 생겼어요.
그 비전이 매우 우울해서였나요?
올가 : 꼭 우울하지만은 않았어요. 굉장히 무언가에 집중되어 있고, 회상을 불러일으키며 약간 초현실적이면서도, 빈티지한 느낌이 있었죠. 요즘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없어요. 요안나는 제가 기억하는 제 어린 시절의 분위기를 그림 속에서 불러내요. 그 당시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사람들은 지금보다 좀 더 정리가 되어 있었죠. 그것이 바로 이 책, ‘잃어버린 영혼’의 이야기예요. 인간의 속도로 천천히 흐르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 인간이 가지고 있던 자기 자리에 대한 그리움이죠.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둘의 세상이 만난 결과가 이렇게 감동적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어요.
두 분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요안나 : 2015년 3월 파리 도서전이었어요. 저는 제가 얼마나 올가 토카르축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말하려고 했는데, 올가가 먼저,
올가 : 요안나의 작품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말했죠.
그렇다면 이상적인 만남이었겠군요.
올가 : 하지만 저는 이 책이 두려웠어요. 왜냐하면 독자가 이 책의 글과 요안나의 그림을 보는 순간, 어린이를 위한 책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 테니까요. 이 책은 어른 속에 살고 있는 꿈꾸는 아이를 위한 책이에요. 이미 많은 것을 겪은 성숙한 사람, 스스로에게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사라지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어린 시절에 대한 깊은 노스탤지어에 빠지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위한 책이죠.
요안나 : 제 책 중 어린이를 위해서 만든 책은 없어요. 저는 어린이책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모르겠어요. ‘잃어버린 영혼’은 제 자신을 위해 그린 책이에요. 아주 이기적으로요. 제 모든 작품은, 어릴 때 제게 주어졌던 그림들에 대한 반발이에요. 그 그림들 속에서는 모두들 서로를 보고 웃고 있었어요. 예쁘고, 해는 빛나고 전체적으로 사실적이지 않았죠. 전 그런 그림들이 싫었어요.
하지만 당시 제가 살던 세계가 제게 가져다 준 것은 없었다 하더라도, 만약 흥미로운 일러스트레이션과 그것들의 영감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모든 것이 제가 살던 폴란드의 시골에서 왔다고 말하겠어요. 그것이 제 작품의 원천이에요.
올가 : 하지만 우리 책 속에 있는 요안나의 그림을 보면, 오래 전 모습을 토대로 하고 있어 딱 폴란드의 풍경 속에서 자라난 경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긴 힘들어요. 프랑스나 스페인의 시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니까요. 춤추는 사람들, 오래된 레스토랑, 공원, 식물이 가득한 방. 이 모든 것은 우리 문화권의 어린 시절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시간 속에서 나온 것들이죠.
요안나 : 저는 제 그림들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몇 년 동안이나, 제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줄 수 있는 한, 제가 스스로 그 빈자리를 메워 주는 거죠. 어릴 적에 제가 볼 수 있는 책은 정말 몇 권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제가 좋아하는 책들이 아니었어요. 도서관을 발견했을 때도,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책들은 제가 볼 수 없는 책들이었어요. 책장 가장 높은 곳에 놓여서 한 권이라도 잡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림 때문에 보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저에게는 무엇이 쓰여 있는지가 더 중요했어요. 빨리 글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었죠.
올가 : 하지만 샨체르(폴란드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Jan Marcin Szancer, 1902-1973)가 그린 어린이 동화책은 좋아했죠?
요안나 : 네. 하지만 그 책들은 제가 10-12살이 되어서야 겨우 알게 되었어요. 더 어릴 때 보고 싶었는데…….
선생님께 필요한 것을 주지 못했던 그 시골이…….
요안나 : 포모졔 지방의 프셰흘레보라는 곳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송폴노.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 댁이 있는 곳이죠. 츄우후프와 호이니체 근처에요.
올가 : 카슈비 지역이군요!
거기서 처음 그림을 그렸나요?
요안나 : 일러스트레이션을 진짜로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 되어서, 대학교에 다닐 때였어요. 그때 제가 글과 그림이라는 두 세계의 만남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감정과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그림을 통해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요. 중요한 발견이었어요.
올가 : 저는 책들 사이에서 컸어요. 어렸을 때는 그림이 있는 책들을 좋아했죠. 멋진 그림이 있던 쥘 베른의 두꺼운 동화책을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사실적이고 실제와 같은 그림들, 그 매력적인 이야기의 세상 속에 정말 들어가는 것처럼 느꼈죠.
‘죽은 이의 뼈에 쟁기질을 하라’라는 책을 썼을 때 저는 어른을 위한 책이 더 이상 일러스트레이션과 함께 나오지 않는다는 게 너무 이른 포기는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어요. 성인들 역시, 글에서 쉬고 그림을 볼 필요가 있어요. 잠시 멈추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내용과 맞는 그림이 꼭 책에 들어가길 원했어요. 오랫동안 찾다가 야로미르 슈베이딕의 판화들을 찾아냈죠. 결과물은 잘 나왔고, 그 후부터 제 책들에는 그림이 들어가기를 원했어요. 지금까지는 잘 되고 있어요. ‘방랑자들’과 ‘야고보서’에서 쓰인 그림은 이미 있던 작품을 활용한 것이에요. 하지만 ‘잃어버린 영혼’에서는 전혀 달랐죠. 요안나는 그저 글의 내용을 그린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그림을 통해 다시 한 것이니까요.
올가 토카르축
일러스트레이션은 책에 무엇을 주나요?
올가 : 이성이 쉴 수 있는 공간. 그러나 또 글에 새로운 콘텍스트를 제공하기도 해요. 그 덕분에 텍스트는 더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덜 진부하거나, 독자가 다른 연상 작용을 통해 그 내용을 채울 수도 있게 하죠. 텍스트가 훨씬 더 풍부해지는 거예요.
하지만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림을 통해 텍스트의 해석을 너무 좌우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올가 : 그 말은 정말 맞아요.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야 해요. 책을 읽을 때 독자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상과 일러스트레이터의 감성이 함께 어우러져야 하니까요. 하지만 요안나의 그림을 인터넷에서 처음 보았을 때 저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저런 그림을 그릴 거야, 라고 생각했어요.
요안나 : 하지만 제가 읽는 모든 텍스트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일러스트레이션을 하고 싶은 책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아요.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말이 적절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텍스트의 동반자로서의 그림에 대해 말하고 싶지, 텍스트에 봉사하는 그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읽은 무엇인가를 종이 위에 그대로 옮기는 것도 아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을 읽을 때마다 되살아나는 감정과 기억들이에요. 올가의 글을 읽었을 때 바로 그랬죠.
‘잃어버린 영혼’을 읽을 때요?
올가 : 사실 여러 버전을 읽은 거죠. 왜냐하면 저는 이 책의 결말을 바꾸었거든요.
요안나 : 저는 몇 번이나 읽고 내려놓곤 했어요. 제 머리에 바로 떠오른 생각을 그리지는 않았죠.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거든요. 어떤 상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어요.
언제나 그래요.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으면, 머릿속에 떠올라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제가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갑자기 떠오르는 거예요. 저는 그걸 끈의 끝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그 끝을 천천히 잡아당겨 심연으로부터 이야기 전체를 끌어내는 것이죠. 그 끈의 끝을 보면 저는, ‘아, 책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요. 어떤 책이 될지는 모르지만요. 이 작업은 마치 퍼즐과 같아요. 부분들을 천천히 발견해 나가고 자기 안에서부터, 운명으로부터, 삶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죠. 모든 것이 전체를 이룰 때까지, 힘든 질서를 이루어 낼 때까지. 텍스트는 그 모든 것을 붙이는 풀과 같아요.
그렇다면 ‘잃어버린 영혼’의 끈의 끝은 어땠나요?
요안나 :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약간 제 작업 이야기를 더 해야겠군요.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셨으니……. 그날, 저는 전혀 다른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아주 열심히. 그러다 갑자기 올가가 창조한 주인공들에 대해 공통점이 생각난 거예요! 우리가 어릴 때 두 짝이 엮인 장갑을 끼잖아요. 그런데 얀과 얀의 영혼이 어느 날 그 장갑을 나눠끼게 된 거예요. 한 짝씩만…….
요즘 그런 장갑이 또 유행인데요.
올가 : 사실 ‘잃어버린 영혼’은 무엇보다 요안나 콘세이요의 책이라고 생각해요. 요안나의 풀에 대한 비유, 제 텍스트가 풀이 되어 모든 것을 붙인다는 비유가 마음에 들어요. 요안나의 그림들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이 텍스트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꺼낼 수 있는지, 그리고 요안나가 제 어린 시절과 가족사진들, 그리고 느린 만남들을 어떻게 재현해 낼 수 있었는지, 너무나 놀라고 말았어요.
요안나 : 저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올가가 제 작업에 참견하지 않은 거예요. 모든 작가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죠. 하지만 보통 글 작가들은 일러스트레이션의 마지막 모습을 결정하고 싶어 해요. 그러나 사실 ‘잃어버린 영혼’과 같은 책에서는 글 작가가 언제나 맨 앞에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작품 역시 그림과 맞닿았을 때 비중이 줄어들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글 작가는 많지 않아요.
올가 :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제가 모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보통은 겉표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전부 작가 책임이잖아요. 그래서 가끔은 마치 다 튀겨지지 않은 커틀릿처럼 넘기게 되죠. 그런데 마침내 진짜 요리의 제왕이 나타나 제 글로부터, 저로선 꿈도 꾸지 못할 멋지고 어려운 요리를 해 놓은 거예요. 저는 이 책에서의 제 자리를 알아요.
아, 그리고 저는 이 책을 부모님이 어떻게 볼지, 어린이들이 어떻게 볼지도 궁금해요. 그 시선은 서로 아주 다를까요? 이 책 안에서 저처럼 모두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을까요? 과연 10살짜리는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요?
아무래도 이 책은 성인에 대한, 오늘날의 부모님들에 대한 책이 아닐까요. 우리들에 대한 책이요. 언제나 달리고 있고, 여행 중이고, 장소 이동 중이고, 어쩔 땐 하루에 세 도시, 아니면 한 나라를 지나는 우리 말이죠. 급하게, 호텔에서 호텔로, 아침도 먹지 않고. 전 그래도 아직 이 책의 주인공 얀이 겪은 것 같은 영혼을 잃는 경험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올가 : 그럼, 인터뷰어님은 아침에 일어나서, 여기가 어디지, 할 때가 없으신가요?
그런 적은 있죠. 하지만 제 이름이 뭔지는 안다고요.
올가 / 요안나 (동시에): 우와. 저에게 ‘잃어버린 영혼’은 무엇보다 이 세상이 너무 과장되게 빨라졌다는 걸 말하는 책이었어요. 하루하루를 살며,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래서 그 어떤 경험도 깊지 못한…….
올가 : 우리 할머니들과는 전혀 다르게요. 옛날에는 당시 비과학적이었던 정신병리학에서 정신이 혼란하고 정체성이 혼동되는 상태를 ‘영혼의 상실’이라고 불렀어요. 융 역시 그런 연구를 조금 했지요.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 이야기는 여러 문화권과 동화에서 다양하게 등장해요. 좀비가 나오는 호러 버전도 있고요. 그러나 제 이야기는 현대에 일어나는 일이고, 무섭다기보다는 시적인 상황이지요. 텍스트는 동화처럼 아주 간단해요. 저는 은유를 통해 길을 잃거나 미화하지 않고, 작품의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었으면 했어요. 어쩌면 거기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텍스트에 결핍된 어떤 것을 요안나가 뛰어난 감수성으로 알아채고 채워 넣어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우리의 책은 호박처럼 커다랗게 자라나며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을 수 있었죠.
선생님도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셨나요?
올가 : 아이쿠, 아마 몇 번이나 그랬을 거예요. 영혼을 가장 자주 잃어버리는 장소는 공항이죠. 이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에요. 앉아서 기다려야 하죠.
시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만 같아요. 나이 오십이 넘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 앞에 있는 것을 깊게 느낄 시간이 부족해지고, 그러면서도 경험은 더 많이 쌓이게 되죠. 과거의 자극에 대한 이런 상태가 앞으로 받게 될 미래의 자극과 불균형한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사람은 주관적으로 시간이 더 빨리 흐른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인터넷의 등장으로 자극이 과하게 더해졌지요. 우리의 신경을 폭격하는 수많은 정보들은 우리가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데,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원인과 결과 사이의 거리로 측정하거든요. 만약 원인과 결과가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시간은 줄어들고 우리는 사건을 혼돈 속에서 인식하게 되는 거죠. 저는 개인이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 신경이 곤두서거나 너무 많은 자극에 피로한 느낌은 이런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주 특이한 물리학자의 이론을 만난 적도 있는데, 그 학자에 따르면 우주는 첫 번째 대폭발의 에너지로 움직이는데 그게 점점 빨라져서 객관적으로 현재의 물리적인 시간은 200년 전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거예요. 지금의 한 시간은 우리 조상들의 한 시간보다 더 빠르다는 거죠. 이랬건 저랬건, 분명 우리의 시간에는 문제가 있어요. 아마 그래서 옛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생겨나는 걸 거예요. 시간이 더 천천히 흐르고 단순했던, 우리가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었던 때에 대한 그리움. 그런 그리움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을 불러일으켜요.
영혼이 스스로에게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까요?
올가 : 그냥 기다려야만 해요. 이 책은 바로 그것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안에 아직도 지켜야 할 어떤 빈 공간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 문제죠. 어쩌면 이미 모든 곳이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는 정보로 채워지고 더럽혀진 것은 아닐지.
‘잃어버린 영혼’의 얀은 선생님 소설인 ‘방랑자들’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많은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올가 : 네, 그래요. 사실 이 책은 ‘방랑자들’의 농담 섞인 개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얀은 제가 그 책에 쓴 모든 일을 겪고, 여행의 불안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거죠.
‘잃어버린 영혼’에는 두 사람이 나와요. 마음이 불안한 남자 얀, 그리고 심리학자이자 의사이고 얀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현명한 여의사. 의사는 얀이 자기 인생과 이 끝없이 빨라지는 속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등을 돌리라고 해요. 일하고, 집과 아이들을 돌보고, 자기 투자를 하고, 남들에게 투자를 하고, 모든 장소에 있어야만 하는 세상이죠. 제 주인공인 얀은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할 정도로 성숙해요. 그만. 나는 여기서 물러난다. 난 빈티지한 인간이 될 거야!
트렁크를 묻어버리는 거죠.
올가 : 요안나는 정말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 장면을 표현했어요. 얀은 자리에 앉아 꽃들이 자라는 모습과 장소가 변하는 모습을, 바깥세상이 자유롭게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아요. 서두를 필요도 없고, 멈출 필요도 없죠. 아까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도 없고요.
요안나의 그림에서 저를 매혹시키고 놀라게 한 것은 요안나가 그 평화로움을, 우리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마치 우리 할머니들의 집과 같은 세상의 질서를 그림으로 보여줄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그때는 신발을 세 켤레씩 가지고 있었죠, 지금처럼 오십 켤레가 아니고요. 양말은 기워서 신었고, 코트는 수선하며, 냅킨에는 수를 놓았어요. 며칠 동안 다른 집을 방문하기도 했고, 미리 말도 없이 가기도 했어요. 지루해할 줄 알았고, 그 지루함 속에서 멋진 것들이 탄생하곤 했죠.
요안나 : 올가가 말하는 것들이 제 생각과도 매우 가까워요. ‘잃어버린 영혼’의 그림을 그리면서 저는 바로 그런 생각들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 모든 기억들과 함께, 제 안에서는 공포와 두려움도 함께 떠올랐어요.
저는 제 자신을 그림 속에 담는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 그림들은 마치 그릴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죠. 그림을 그릴 때, 저는 힘들어요. 하루가 아니라 3일에서 5일씩 걸려요. 모든 것이 천천히, 안개 뒤편에서 나오는 것처럼 나타나요. 지금 그리는 한 장 말고 더 이상의 그림을 보지 못하고요.
올가 : 요안나도 영혼을 잃어버린 적이 있나요?
요안나 : 당연하죠. 이 책을 그릴 때, 저는 이 책이 제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 역시 앉아서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생각이 제 안에 없었더라면, 이 텍스트에 이렇게 반응할 수 없었을 거예요. 저는 저를 완전히 움직이는 책들만 그려요. 별 필요 없는 작업을 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요. 전 이곳에 단 한 순간만 있는 거고, 제 자신을 움직이는 것들을 위해 사는 것이니까요.
선생님의 그림을 보면, ‘잃어버린 영혼’의 몇몇 장면은 모눈종이에 그려진 것처럼 보입니다. 또 한 번, 올가 선생님이 말씀하신 ‘빈티지’라는 말을 해야겠네요.
요안나 : 왜냐하면 정말 이 책은 커다란 회계장부의 페이지에 그린 거니까요. 제 딸이 벼룩시장에서 사왔어요. 저는 회계는 질색이지만, 그 공책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옛날 회계장부라 페이지를 중간에 뜯지 못하도록 모든 페이지에 번호가 도장으로 찍혀 있었죠.
올가 : 그럼 그 공책을 받아 들고, 바로 책상에 앉아 연필을 깎은 건가요?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을 했나요? 아니면 조용하게 했나요? 요안나가 그림을 그릴 땐, 마치 명상을 하는 것 같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요안나 : 그림은 무엇보다 투쟁의 과정이에요.
무엇과요?
요안나 : 표면과 재료와의 싸움이죠.
종이는 언제나 달라요. 연필이나 다른 것들로 만져보기 전까지는 어떤 자국이 남게 될지 알 수가 없어요.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이 회계장부의 모눈종이는 아주 까다로웠어요. 하지만 저는 꼭 여기에 그리겠다고 결심했지요. ‘잃어버린 영혼’을 그리기 위해 저는 오랫동안 연필을 찾았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찾은 건 10mm 심을 두 개 넣은 샤프였어요. 보통의 재료지만, 제가 맞춰줘야만 하는 성깔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는 앉아서, 모든 것들이 그려질 때까지의 투쟁이에요. 저는 가끔은 작업이 밭을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일하는 곳의 라디오가 고장 나서, 음악은 안 들어요.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림 그리는 것이 더 잘 돼요. 침묵을 듣고, 아파트의 계단에서 나는 소리나 바깥의 소리를 듣죠. 작업실은 없지만, 저는 제가 회사에 출근하는 것 같아요. 친구가 자신이 출근한 동안 자기 집을 쓰게 해줬거든요. 거기에는 제 물건을 모두 놔두는 가구도 있어요. 펼치는 책상이랑 다른 물품들도요. 그림을 그리다 작업을 끝내면 모든 것을 다시 접어놓아요. 매일매일요. 하지만 그곳은 평온해요. 왜냐하면 저희 집에서는 남편이 엄청 떠들고, 저는 그 옆에서 일을 할 수가 없거든요. 저희 남편은 모든 것이 엄청 중요해서 바로 옆 사람과 소통을 해야만 해요, 축구 경기의 결과까지 말이죠!
선생님들이 함께한 작업 얘기를 들으니, 그 작업은 이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안나 : 모든 협력 작업이 이상적이지는 않아요. 접근 방식과 작가들에 의해 굉장히 달라지죠. 저를 믿어주고 글과 그림의 협력 작업이 평행선을 따라 가야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어요. 저는 제 작업에 대해 지적이나 힌트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냥 완벽한 평화, 누군가 나를 믿는다는 느낌과 제가 그림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과 안정이 필요하죠. 글 작가는 이미 자기 할 말을 글에서 다 한 거예요. 올가는 그 사실을 정말로 잘 이해해 줬어요.
올가 : 누구도 서로 종속되지 않는, 파트너의 관계죠. 아마 결혼 관계도 그런 거겠죠?
요안나 : 최소한 우정은 그렇죠. 우리는 서로 아름답게, 다르게 존재하면서 함께 할 수 있어요. 그런 종류의 협력 작업만이 의미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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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영혼올가 토카르축 글/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 사계절
영혼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의 비정상적인 속도와 자극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요안나 콘세이요는 특유의 감수성으로 낡은 것들이 전하는 아늑한 위안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