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쓰기로 했다
쓰레기 같은 글을 써낸들 누가 어쩌겠어? 하는 뻔뻔함으로 밀고 나가면 이상하게도 뭔가 써지기 시작한다.
글ㆍ사진 최지혜
201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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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일한 지난 10년 동안 적지 않은 글을 써왔다. 쓰고 싶은 글이든 쓰고 싶지 않은 글이든, 어떤 글도 쉽게 써본 적은 없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단어 하나 하나에 공을 들여도, 마감이 없으면 글은 완성되지 않는다. 닥치면 글은 어떻게든 써진다는 게 모두가 아는 글쓰기 비법이라면 비법일 텐데, 마감이 코앞인데도 영 진도가 안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정말 ‘똥줄’이 타는데, 그럴 때일수록 마감이지만 마감을 생각하지 않고(과연 그게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쓰레기 같은 글을 써낸들 누가 어쩌겠어? 하는 뻔뻔함으로 밀고 나가면 이상하게도 뭔가 써지기 시작한다.

 

쓰레기를 쓰겠어!
라고 결심하니 써지긴 써진다.
매일 다짐해야겠다.
쓰레기를 쓰겠어!
- 이경미,  『잘돼가? 무엇이든』  141쪽

 

영화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 의 사이 사이에는 그녀의 일기가 발췌되어 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때의 일기에는, 써지지 않을 때의 고충이 절실하게 묻어난다. 매일 쓰레기를 쓰겠다고 다짐하고 뭐라도 쓰는 그녀처럼, 나도 쓰레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여기에서의 포인트는 매일 결심하는 데 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쓸만한 문장을 골라내 어떻게든 글 하나를 완성했던 경험이 쌓여 있음에도, 매일 쓰레기를 쓰고 또 써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허락하는 일은 자꾸 잊어버린다. 지난 번엔 어쩔 수 없이 쓰레기를 썼지만, 이번엔 세기의 명작을 써내야 하는 게 아닐까? 언제까지 쓰레기만 쓰고 있을 거지? 매일 쓰레기만 써대는 데 글을 쓸 자격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자자, 워워~ 목표는 매일 쓰레기를 쓰는 거라고~ 쓰레기를 쓰면 되는데 뭘 망설이는 거지?’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진 두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고, 쓰레기를 쓰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면, 곧 마주할 비난과 칭찬에서 미리 자유로울 수 있다. 비난은 이미 각오했던 것이니 그리 마음이 쓰리지는 않을 거고, 뜻밖의 칭찬을 듣는다면 그야말로 땡큐인 상황이니 잃을 게 없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쓰레기 같은 글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21쪽

 

잘 쓰고 싶은 마음만큼 글이 나오지 않아 답답할 때마다 글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허겁지겁 찾아 읽었다. 나에게 통하는 기똥찬 비법을 발견하기 위해 저자들이 말하는 저마다의 방법을 성실히 따라 했지만, 결국 남은 건 이 한 문장이었다. 위대한 작품을 쓰리라 기대하기보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졸작을 쓰느니 아무 것도 안 쓰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온 완벽주의자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인 문장은 없었다.

 

두 달 전에 꽤 괜찮은 글을 썼다고 해서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쓴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솔직히 나는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전에 어떻게 글을 완성했었는지 의아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글쓰기는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다.
-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19쪽

 

지금까지 어떻게든 글을 써왔고, 지난 번엔 꽤 마음에 드는 글도 썼지만, 왠지 이번에는 안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어르고 달래 잘 쓰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고 나서야 뭔가가 써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볼품없던 문장도 요렇게 조렇게 자르고, 지지고 볶고, 마지막으로 MSG까지 뿌리면, 나름 쓸만한 문장이 된다. 그런 문장들을 그러모으면 한 편의 글이 완성되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어머나 세상에, 결국 다 썼다!


글의 마지막에 접어 들었으니 이제 와 밝히자면, 지금 이 글이 바로 그렇게 써내려 간 글이다. 쓰레기를 쓰기로 하고 썼다니 정말 쓰레기인걸? 생각하는 독자도 물론 있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내 글을 읽고 읽으며 또 읽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글을 마무리 하는 지금도 여전히 글쓰기는 두렵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앞으로도 평생 영원히 그럴 것임을 알기 때문에, 차라리 처음부터 인정하고 가는 거다.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쓰레기 같은 글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글을 매일 매일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설사 매일 그렇게 쓴다고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허락하는 것. 그러니까, 오늘도 부지런히 쓰레기를 써보자.

 

남한테 칭찬을 받으려는 생각 속에는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혼자 의연히 선 사람은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남의 비난에도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다.
- 이경미, 『잘돼가? 무엇이든』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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