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남을 가르치는 행위에 항상 경외감을 느낀다. 가르침은 타인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교육으로 인간이 크게 달라지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이상을 품고 기꺼이 가르치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각종 가르치는 일을 20년 넘게 해왔고, 수없이 좌절했다. 타인과 나 자신에 대해서. 아마 나를 가르쳤던 운전 강사도 그런 좌절을 겪었으리라.
차를 구입하고도 운전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운전 연수를 20시간 신청했다. 원래 1회분은 10시간인데, 10시간 가지고는 잘 해낼 수 없다는 생각에 10시간을 늘리기로 했다. 나의 운전 선생님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사이의 무던해 보이는 인상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람 좋고 덤덤한 태도는 연수생의 실력에 큰 기대가 없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짜증을 자제하고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가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 그리고 두 시간짜리 연수를 1시간 45분에 끝내버리는 ‘융통성’ 있는 직업인이 짓는 표정이었다.
자기 차를 가지고 하는 연수였으므로, 선생님은 조수석에서 브레이크를 제어할 수 있는 기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왔다. 그 막대는 그저 선생님처럼 보이게 하는 소도구일 뿐임은 금방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수업 전날 “내일 6시에 만나요”, “내일 8시” 정도의 짧은 문자를 보내고, 약속 장소에 나가면 올라타서 별말 없이 서울의 강북을 달리는 것이 운전 연수의 전부였다. 강사마다 각자 담당하는 일종의 구역이 있기에 선생님은 특별한 경우(“오늘은 강남 연수를 해보겠어요”)를 제외하고는 그 영역 안에서만 차를 운전하게 했다. 단 한 번 내가 차를 돌릴 수 없어서 경기도까지 간 적은 있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실천할 수 없지만 배우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교수법의 기술들이 있다. 먼저, 교사는 실행할 수 있는 지시를 가급적 직접적 묘사로 전달해야 한다. 한때 유행했던 농구 코치 식 농담이 있다. “우리가 잘해야 하는 게 두 가지 있어. 하나는 디펜스고, 하나는 오펜스야”처럼. 하지만 이렇게 구체성이 없는 지시를 주어봤자 아무런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운전도 이와 마찬가지다. 운전에서 선생님이 “흔들리지 말고 똑바로 가라”라고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가기 위해선 어떻게 동작해야 하는지 말해주어야 한다. 두 번째는 교사는 부정형의 지시를 하더라도 결국에는 목표를 긍정적 지시문의 형태로 전달해야 한다. 나의 운전 선생님은 내게 “핸들을 돌리며 손목을 같이 꺾지 마라”와 같은 말을 여러 번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기 전까지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 이 말은 핸들을 붙잡은 채로 손목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손은 고정한 채로 손바닥 안에서 핸들만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교사의 수칙 세 번째는 이중구속 지시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중구속이란 20세기의 영국 인류학자였던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1980)이 제창한 개념인데, 부모가 서로 상반된 지시를 한꺼번에 줄 경우 아동은 정신적 혼란을 느끼고,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가령, “편하게 자기 뜻대로 해 봐”와 “맘대로 하면 어떡해” 같은 모순된 메시지를 주면, 아이는 아무 데로도 갈 수 없다. 내 선생님의 언어는 세 가지 기술을 모두 다 구사하지 못했지만, 나는 특히 이 세 번째에서 혼란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코너링이었다. 심지어 나는 실기 시험을 볼 때도 코너링을 제대로 못해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코너링은 그만큼 원래부터 자신이 없는 기술이었다. 나중에 익숙해지면 코너링이 어렵다는 사실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되지만, 그때의 내게는 감을 익히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선생님은 매번 코너를 돌 때마다, 유턴을 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천천히 가면서 빨리 돌아요.”
뭐라고? ‘천천히’와 ‘빨리’는 우리가 가장 먼저 배우는 반의어가 아니었나? 천천히 빨리 돌라는 것이 무슨 말이야? 이런 이중구속적인 지시를 길에서 보는 수많은 운전자들이 매일 실행하고 있었나? 그들은 어떻게 의연하게 이를 수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모순이 저절로 풀리는 지점이 있단 말인가?
콜럼 토빈의 『브루클린』 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온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이라는 새로운 기회의 땅에서 삶을 시작한 사람, 그러나 영혼은 여전히 고향 아일랜드에 붙들려 있었던 여자.
아일랜드의 지방 에니스코시에 사는 아일리시는 미스 켈리의 식료품점에서 일하며, 부기(簿記)와 회계를 배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언니 로즈는 아일리시가 이곳에서 삶을 마치기 않고, 다른 곳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하길 바란다. 아일리시의 오빠들은 일자리를 구해 영국에 있었지만, 로즈가 아일리시를 보낸 곳은 미국이었다. 로즈는 골프 클럽에서 만난 플러드 사제에게 부탁하여, 아일리시의 뉴욕 거처와 직장을 구해준다.
이어지는 2부, 3부는 아일리시가 브루클린에서 적응하며 겪는 일들과 향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키호 부인의 하숙집에서 살게 된 아일리시는 바르토스 상점에 판매원으로 취직한다. 얼마 안 되는 봉급으로 생활하며 회계와 부기 공부를 하는 아일리시는 이민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된다. 모든 것이 낯설고 적대적이지만, 그러기에 희망이 있는 곳 브루클린. 거기서 아일리시는 상냥한 이탈리아 청년 토니를 만나고, 이제 미국이 고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인생의 길에는 언제나 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법. 아일리시를 미국으로 보낸 로즈는 그녀가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제공한다.
『브루클린』 을 읽으며 나는 어떤 감정적 이중구속을 느꼈던 것 같다. 편안하고 익숙한 아일랜드, 새롭고 알 수 없는 브루클린. 양쪽에 동시에 매인 아일리시처럼 나의 몸과 마음도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구속 속에 갇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나의 앞길을 무척 걱정해주고, 그래서 먼 길로 떠나보낸다는 것. 하지만 그러하기에 나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붙들려 있다. 그 자체만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아일리시가 아일랜드에 느낀 감정이 그런 역설이 아닐는지. 아일랜드는 친숙한 땅, 어떤 새로운 것도 약속하지 않기에 떠나야 하는 곳이지만, 그저 머문다면 안온할 것이기에 쉽게 떠날 수가 없다.
삶에는 이런 이중구속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남에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남의 충고를 따라서 개척해볼까 하는 순간 ‘스스로’는 없어진다. 앞으로 할 일은 신중히 해야 하지만, 과감하게 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지만, 노동은 본질적으로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떠나보내는 사랑이 소중하지만, 그러기에 그 사랑을 버리지 못한다. 인간의 삶에 있는 이중구속, 특히 여자들은 이런 이중구속의 지배를 쉽게 받는다. 사회생활에서 성취를 거두라고 어릴 적부터 배웠지만, 여자의 행복은 가정에 있다고들 말한다. 여자들도 야심을 가질 수 있다고 하지만 야심을 드러내면 사회에서 배척을 당한다고 한다. 거기서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고 제자리에서 갈팡질팡한다.
그런데 감정적 이중구속으로 보이는 모순들이 서로 양립하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다. 살아가다 보면, 모순들이 저절로 해결되거나 아니면 해결되지 않은 채로 같이 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 소위 말하는 ‘삶의 기술’이 아닐까. 삶의 양극단으로 끌어당기는 모순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다면, 어떻게든 삶은 이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아예 구속을 끊고 한쪽으로 달려가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일랜드에 남을 것인지, 브루클린으로 돌아갈 것인지, 한쪽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리면 좀 더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우리 삶의 문제는 이중구속을 양립하거나 끊어낼 방법이 존재할 가능성을 알지만, 그 내용 자체는 모른다는 것이다. 『브루클린』 에서처럼 이중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는 열쇠는 어떤 심술궂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계기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부딪쳐서 그 열쇠를 찾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양쪽에 매인 삶은 오로지 자신의 시도와 착오, 결심으로만 끝낼 수 있다.
운전이 익숙해진 후에 알았다. 천천히 빨리 돌라는 말에 숨겨진 동작 순서도를. 그 말은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이되, 핸들을 빨리 돌려 다른 차에게 방해를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이중구속의 지시에도 해결법은 있다. 하지만 초보의 나는 그것을 몰랐으므로, 인내심 강한 학생의 면모를 버리고 큰소리로 물어버렸다. “도대체 천천히 빨리 돌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말로 설명을 해주세요.”
가끔 삶에게 이렇게 큰소리로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도대체 이처럼 양쪽에서 끌어당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 상황은 어떻게 된 거죠?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 설명을 해주세요.
하지만 삶에는 해설자가 없고, 있다고 쳐도 그가 주는 계시는 나의 운전 연수 선생님의 언어보다도 더 모호하다. 삶에서 천천히 빨리 도는 법은 스스로 익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중구속을 넘어선 부드러운 코너링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몇 번이고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그 모순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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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콜럼 토빈 저 / 오숙은 역 | 열린책들
아일리시가 뉴욕 브루클린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어머니 품속의 딸로서만 존재하던 아일리시가 독립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는다.
박현주(번역가)
소설을 번역하고 에세이와 로맨스 추리 소설을 쓴다. 그리고 드라마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