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들의 세상
사람들은 노들에 밝고 희망적인 것을 기대하지만 나는 노들의 어둡고 절망적인 얼굴을 더 많이 알고 있다.
글ㆍ사진 장일호(시사IN 기자)
2018.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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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한 번씩 떠올리는 얼굴이 있다. 승욱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 우리는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집 방향이 비슷해 종종 하교를 도와주곤 했다. 딱히 도울 것도 없었다. 그저 그 애의 속도에 맞춰 발을 늦추는 일이 전부였다. 어느 하굣길, 계단을 내려가던 중 승욱의 머리 위로 왁스대걸레가 떨어졌다. 3층 난간에서 2층 계단으로 내려온, 대걸레 자루를 붙잡고 있던 남자애는 서너 명. 어찌할 바를 모르는 승욱 대신 내가 노려봤다. “지금 뭐하는 거야?” 눈을 마주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던 한 녀석이 이죽거렸다. “야, 너 승욱이랑 사귀냐?”
 
그 말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 나는 그날 이후 승욱의 하교를 돕지 않았다. 핑계는 많았다. 어떤 이유를 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승욱의 어머니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걸어서 10분이면 갈 길을 부러 돌아서 집에 가곤 했다. 괜히 학교에 오래 남아 있을 핑계를 만들던 날도 있었다. 승욱의 어머니는 이해한 것 같았다. 아마도 체념이었을 테다. 어머니의 지치고 피곤한 얼굴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를 때면 지금도 한 번씩 잠을 설친다. 승욱의 어머니는 승욱에게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승욱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신길역에서 시청역까지는 여섯 정거장, 15분이면 닿는 거리다. 지난 6월 14일 오전 10시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 20명이 휠체어를 탄 채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평소 40여 초면 충분했던 승하차 시간이 10분 이상 걸렸다. 이들은 대방역, 노량진역, 용산역, 남영역, 서울역, 시청역까지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열차를 지연시켰다. 이날 신길역에서 시청역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40분. 뒤이은 전철 역시 연쇄적으로 연착됐다. 분통을 터뜨리는 시민들에게 휠체어 위 ‘시민’들은 이렇게 호소했다. “장애인들 시위 때문에 불편하다고 해도 좋으니 시청에 연락 좀 해주세요.”
 
지난해 10월 20일 사고가 발생했다. 고 한경덕 씨는 신길역 내 휠체어 리프트 호출 버튼을 누르려던 중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98일간 사경을 헤매다 결국 사망했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의 지하철 시위는 그 사건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지하철 리프트 추락사가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이유가 있다. 지하철 리프트는 1988년 장애인 올림픽을 위해 ‘급조’됐다. 외국에서 온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여주기가 목적이었던 만큼 안전 관리 규정 역시 부실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1년 휠체어 리프트가 ‘정당한 편의’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엘리베이터 설치를 권고했다. 물론 권고는 언제나 권고 ‘따위’가 되곤 한다. 지하철 역사 내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은 아직까지도 27곳이 넘는다.
 
사무실 책상 위 눈에 잘 띄는 곳에 늘 꽂아두는 책이 몇 권 있다. 주로 당사자 목소리가 녹아 있는 책들이다. 이 뉴스를 접한 날, 나는 노들장애인야학 20주년사를 정리한 『노란들판의 꿈』  을 다시 펼쳤다. 2001년 2월6일 서울역 이동권 투쟁 장면을 다시 읽고 싶어서였다.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은 시위 끝에 연행되면서 이렇게 외친다.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86쪽)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을 비롯해 장애인 30여 명이 선로 위에 드러누웠던 이날 시위는 장애인 이동권 역사의 결정적 장면이 된다. 2003년 국어사전에는 ‘이동권이라는 낱말이 올랐고, 2005년에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는 단지 지하철을 타기 위해 목숨을 건다. 한경덕 씨처럼.
 
노들야학 교사이자 저자인 홍은전 씨는 비장애인이다. 그는 자신을 ‘9’라고 칭한다. “10명 중에 1명은 장애인이다. (중략) 1들이 말하는 세상은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온 세상은 한 번도 1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의 가혹한 세상살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내가 1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그 차이가 있는 한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안전한 9였다.”(232쪽)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다시 승욱을 떠올린다. 자신을 ‘9’라고 고백한 저자의 마음에 나를 겹쳐본다. 기자가 직업인 내게 장애인 관련 기사는 아이템 잡기가 어렵다. 장애인 관련 분야는 ‘더는 새로운 기사가 나올 게 없는’ 레드오션이다. 아무리 장애를 ‘체험’하고 또 해도 결국 9의 자리에서 9의 시선으로 쓰게 될. 연민이나 동정에 호소하거나 애써 희망적인 이야기를 찾아 그나마 ‘팔리는(읽히는)’ 기사를 쓰면 다행이다. 쉬운 길이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검증된 그 길을 가거나, 그냥 대충 잊고 지낸다. 세상에는 정말 너무 많은 문제가 있고, 1의 세상은 어차피 잘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9’의 눈으로 ‘1’의 세상을 쓴 노란들판의 꿈』  은 에둘러 가지 않는다. 노들야학 소식지 99권과 교사 회의록 40권, 수천 장의 회의록과 20년간의 일지들을 수북이 쌓아 놓고, 그 위에 새 길을 낸다. 20주년사를 정리하는 만큼 그 지난하고도 아름다웠던 세월을 포장하고 싶은 마음, 짐작컨대 왜 없었을까. 나라면 우리 대견하다고, 이만하면 잘 살아냈다고 쓰고 싶었을 것 같다. 대신 저자는 이렇게 쓴다. “사람들은 노들에 밝고 희망적인 것을 기대하지만 나는 노들의 어둡고 절망적인 얼굴을 더 많이 알고 있다.”(13쪽) 
 
정직한 기록만이 역사가 될 자격이 있다. 그들이 비틀거리며 20년 간 걸어온 길이 다름 아닌 한국 장애인 운동사다. 홍은전은 담담히 장애인 운동의 실패를 시인한다. 다만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다시 초등학교 6학년 교실로 돌아가도 나는 승욱을 외면할지 모른다. 나는 그때 내가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 몰라서 연대에 ‘실패’했다. 솔직히 말하자. 어쩌면 알면서도 실패할 것이다. ‘당당한 병신’ 곁에 수많은 ‘9’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 여전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때마다 『노란들판의 꿈』 을 펼쳐 들고 박경석 교장의 외침을 읽을 것이다. 누군가 목숨 걸고 투쟁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전해야 한다. 이 '당연한' 문장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이 죽어, 몸으로 쌓아 올린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한경덕 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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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호(시사IN 기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주 ‘이상한 수치심’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