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강타할 B급 코미디 좀비 호러 뮤지컬 <이블데드> 가 돌아왔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여행을 떠난 애쉬와 그의 친구들이 숲 속 오두막에서 좀비와 맞닥뜨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요. 좀비로 변신한 배우들의 이른바 ‘병맛 코미디’와 그들이 객석을 향해 뿌려대는 피를 ‘막기’ 또는 ‘맞기’ 위해 우비를 입고 앉아 있는 관객들의 모습이 더 큰 재미를 주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괴짜 좀비군단 가운데 무척 의외라고 생각되는 배우가 있어 캐스팅이 발표되자마자 바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바로 <팬레터>의 히카루, <찌질의 역사>의 설하로 개성 강한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김히어라 씨인데요. 공연이 끝난 뒤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김히어라 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아직은 적응 중이에요. 웃긴 걸 좋아하고 농담도 좋아하지만, 에너지 넘치게 나서는 편은 아니라서 <이블데드>를 통해 힐링하고 있고, 몰랐던 저의 모습도 새로 발견하고 있어요(웃음).”
‘좀비숙성기간’이라는 프리뷰 기간 린다로 무대에 서 있는 김히어라 씨의 모습을 유심히 봤다면 ‘아직은 적응 중’이라는 말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이블데드> 에 참여하기까지 살짝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지금까지 참여했던 작품과는 결이 많이 다르니까요.
“배우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라서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내가 잘 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린다는 여성미 넘치는 역할이라 제 기존 이미지와도 많이 다르고요. 그런데 캐스팅 전화가 올 때 지난해 <이블데드> 에서 린다를 맡은 정가희 언니와 함께 있었거든요. 언니가 배우는 새로운 인물에 도전할 때 힘이 되고 좋다며 꼭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작년에 <찌질의 역사>와 <이블데드>가 같은 기간 공연돼서 배우들끼리 자주 왕래하며 얘기도 했던 터라 용기를 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 <이블데드>에 참여한 걸 후회한 적이 있다는 얘기인데요.
무슨 사연인지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이블데드> 의 가장 큰 매력 가운데 하나는 ‘스플레터석’이잖아요. 관객들에게 친히 피를 뿌리기 위해 객석으로 내려오는데, 김히어라 씨는 좀 얌전하게 뿌리던데요(웃음)?
“역시 아직 적응 중인 것 같아요(웃음). 지난해에도 참여했던 배우들은 우비를 벗겨가면서 뿌리던데 저는 아직 조심스러운 거예요. 피를 안 맞으려고 우비를 쓴 거잖아요. 그래서 우비를 벗겼다 다시 씌워드린 적도 있어요(웃음).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만 타깃으로 해볼까 싶기도 하고, 아직 고민 중이에요.”
‘린다석’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웃음). <이블데드> 같은 형식의 작품은 연습을 어떻게 할까 궁금합니다. 캐릭터 분석을 심도 있게 해야 한다거나 대사가 많은 작품이 아니잖아요.
“그러게요. 그래서 어려운 연기인 것 같아요. 혼자서는 안 되더라고요. 안무나 합창 맞추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얘기를 많이 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어요. 많이 관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시도해 보고요. 개인적으로는 지금껏 해왔던 작품과는 결이 많이 다르고, 함께 작업해봤던 배우도 전혀 없어서 많이 낯설었는데, 연습하면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기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는 배우들이 다들 적극적으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좋았어요.”
신체연기도 필요하잖아요.
“일단 오랜만에 안무가 많은 작품을 하니까 뮤지컬을 하는 느낌이 나더라고요. 땀이 막 나니까 뿌듯해요(웃음). 작품 들어가기 전에 좀비 영화를 많이 봤는데, 소리가 들리면 빠르게 반응하는 좀비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남자친구인 애쉬 목소리에만 반응하는 좀비로 설정했어요. 연습할 때는 가면을 안 쓰는데, 제가 좀 마르고 하야니까 사람들이 생닭 같다고(웃음). 극대화해서 몸을 떨었더니 더 초라해 보이고, 제 목소리도 탁성이라서 재밌다고 해요.”
작품 자체도 특이하지만 연습하는 과정도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라서 색다른 경험이 될 텐데, 이번 공연에서 가장 힘들거나 신경 쓰는 부분은 어떤 걸까요?
“배우들끼리 드라마는 잊지 말자고 항상 다짐해요. 신나다 보면 더 웃겨야겠다는 욕심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웃기는 장면도 절실하게 진정성을 갖고 가자고 얘기하죠. 연습하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건 런을 계속 돌다 보면 처음에는 웃겼지만 나중에는 안 웃게 되거든요. 그럼 배우 입장에서는 동공이 흔들리면서 뭔가 잘못했나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또 무대에서는 저희가 야심차게 준비한 장면에서 관객들의 반응이 약할 때 당황스럽고요. 이 모든 걸 견디고 휴머니즘이라도 가지고 가자고 얘기해요(웃음).”
참, 이름은 본명인가요?
“네, 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한글 이름인데, ‘하얗고 깨끗하게 살라’며 ‘히어라’라고. 사람들이 얼굴이 희어서 다행이래요(웃음). 어렸을 때는 이름 때문에도 놀림을 많이 받았는데, 배우를 하니까 지금은 제 이름이 정말 좋아요.”
2016년 뮤지컬 <리틀잭>으로 이 특색 있는 이름을 처음 알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맞아요. <리틀잭> 전까지 앙상블도 하고 주연 커버도 많이 했는데, 타이밍도 안 맞고 최종에서도 많이 떨어졌어요. 오디션이나 작품을 통해 저를 좋게 보셨더라도, 제가 무대를 제대로 책임지고 있는 걸 못 봐서 주저하셨던 관계자들이 <리틀잭>을 보고 연락을 많이 주셨죠.”
배우로서 검증이 된 거네요. 그런데 2009년에 데뷔했으니 상당히 오랜 기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리틀잭> 하기 전에 10개월을 쉬었어요. 계속 기회가 닿을 듯하다 안 되니까 자꾸 실망하게 되고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김히어라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는 시간을 갖기 위해 옷도 팔고, 버스킹도 하면서 살았어요. 배우가 아닌 삶도 행복하더라고요. 그 전에는 같이 데뷔한 친구가 잘 되면 상대적인 박탈감도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도 신경 쓰였는데, 배우를 하지 않아도 살 수는 있고, 뭔가 대단히 달라지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리틀잭>에서 연락이 왔을 때 두렵지 않았어요. 이후에는 ‘이 작품 안 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오디션 볼 때 너스레도 떨게 되고요(웃음).”
이후 쉬지 않고 좋은 작품의 특색 있는 인물을 많이 맡고 있는데, 워낙 색다른 캐릭터를 하시니까 김히어라 씨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아직 감이 안 잡힙니다.
“저도 캐릭터 고민을 많이 했는데, 스스로도 잘 몰라서 그동안 오디션에 많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은 제 장점이라고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 <지킬앤하이드>라면 루시도 할 수 있고, 엠마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인상은 엠마로 많이 보시는데, 털털하고 솔직한 제 모습을 아시는 분들은 루시라고 얘기하시거든요. 조용하고 꼼꼼하고 여성스러운 편인데, 말투나 행동에서는 도전적인 면도 있고요.”
20대에 배우가 되고 싶어서 고민이 많았다면 이제는 이렇게 배우로서 생각이 많을 것 같은데요. 현재는 어떤 배우를 꿈꾸나요?
“화려하고 예쁜 배우보다는 계속 보고 싶고 필요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에 했어요. 제작진과 관객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배우, ‘이건 히어라가 해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배우요. 함께 작업하는 과정에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고요.”
김히어라 씨는 인터뷰하는 과정에서도 털털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배우였습니다. 아직은 틀이 굳지 않아 수많은 모습으로 유연하게 변신할 수 있는 모습도 기대되고요. 일단 <이블데드>의 회가 거듭될수록, 7월, 8월 좀비 린다로 더욱 숙성될 김히어라 씨의 모습이 궁금하네요! B급 코미디 좀비 호러 뮤지컬 <이블데드> 는 8월 26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에서 공연됩니다. 7월부터는 싱어롱데이를 비롯해 배우들이 넘버를 바꿔 부르거나 좀비가면을 벗고 맨 얼굴로 역할을 소화하는 ‘스페셜 데이’도 진행된다고 하니 색다른 웃음이 필요한 관객들은 공연장으로 달려가 보시기 바랍니다.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