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비 오는 토요일, 남편과 ‘조용필 50주년 콘서트’를 보러 갔다. 지인이 VIP석 티켓 두 장을 보내주었다. 버스와 전동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파주에서 잠실운동장까지 갔다. 쉼 없이 내리는 비 탓에 몸도 마음도 꿉꿉했다. 잠실운동장 역에 도착했을 땐 무릎 아래와 운동화 앞코가 젖어 있었다. 콘서트를 보러 온 사람들(대부분 중장년층과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들)이 무리를 지어 한 방향으로 걸었다.
무대 앞 ‘잔디석’은 좋은 자리였지만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아야했다. 지붕이 있는 2,3층 관객들이 오히려 부러웠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우리는 우비를 쓴 채 빗속에 앉아있어야 했다. 50주년이고 100주년이고 ‘조용필’이고,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둘러보니 비에 젖은 생쥐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한 사람은 나 뿐이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우비를 뒤집어쓴 서로의 모습을 보며 사진을 찍고 깔깔대며 신나보였다.
나도 저들처럼 신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저이들만큼 ‘열성’으로 조용필을 좋아한다고 할 수 없고, 내 돈을 지불하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기에 신나지 않았다. 춥고 배고프고 축축했다. 목욕탕에 오래 있었던 것처럼 손끝이 쭈글쭈글해졌다. 카페에 가서 몸을 말리며 따뜻한 커피를 좀 마시면 좋을 텐데, 생각하며 옆을 보자 우비를 뒤집어쓴 남편 역시 시무룩해 보였다. 그때 우리는 ‘그냥 가자’는 얘기를 누가 먼저 꺼낼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별 얘기도 없이 빗속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나중에 물어보니 남편 역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단다).
오프닝 무대로 ‘세븐틴’이 나왔다. 펄펄 나는 아이돌의 무대를 보고 열광하는 대신 ‘저이들 저렇게 노래하고 춤추기 위해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븐틴이 유명한 아이돌인가를 두고 여기저기서 수군댔다. 모르긴 나도 마찬가지. 입장할 때만 해도 공연을 보러 온 어르신들과 나는 다르다고, 나는 ‘최연소’ 관객 무리에 들어갈 거라며 내심 허세를 부렸는데, 다를 것도 없었다. 세븐틴 팬들에겐 미안하지만 열화와 같은 환호성은 없었다. 격려의 박수와 기다림(조용필을!)의 열기 속, 다정한 호응이 있을 뿐이었다.
내리던 비가 하늘로 올라갈 정도로 큰 함성은 조용필과 함께 터져 나왔다. 조용필이 나오자 시큰둥해있던, 비 맞은 생쥐 둘(나와 남편)도 사라졌다. 화려한 조명과 밴드 ‘위대한 탄생’이 만드는 음향, 그리고 조용필의 카리스마가 객석을 압도했다. 아이돌에 환호하는 십대 팬들 못지않게 모두 열광했다. 4만5천 명이 빗속에서 조용필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앉거나 서서, 각자 자기 방식대로 춤을 췄다. 화장실 갈 때 보니, 나이가 어린 자원봉사자들도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빗속의 축제였다! 노래가 이런 거구나, 세대를 아우른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그때 내가 한 생각은 우습게도 ‘아, 나는 자라서 조용필이 되고 싶다!’였다. 정말 그랬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의 첫 구절이 나오자 모두 함성을 질렀다. 다들 ‘내 노래’가 나왔다고, 아우성이었다. 합창(요새 ‘떼창’이라고들 하는)이 가능한 노래를 수십 곡이나 가진 가수의 마음은 어떨까?
는 내게도 추억이 있는, ‘내 노래’다. 대학시절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친구 A가 떠오르는 노래. 나는 A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문학 이야기를 했다. 아침 7시에 그녀를 만나러 간 적도 있었다. A가 자취하는 반지하방에 앉아 밀란 쿤데라, 괴테,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읽고 토론하며, 서로의 창작시를 비평했다. 우리는 자주 다퉜는데 그만큼 서로에게 치열했다. 논쟁이 끝나면 양파를 듬뿍 넣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가끔 그녀의 카세트테이프로 조용필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기도 했다. <고추잠자리>, <킬리만자로의 표범>,
를 그녀에게 배웠다. 그 작은 방에서, 우리는 스물셋이었다. 벽에 기대 앉아 목이 터져라 부르던 노래가
다.
“사―랑, 눈감으면 모르리.
사―랑, 돌아서면 잊으리.
사―랑, 내 오늘은 울지만 다시는 울지 않겠다.”
콘서트 장에서 우비를 쓴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 노래를 같이, 또 혼자 부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옆을 보니, 내리는 비에 콧등이 다 젖은 남편도 우렁찬 목소리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저이에게도 ‘눈감으면 모르고, 돌아서면 잊을’ 사랑이, 내가 모르는 사랑이, 모르는 청춘이, 모르는 고뇌가 있었겠지. 다 알기도 두려운, 지나간 것들. 우리 뿐이겠는가. 4만 5천 명의 사람들도 각자의 빛나던 때를 떠올리며,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조용필 노래엔 청춘이 묻어있다. 그게 조용필의 힘이다.
A와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음을 몰랐다. 우리는 얼마나 뾰족하고 빛났던가.
청춘은 별안간 끝난다. 끝이 난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조용필 콘서트장에서 문득, 펄펄 날아다니는 아이돌을 바라보다 문득, 비 맞은 관객들 중 한 명으로 파묻혀 노래를 부르다 문득, 올봄에는 모란, 작약 한 번을 못 봤다고 고개를 수그리다 문득, 가스레인지에 라면 물을 올리다 문득, 끝이 난 것을 안다.
그게 누구의 봄이든, 봄날은 간다.
그리고 이따금 노래에 실려, 돌아온다.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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