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는 백전백패
‘이제까지 내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단어, 비유, 음운, 수사, 논리……. 이런 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언어’입니다. 언제나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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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스승은 있다』 , 『하류지향』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논설과 교육문제에 대한 통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전공은 불문학이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는 불문학 교수로서 정년퇴임 전 마지막 학기에 진행한 ‘창조적 글쓰기’라는 강의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 저자 스스로가 “언어와 문학에 대해 사유해온 것을 모조리 쏟아 붓고자 한 야심찬 수업”이었다고 소개할 정도로, 단순한 글쓰기 강의를 넘어 읽기와 쓰기, 그리고 언어생활에 대한 통찰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진다. 한국어판 출간과 더불어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창조적 글쓰기’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번 책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창조적 글쓰기’란 단순히 작문 기술이나 글쓰기 요령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언어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장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수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이야기했지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나를 향한 메시지라는 것은 알 수 있다’는 현상이 우리 몸에서는 종종 일어납니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메시지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수신인’이 자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메시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욕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강의 초반, 학생들이 써온 과제를 읽고는 “내심 짐작은 했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가 없었습니다.”라고 평하시는데요, 선생님은 예전에 비해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이 뒤떨어졌다고 보십니까? 만약 그런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글쓰기 능력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휘의 많고 적음이나 수사법 구사의 우열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는 하겠지요. 이를테면 교양주의적 시대냐 반지성주의적 시대냐에 따라 표면적으로는 글쓰기의 결과물이 꽤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정형(定型)에 따라서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 ‘정형을 깨뜨리는 언어를 생산하는 사람’의 비율은 대체로 일정하다고 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말한 적이 있는데, ‘지성의 총량은 어느 시대에나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다만 그것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느냐 하는 점만 달라질 뿐입니다.


 ‘글쓰기 능력’을 키우기 위한 실천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평범한 답변이지만, 많이 쓰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만 무턱대고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체로 쓰기, 다양한 양식으로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어에는 경어체 ‘~입니다’와 평서체 ‘~이다’가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글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주어가 ‘나’인지 ‘저’인지 ‘우리’인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에세이, 학술논문, 리포트는 완전히 다른 개별적인 문체와 개별적인 사고를 요구합니다.


나는 대학교수로 재직할 때 자주 관공서에 제출하는 ‘관료적인 작문’으로 글을 썼는데, 그럴 때는 내 자신이 ‘눈치가 빠르고 약삭빠른 관료’라는 마음가짐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것 역시 유용한 글쓰기 연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류의 텍스트라도 글을 써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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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스승은 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 『하류지향』 등 선생님의 여러 책이 한국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국 독자들이 선생님의 글을 즐겨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한 가지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오랫동안 프랑스문학을 연구했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논문을 쓸 때에는 ‘이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 번역했을 때 어떤 글이 될까?’ 하는 점을 생각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프랑스어로 번역할 수 없는 글은 될수록 쓰지 않았습니다(프랑스어로 바꿀 때 고생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니까요). 따라서 ‘일본어가 모어가 아닌 사람들이 읽더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쓰겠다’는 습관이 비교적 젊은 시절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작년부터 한국어 학습을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그 계기는 무엇입니까? 또 선생님에게 한국어(또는 외국어) 공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요?

 

매년 한국을 방문하지만 한글을 읽지 못하니까 간판도 못 읽고 식당의 메뉴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답답한 현실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계기입니다. 반년쯤 공부한 끝에 겨우 한글을 읽을 수 있고 어눌하지만 발음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회화는 전혀 못합니다.


외국어 공부는 어릴 적부터 아주 좋아했습니다(하지만 재능은 하나도 없습니다). 중학생 때는 한문과 영어, 대학생 때는 프랑스어, 대학원생 때는 헤브라이어를 공부했습니다. 새로운 외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할 때는 늘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립니다. 모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분절하고, 모어에는 없는 음운을 발음하는 일이니까요. 새로운 언어를 하나 배울 때마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풍부해질 뿐 아니라 신체의 운용 방식도 변화합니다.


 “언어는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한다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언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대목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좋은 문장과 좋은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좋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좋은 언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유를 자유롭게 하는 언어와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언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유의 부자유를 가져다주는 언어를 사용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점점 사고가 옹색해지고 미리 예측한 결론을 향해 때묻는 논법으로 도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부딪치는 ‘언어의 문제’는 한마디로 그러한 불모의 정형을 어떻게 회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단어, 비유, 음운, 수사, 논리……. 이런 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언어’입니다. 언제나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변화가 빠른 사회일수록 ‘살아남기 위한 리터러시’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사회변화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시기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특히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젊은 세대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최근 몇 년 동안 꽤 진지하게 스키를 배우고 있습니다. 스키를 지도해주시는 마루야마 선생님은 예전에 “스키 보드의 올바른 위치에서 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올바른 위치’는 어디입니까?”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시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올바른 위치’에 돌아올 수 있는 위치입니다.”


‘올바른 위치’란 고정적으로 ‘여기’라고 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수정할 수 있는 위치라는 것, 다시 말해 마루야마 선생님은 그것이 곧 자기 수정?자기 쇄신의 능력을 가리킨다는 가르침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올바른 삶의 방식’이나 ‘올바른 목표’라는 것은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교정하고 미세하게 조정하면서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유로움을 누리는 신체 조작이 가능하다면, 그 능력은 분명히 ‘올바름’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증진시켜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심신 상태를 자주 모니터링하십시오. 어딘가 뻣뻣하게 굳은 곳은 없는지, 꽉 막힌 곳은 없는지, 느슨하게 풀어진 곳은 없는지, 어긋나 있는 곳은 없는지……. 그것을 모니터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여러분의 심신은 이미 양호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심신이 경직되어 있어 병적인 상태에 놓여 있을 때에는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조작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우치다 타츠루 저/김경원 역 | 원더박스
‘살아남기 위한 언어 능력’, ‘살아 숨 쉬는 말과 글’ 등을 주제로 뿜어져 나오는 열정적 강의를 접하다보면, 어느새 읽기와 쓰기의 문제에서 한 단계 깊어진 자신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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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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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잎미경

2018.03.31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작가를 보면서.
모국어를 제외한 외국어를 아무것도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언어는 도구 수단이 아니라 인간 자체인데도. 언어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한 죄가 너무나 큰 것 같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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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