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신형철 평론가의 문장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상실함으로써 영원히 얻게 된 사랑에 대한 탐구가 찬란하다. 이탈리아 북부 햇살이 찬란하고 음악이 찬란하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결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엘리오와 올리버는 자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부른다. 그러니까 나는 너다. 너는 나인 것이다. 올리버가 떠난 후에도 엘리오는 올리버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이미 내가 되어버렸기에. ‘없음’을 받아서 이미 ‘있게 된 존재’였기에.
열일곱 살 예민하고 감성적인 엘리오는 휴가 때만 머무는 이탈리아의 조용한 마을, 가족 별장에서 고고학자인 아버지의 연구 작업을 도와주러 와서 6주 동안 머문 스물넷 연구원 올리버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지적이고 건강한 한 인간에게 완벽히 몰입해 알 수 없는 기분에 자주 휩싸인다. 올리버가 방을 비운 사이, 엘리오는 몰래 들어가 그의 붉은 반바지를 얼굴에 뒤집어쓴 채 몸을 비튼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마음으로.
둘은 서로의 감정을 털어놓는 데는 직설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16세기 프랑스 연애소설을 인용하며, 알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털어놓을지 말지 묻는 에둘러 말하기를 공유한다. 에둘러 말해도 이미 그들은 서로를 알아챘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알면서 모른 척하고 지내자고요?” 엘리오의 물음에 “우리는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올리버도 이미 사랑 고백을 한 셈이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의 색채는 이미 서로에게 깊게 물들었다.
가히 에로티시즘의 극점이라고 할 만한 ‘복숭아즙’ 영상과 사소한 손놀림마저도 성적 환유 같은 영화였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바흐의 피아노곡으로 농담을 주고받을 때, 자전거 외출 후 뛰어든 강가에서 물장난을 칠 때는 유쾌한 우정의 모습으로 보기 좋았고 ‘너를 망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롭다’는 말을 주고받을 때는 연인의 깊은 한숨이 느껴져 보기 아팠다. 이별이 분명히 정해진 미래가 곧 당도할 것이기에.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
올리버가 떠난 후,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고 마음을 뜯어내지 말라고, 우정 이상의 둘 사이를 알아챈 아버지는 엘리오를 다독인다. 아프기 싫어서 감정을 버리지 말고 단 한 번 주어진 마음과 몸, 지금의 슬픔과 그 괴로움을 느꼈던 기쁨과 함께 모두 간직하라고. (이런 아버지를 둔 것은 올리버의 말대로 럭키한 것인가)
유대인의 중요한 명절인 하누카 때 다시 찾은 가족 별장에서 엘리오는 올리버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여전히 사랑하는 그 둘은 자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안타깝게 반복해서 부르지만, 축하의 말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장담으로 읽힌다.
전화를 끊고 난롯불 앞에 앉은 엘리오는 오랫동안 상실감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다가, 진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응답한다. 마치 이제 내가 되어버린 올리버를 품고 엘리오로 살아갈 듯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음악이 유난히도 잊히지 않는다. 엘리오가 바흐 피아노 곡을 치는 것도 아름답지만 싱어송라이터 수프얀 스티븐스의 오리지널 음악은 황홀하다. 이 영화를 하염없이 가슴속에서 반복 재생하게 만든다. 특별한 음악이 주는 선물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인물들은 욕망을 알고 깨우친다. 그 욕망 때문에 삶의 비의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자신의 결여를 선언하는 사랑은 강렬하다.
‘퀴어 로맨스’라고 따로 부를 일도 없다. 이 사랑 이야기는 올해 아카데미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엘리오는 어떤 청년으로 성장할까 한없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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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신형철 저 | 마음산책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고.” 그가 쓰는 영화평론은 결국 ‘좋은 이야기’에 대한 글이며 그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밀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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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찻잎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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