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이천희
사회의 어두운 일면들을 능숙하게 소설화하며 의미 있는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안보윤.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 현실의 사건과 사회적 문제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소설 속에 끌고 들어와 생에 드리운 구조적 폭력을 때로는 아프도록 생생하게, 때로는 기묘하고 몽환적으로 그려낸다.
표제작 『소년7의 고백』 은 경찰의 강압 수사에 의해 자신이 짓지 않은 죄를 고백하게 되는 어리숙한 소년의 육성을 통해 이 사회가 얼마나 쉽게 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흡인력 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진술의 틈새에서 밝혀지는 소년의 과거에는 무겁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코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불순한 순간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을 다각도로 바라보도록 하는 소설적 장치를 마련해둠으로써, 안보윤은 부조리한 사회를 예리하게 고발하는 동시에 가해와 피해, 선과 악으로 이분화할 수 없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소설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들이 있는데요. 그런 상황 속에서 독자는 누구를 연민할지 모르는 무력한 상황에 빠질 것 같습니다. 특별히 상상해보신 독자의 반응이나 태도가 있을까요?
첫번째 소설집을 낼 때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은 이거였어요. ‘나는 비교적 안녕한가? 무엇을 기준으로?’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게 무한정 확장되는 거예요. 나는 비교적 선한 사람인가? 나는 비교적 정직한 사람인가? 나는 비교적 악한 사람인가? 나는 비교적 친절한 사람인가? 질문을 거듭하다보니 경계선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악의로 똘똘 뭉친 악행을 설명하는 건 오히려 쉬워요. 하지만 경계선에 있는 순간들,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악 같은 것들이 궁금하고 두려웠어요. 어떤 악의적 의도도 없이 타인에게 치명타를 줘버리는 순간이요.
예를 들어 이번 소설집 안에 「여진」이라는 단편이 있어요. 어린 남매가 우울증에 걸린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집안에 갇혀 있죠. 아이들은 무료함과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숨바꼭질을 해요. 할머니 주변을 맴돌고 쉼없이 뛰면서 할머니와 스스로를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랫집에 사는 사람. 신경이 예민한 아랫집 사람은 그 엄청난 층간소음에 고통스러워하다 결국 윗집 사람들을 살해하고 말아요. 그럼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요? 생각보다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엉망으로 뒤섞인 삶 속에서 살고 있어요. 단순하게 경계선을 긋고 쟤는 나빠, 얘는 착해, 그러는 게 불가능한 거죠.
저는 독자들이, 저처럼 고민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런 고민을요. 우리는 비교적 안전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의도치 않은 악인이 되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사회에서 잊히고 소외된 사람들이 작가님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문제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들을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너무 많지 않나요? 사회에서 잊혀지고 소외되고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고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사람들이요. 너무 많다, 고 생각해요. 이상할 정도로 너무 많다고.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고 지워내고 무시할 수 있는 이유가 왜 그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은 가난해요. 어떤 사람은 게이이고, 어떤 사람은 피부가 까맣고, 어떤 사람은 학력이 좋지 않고, 어떤 사람은 한부모 가정에서 성장했고, 어떤 사람은 타인을 쉽게 믿고 잘 속아요. 이게 왜 이유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저 역시 ‘어떤 사람’이에요. 저는 여자이고 미혼이고 아이가 없고 안정된 직장이 없으며 가난하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지워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요.
단편 「불행한 사람들」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우리가 알바하면서 사람 취급 못 받은 게 어디 한두 번이야? 평생을(乙)이었으면서 새삼스레 웬 투정이야. 현실을 생각해.” 거기에 소설 속 인물이 이런 대답을 해요. 저도 그 목소리를 빌려 대답할게요.
“아니, 너랑 만나면 나는 늘 불행해져. 널 만나서 얘기하는 동안 불행이 내 등이랑 옆구리에 박음질되는 것만 같아. 네가 다리미로 불행을 꾹꾹 눌러 붙여준 것만 같아. 넌 내 친구고,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이고, 성실한 알바생이고, 현실과 성공적으로 타협한 사람인데, 나는 네가 너무 무거워. 사람이니 그럴 수 있다고? 살다보면 그런 일도 생기지 않느냐고? 남의 돈 버는 게 다 그런 거라고? 그래, 그럴 수 있어. 근데, 그러지 않는 게 사람 아니니.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사람 아니야? 그런 일, 그게 뭐든, 그러지 않으려고.”
소설 속 세쌍둥이의 설정이 재미있었는데요. 한 사람인 듯 각기 다른 인물임이 잘 드러나서요. 한 명도, 두 명도 아닌 세 명을 설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이런 질문은 전혀 예상을 못했어요. 왜 하필 셋이냐. (웃음) 처음 설정한 이유는 단순했어요. 두 명은 어쩐지 대립되는 의견을 가질 것 같고, 그 사이에서 중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빨강 파랑 보라, 이런 느낌으로요. 그러면 어떤 목소리도 돌출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 사람은 나빠’ ‘그 사람은 좋아’ 이렇게 두 가지 답만 존재하면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되는데, ‘그 사람은 좋기도 나쁘기도 해’라는 목소리가 끼어들면 원점으로 돌아가버리잖아요. 그런 걸 상상하며 세쌍둥이를 설정했던 것 같아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하는 대사임에도 공감 가는 대사들이 많습니다. 출구가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이 책을 덮고 난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지금 이 세계를 살아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공감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좀 아프고 쓰린 공감이죠. ‘지금’ ‘이 세계’ ‘우리’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탓에 어떠한 답도 얻지 못한 부분도 있어요. 저는 아직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맹렬히 고민중이고, 제가 선택한 것들이 옳은지 그른지, 앞으로 제가 불행해질지 행복해질지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거든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소설 속 인물들을 많이 괴롭히고 있죠. 이 책을 덮고 나서, 소설 속 인물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독자분이 계시다면요. 그분 역시 힘든 시대를 견뎌내고 계신 분 아닐까요. 묵묵히 걷고 생각하고 가끔은 화도 내고 책을 열어 답을 찾기도 하는 그런 분이요. 딱히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 수는 없겠지만 함께 걷고 싶다, 고 얘기하고 싶어요. 함께 걷고 싶다고, 우리는 이미 함께 걷고 있다고요.
글쓰실 때 컨디션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무거운 내용이 많아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가 어려우실 것 같아요.
개를 괴롭힙니다. (웃음) 따뜻하고 부드럽고 무게가 있는 개를 오래 끌어안고 있어요. 개는 괴로워하는데 저는 굉장히 평온해지고 치료되는 느낌을 받아요. 온기가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저는 가족과 굉장히 많은 것들을 공유하는 편인데, 소설에 관련된 것만큼은 공유하지 않아요. 쓰고 있는 내용을 얘기한다든가 어떤 인물에 대해 쓰고 있는데 심적으로 괴롭다든가 그런 말들은 나누지 않죠. 혼자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쓰다보니 한없이 우울해질 때가 많아요. 소설을 멈추고 싶을 때도 있고, 맥락과 상관없이 무조건 해피엔딩을 내버릴까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러면 개를 데리고 오래오래 산책을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유순한 생물과 걷고 있으면 뭔가가 좀 가벼워져요.
최근 읽으신 책 중 딱 한 권만 추천해주신다면요?
최근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을 다시 꺼내 읽을 일이 있었어요. 예전에 읽으면서 표시해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소설 속에서 무례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시니컬하고 터무니없이 담담한 문장들이 좋았어요. 책을 다시 읽다보면 이전에 도대체 왜 여기에 밑줄을 그었을까, 싶은 부분들이 튀어나와 재미있어요. 이 책에도 밑줄을 박박 그은 부분이 있었는데,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그것은 진실이었고 또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대체 무엇을 그렇게 버텨내야만 했을까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꼭 써보고 싶은 소재나 분위기의 소설이 있으신지, 언제쯤 만나볼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우선 『여진』이라는 단편을 장편으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보통 단편소설을 쓰고 나면 잘 마무리되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 소설만큼은 아니었어요.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난 뒤에도 조랑조랑 무언가가 자꾸 손끝에 맺히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제 안에 이야기가 남아 있다면 더 풀어내고 싶다고 생각해요. 조금 더 먼 ‘앞으로’를 이야기하자면 밝고 가벼운 분위기의 소설을 쓰고 싶어요. 소재의 가벼움은 아니고요, 좀 담담하고 태연하게 문장을 엮어나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언제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언제고 분명히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소설을 완성한 다음 작가의 말에 ‘홀가분하다’라고 적어넣을 수 있는 순간이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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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7의 고백안보윤 저 | 문학동네
우리 개인이 일그러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점에서,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비로소 조우하게 된 이 책이 더욱 값지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