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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폭탄처럼 터지는 성폭력 사건을 보면서 부대꼈다. 내가 당한 크고 작은 피해 경험과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전해 들었던 피해자들 이야기가 일제히 대책없이 되살아났다. 몸의 기억이 들쑤셔져서 잠 못 이루는 피해자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할 수 없다. 집단 트라우마다. 그 와중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제목이 『용서의 나라』 라니 사실 미심쩍었다. 성폭력과 용서라는 말은 양립 불가능한 조합 같았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선.
성폭력 피해 생존자 이름은 토르디스 엘바. 아이슬란드에 산다. 16살 소녀일 때 교환학생을 온 남자친구와 사귀었고 강간당한다. 가해자는 자기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버린다. 그후 토르디스는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자해 등 고통을 겪다가 9년 만에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용서의 첫걸음을 뗀다.
사건의 핵심 명제, 성폭력은 강자가 가까이 있는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것. 토르디스가 사랑하는 사람인 애인에게 당했듯이 내가 본 성폭력 피해자의 90%도 아는 사람에게 당했다. 아버지, 삼촌, 이모부, 오빠, 선배, 친구, 담임선생님, 교수, 직장 동료, 남편 등등. 그들은 힘으로든 돈으로든 지위로든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당했기에 여파가 크다. 피해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로 알아차리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나는 네가 나한테 한 행동이 강간이라는 걸 몰랐어.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상처가 컸는데도 말이야.” (192쪽) 가까스로 인지한 다음엔 가해자가 아니라 자기를 혐오한다. “첫 이성 관계에서 참혹하게 실패한 후로 나는 스르로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었다.”(23쪽)는 토르디스의 고백은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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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한 사람을 관계 불능의 존재로도 만든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에게 성폭력을 당한 한 여성은 서른을 바라볼 때까지 친구도 애인도 없었다. 교우 관계나 이성 관계에서 친해질 만하면 떠나가는 식으로 관계를 기피했다고 한다. 믿었던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철저히 능욕했는데 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68쪽) 그래서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기를 혐오하며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쳐내다 보면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거꾸로 보살핌 받기가 힘들어진다.”(223쪽)
성폭력 피해자의 시간은 정지한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면, 왜 수년이 지났는데 지금 말하느냐는 반응부터 나온다. 시간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흐르지 않는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 겨우 말하는 거다. 친척에게 17살에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열일곱, 스물일곱, 서른일곱 등 10년 단위로 악몽에 시달렸다. 그 해마다 몸이 아팠고 일상이 무너졌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그 오빠의 딸이 결혼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복수를 꿈꾼다. 조카의 결혼식장에 찾아가서 ‘사실을 폭로하는’ 상상을 한다.
토르디스는 16살에 강간을 당하고 25살에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건을 자기 밖으로 꺼내기까지 9년이 걸렸다.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이 없는 건 아니다. 피해자들은 “부서진 자아를 감추”(22쪽)기 위해 과도할 정도로 성취하거나 반대로 무기력에 빠져버린다. 겉보기에 멀쩡한 듯 일상을 영위하면서 내면에서 전쟁을 치르며 “나 자신이 주제하는 재판”을 수시로 여는 것이다.
『용서의 나라』 에는 용서의 또 다른 주체인 가해자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톰 스트레인져는 깊게 반성하고 사건 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여기서 적극성이란 최대한의 소극성이다. 토르디스가 주로 말하고 톰은 그저 듣는다. 침묵과 경청으로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표현한다. 자기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배워간다.
“너는 그날 밤 그래도 되는 권리가 네게 있다고 느꼈겠지.” (179쪽) “내가 여자라서 강간했잖아. (...) 넌 어디선가 배웠을 거야. 네 즐거움이 내 동의보다 더 중요하다고.”(282 쪽) 이 모든 진실 말하기를 겪어내고 톰은 의견을 낸다. “나도 일원이 되고 싶어. 문제의 한 축이 아니라 해결의 한 축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 (393 쪽)
두 사람은 그렇게 용서를 도모한다. 8년간 300통의 편지를 교환하고, 16년 만에 중간지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한다. 쓰고 읽고 듣고 말하며 서로의 언어에 길들여지는 시간을 갖는다. 각자 어렸을 적부터 살아온 과정을 시시콜콜 나누면서 그 맥락에서 성폭력 사건을 들여다보고 이후 고통의 일상까지 소상히 공유한다. 이 탄탄한 밑작업을 통해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얻는다.
토르디스는 말한다. 나는 강간당한 적이 있지만 그게 날 ‘희생자’로 만들진 않는다고.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한다고. 나라는 사람이 그날 밤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용서의 핵심은 짐을 덜되 그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거야. 그 짐이 원래 그 사람의 몫이라 하더라도 말이야.”(68 쪽)
두 사람에게 용서란 자책을 넘어서 자기 행동으로 나아감이다. “자책하는 것과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자기 채찍질로 이어져 자기 연민에 빠져 살게 만든다. 후자는 자기 너머를 보기 때문에 타인과 관련 지어 자기 역할을 찾아낸다.”(438 쪽) 토르디스와 톰은 자신들이 16년간 기울인 그야말로 “태산 같은” 노력을 가족에게 친구에게 차츰 터놓다가 책으로 테드 강연으로 모르는 전 세계 타인들과 공개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용서의 나라』 를 읽는 내내 분노하고 의심하다 안도했다. 성폭력 사건이 믿기지 않는 것만큼 용서의 귀결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저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가능하게 되어가는 장대한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성폭력 사건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거 하나는 분명하다. 용서는 신이 지급하는 쿠폰이 아니고 인간의 용기를 거름 삼아 자라는 나무라는 것.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용기 내어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살아있음 자체가 용기다. “삶은 계속된다. 한껏 이용하라. 네가 가진 게 별로 없다 해도 삶만은 네 것이다.” (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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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 저/권가비 역 | 책세상
가장 끔찍하고도 영구적인 폭력으로서 강간이 일상화된 오늘의 현실을 아프게 일깨우면서, 남녀 모두가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이 문제에 동참할 것을 뜨거운 체험의 언어로 설득한다.
은유(작가)
글 쓰는 사람.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쓰기의 말들』, 『글쓰기의 최전선』, 『폭력과 존엄 사이』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