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부에게나 상처는 있지만...
무대의 한쪽 벽면에 말끔한 정장이 한 벌 걸려있다. 여자는 손을 뻗어 옷을 쓸어보지만 손길은 허공을 맴돈다. 현관을 열고 남자가 들어와 그대로 여자를 지나친다. 소파 위로 몸을 파묻은 채 오늘 하루가 힘들었다 말한다. 여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 보고, 둘의 대화가 시작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이어지지 못하고 연기처럼 흩어져 버린다. 곧이어 암전이 찾아오고 ‘나에게는 3년 동안 입어보지 못한 정장과 구두가 있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이 낮게 깔린다. 이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연극 <하루> 는 원철과 보영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혼 6년차, 친구처럼 유쾌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두 사람이다. 그들의 일상은 평범한 부부들의 그것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아직 아이가 없다는 것. 보영은 묘책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도 믿는다는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그가 일러준 방법을 충실히 따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기다리는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고, 보영은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것은 원철과 보영, 두 사람이 간직하고 있던 상처다. 부부로 살아온 시간이 쌓였으니 상처 하나쯤 없는 것도 이상할 테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오랜 뒤에도 결코 웃으며 추억할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는 기억과 달리, 깊은 흔적으로 남아 지우기 불가능한 경험에 가깝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프지만, 두 사람은 덤덤하게 지난날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보다 더 아픈 일을 겪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걸,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원철과 보영 부부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연극 <하루> 는 묻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사랑하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작품 안에서 두 개의 질문은 한 몸인 듯 붙어있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 사랑은 자연스레 빛을 잃는 것 같지만, 때로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빛을 낸다. 원철과 보영의 사랑이 꼭 그러하다.
아마 우리의 사랑도 그럴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지낼 뿐. 그럴 때 사랑은 뜨거움을 지나 미적지근해진 것 같고, 마치 잠 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하루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까’ 생각해 보면,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사랑이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가슴이 다시 뜨거워짐을 느낀다. 연극 <하루> 를 보고 난 후, 관객에게 남을 느낌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나의 곁에 있는 사랑, 언젠가 ‘마지막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될 사랑을 다시, 뜨겁게,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다.
연극 <하루> 에는 유쾌한 부부의 일상, 그 속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들이 담겨있다. 작품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부부가 공유하는 것들-사랑과 아픔의 진한 이야기를 전한다. 관객을 웃고 울리는 순간들이 이어지고 감성적인 음악이 함께한다. 재즈 작곡가 김인애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발라드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다. 배우 전청일, 전시후, 이섭정은 남편 원철 역을, 배우 박민서, 김수민, 전지선, 김가현은 아내 보영 역을 맡아 열연한다. 작품은 2월 28일까지 대학로 낙산씨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