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교육방송 EBS에서 <까칠남녀>라는 프로를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후유증이 만만치 않습니다. 학부모들이 방송국 로비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인터넷에 비난이 빗발치고, 청와대에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청원까지 넣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인간의 성(性)에 대해 어떤 규범에 비춰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성소수자를 포용해야 할 의사들조차 동성애에 대해 거의 율법적 태도를 취합니다.
하지만 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생물학, 유전학, 의학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지요. 성이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만큼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개념들이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시각을 어느 정도 수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이기 때문에 낯선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거든요. 따라서 무엇보다 열린 마음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글은 과학이 인간의 성에 대해 밝혀내고 있는 것들을 알리기 위해 쓴 것이며 곧 단행본으로 출간됩니다. 알마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조금 줄여 싣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글들이 대개 어렵고 혼란스럽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복잡한 설명은 피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자 하지만 3-4회 정도는 연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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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에 대해 이해할 때 먼저 4가지 기본 영역을 알아야 합니다.
1) 생물학적 성(Biological Sex)
일단 성(性)이 뭐냐는 질문에 답해야겠지요. 누구나 알듯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합니다. 이 구분에는 출생 시 해부학적 특징, 즉 성기의 모양과 구조가 다르다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사춘기에 나타나는 2차 성징, 즉 남성은 수염이 나고, 목소리가 낮아지고, 근육이 발달하는데, 여성은 가슴이 나오고, 골반이 커지고, 피부가 부드러워진다는 특징으로도 구분하지요. 이런 특징들은 유전자에 의해 정해집니다. 인간의 염색체는 46개입니다. 44개는 상염색체(보통염색체)이고, 2개는 성을 결정하는 성염색체입니다. 성염색체가 XX면 여성, XY면 남성이 됩니다. 하지만 염색체(유전자)는 설계도일 뿐입니다. 설계도에 따라 몸을 만드는 것은 호르몬의 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남성호르몬에 반응하지 않는 희귀한 질환을 타고난 사람은 XY 염색체를 지니고 있지만 외형상 여성이 됩니다. 이렇게 유전자나 호르몬에 의해 정해지는 성별을 생물학적 성(biological sex)이라고 합니다. 한편 염색체나 호르몬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생물학적으로 성별 구분이 모호해지는 수가 있는데 이를 간성(間性, intersex)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남녀한몸증(hermaphroditism)이라고 했는데 부정확하고 차별적인 용어라고 하여 현재는 잘 쓰지 않습니다.
2) 성적 정체성(Gender Identity)
그런데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는 자신의 성별을 생물학적 성별과 다르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여자아이인데 자기는 남성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느끼는 성별을 성적 정체성(gender identity)이라고 합니다.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여자아이는 자신을 여성이라고 느끼며, 남자아이는 자신을 남성이라고 느낍니다.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는 거죠. 이런 경우를 시스젠더(cis-gender)라고 합니다. 반대로 여자아이가 자신을 남성이라고 느끼거나, 남자아이가 자신을 여성이라고 느끼는 경우, 즉.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고 합니다. 왜 자꾸 ‘아이’라고 하느냐고요? 성적 정체성이 비교적 이른 나이인 3-4세 경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잠깐 용어를 짚고 넘어갑시다. 우리말로는 그냥 ‘성(性)’이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sex와 gender를 구분해서 씁니다. 보통 sex는 생물학적인 성을 가리키거나 성적 행위와 연관된 것들을 지칭할 때 씁니다. 한편, gender는 성적 정체성이나 사회적 역할을 얘기할 때 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가 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번역어를 확립하든지, 새로운 용어를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페미니즘, 젠더라는 용어를 그냥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지만, 거꾸로 사고를 규정하기도 하니까요.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트랜스젠더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여성이었다가 수술을 받고 외모나 신체 구조상 남성이 된 사람, 또는 반대의 경우를 트랜스젠더라고 하지만 사실은 틀린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스(cis-)와 트랜스(trans-)라는 접두사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뜻은 각각 ‘이쪽’과 ‘건너 쪽’입니다. 주로 유기화합물의 구조를 지칭할 때 쓰였는데 최근 성적 정체성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빌려온 겁니다. 그러니까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같은 쪽에 있으면 시스, 반대쪽에 있으면 트랜스입니다. 그럼 신체 구조가 바뀐 사람은 뭐라고 할까요? 트랜스젠더 중에는 그대로 있어도, 즉 스스로 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남성의 몸을 갖고 있어도 괜찮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외모나 신체를 갖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호르몬 치료나 수술을 받습니다. 그 과정은 전환(transitio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의학적인 방법으로 신체 구조가 바뀐 사람은 성전환자라고 합니다.
3) 성적 표현(Gender Expression)
성적 표현(gender expression)이란 옷이나 장신구, 행동, 언어 등 외관상 나타나는 젠더에 관련된 특징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자아이가 스파이더맨 옷을 입고 쌍절곤을 휘두른다거나, 남자아이가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는다거나 하면 생물학적 성과 성적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성적(feminine)과 남성적(masculine)으로 구분하는데 역시 중간 형태가 있겠지요? 그건 중성적(androgynous)라고 합니다. 어떤 복장, 어떤 행동을 여성적 또는 남성적이라고 볼 것인지는 지역과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치마를 입는 것을 여성적인 특징으로 생각하지만 스코틀랜드처럼 남성이 전통적으로 치마를 입는 곳도 있지요. 보통 여성이 남성적 행동을 하는 건 ‘선머슴’ 같다며 다소 너그럽게 받아들이지만, 남성이 여성적 행동을 하면 ‘기생오라비’ 같다고 해서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어릴 적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성인 여성이 남성용 정장을 입고 다니거나, 성인 남성이 머리를 길게 기르고, 화장을 하고, 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다닌다면 이상한 눈초리를 받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4)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
영어로 gender라고 하지 않고 sex란 용어를 썼지요? 성적 행위와 관련된 주제란 뜻입니다. 동성애 얘기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생물학적 성이 어떻든, 성적 정체성이 어떻든 대개 사춘기가 되면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리게 됩니다. 이걸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이성을 사랑하게 되지만, 동성에게 끌리는 경우도 있지요. 각각 이성애자(heterosexual), 동성애자(homosexual)라고 합니다. 남성 동성애자를 게이(gay), 여성 동성애자를 레즈비언(lesbian)이라고 하는 건 많이 알려져 있지요? 한편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끌리는 경우는 양성애자(bisexual), 어느 쪽에도 끌리지 않는 경우는 무성애자(asexual)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LGBT(Q)라는 약자도 많이 씁니다.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의 머릿글자를 딴 말로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퀴어’란 뜻입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많은 용어가 한글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네요. 퀴어란 단어는 나중에 설명할게요.
생물학적 성, 성적 정체성, 성적 표현, 성적 지향이 모두 이해가 되시나요? 이제 정말 중요한 점을 살펴봅시다. 각 영역들은 독립적이란 겁니다. 연결시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떤 영역끼리도 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람이 자신은 남성이라고 느낀다면 일단 트랜스젠더지요? 이 사람은 자라서 남성을 사랑할 수도 있고, 여성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별개니까요. 4가지 기본 영역마다 여성과 남성이 존재하니까 2x2x2x2=16가지 유형이 나오겠지요. 중간도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간성이거나, 성적 표현이 중성적이거나, 성적 지향이 양성애자 또는 무성애자인 경우 말입니다. 그러니 경우의 수는 더 늘어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여성적으로 꾸미고 다니길 좋아하고, 말도 행동도 얌전해서 어려서는 어딜 가든 사람들이 여자아이인 줄 알았습니다. 성장해서도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여성스런’ 귀걸이를 하고, 립스틱을 비롯한 색조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다닙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남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생물학적으로는 남성, 성적 정체성도 남성, 성적 표현은 여성인 셈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남성을 사랑하게 될까요, 여성을 사랑하게 될까요? 모릅니다. 성적 지향은 독립적이므로 연결시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 중에는 이성애자로 여성과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사는 분도 있고, 동성애자로 남성과 파트너가 되어 사는 분도 있습니다.
가장 혼동하기 쉬운 것이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자신은 남성이라고 인식한 결과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동성애자(레즈비언)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적 정체성은 자신에 관한 인식입니다. 대개 아주 일찍 생겨납니다. 3세 전후로 생긴다고 하는데, 18개월부터 성적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했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성적 지향은 사춘기 들어, 사랑에 빠지는 나이에 생깁니다. 트랜스젠더인지 시스젠더인지는 아주 어려서부터 알 수 있지만,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는 사춘기가 되어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 살배기가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젠더’를 ‘섹스(정확하게는 섹슈얼리티)와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세 살배기가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자기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안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뒤집어 생각해보세요. 세 살이나 됐는데 자기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는 아이도 있나요? (다음 회에 계속합니다)
강병철(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대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2005년 영국 왕립소아과학회의 ‘베이직 스페셜리스트Basic Specialist’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다.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 《원전, 죽음의 유혹》《살인단백질 이야기》《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