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한 편씩 글을 써서 보내라고 말했다
친구가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18. 01. 10.)
글ㆍ사진 이영은(나비클럽 편집자)
201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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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한없이 막막했다가 하루는 더없이 낙관으로 가득찬 날들을 보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힌 지 3년이 지났다. 어느 날 그녀가 보낸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우울증에 빠져 있고 자기가 사는 곳으로 와주면 좋겠다는 바람. 그 바람을 지렛대 삼아 집에서 튕겨져 나올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로 떨어졌다. 그녀는 몇 년에 한번씩 봐도 어제 본 것처럼 이어지는 이상한 친구다.

 

20년 전. 그녀는 몸에 딱 붙는 밤색 추리닝 상의에 청바지, 퓨마 운동화를 신고 나타났다. 지퍼를 턱까지 올리고 두 주먹은 호주머니에 장전한 채, 새벽까지 스타크래프트를 했다며 외계어 같은 게임어를 ‘아오’ ‘존나’와 함께 뱉었다. 숱이 많은 긴 머리를 올백 반머리로 단속한 뒤, 호주머니에서 왼손만 뽑아 밥을 먹고 글을 쓰고 동료들에게 주먹을 먹였다. 내가 본 그녀의 첫 캐릭터.

 

졸린 듯 늘어져 있다가 재밌는 건수를 만나면 깨어났다. OFF거나 ON이거나. 그 중간은 없는 듯 했다. 불이 들어온 상태일 때는 끝까지 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선 이전에 두려움 때문에 멈춘다. 그래서 다들 인생의 임계점을 만나지 못하고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가는지도 모른다.

 

호기롭고 호기심이 많아도 비즈니스 통역가로 동행하다 룸싸롱 접대룸까지 들어가는 여자 통역가는 드물 것이다. 자신의 비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한다. 한일 촬영팀을 이끌고 구성작가 PD로 방송 콘텐츠를 만들어낸다. 욕에 소질이 있다는 걸 확인한다. 성질 사나운 골드미스. 내가 본 그녀의 두 번째 캐릭터.

그녀는 길을 잃는 데 천재다.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고달픈 유학생활을 하고 오더니 다시 이탈리아로 떠나 낯선 언어와 미래가 불투명한 시간 속을 헤맸다. 인연 따라 건너간 프랑스에서는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어버린다. 우울한 그 미궁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어느덧 중년의 파리댁이 되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파리에 도착하여 내가 만난 그녀의 최근 캐릭터.

 

임계점을 지나 달라진 그녀를 만나면 TV 드라마가 싱거워진다. ‘비겁하지 않게 한심하지 않게 살아서 여기까지 도망왔어.’라고 그녀가 말했다. 눈 뜨는 순간부터 잠이 드는 새벽녁까지 열흘 동안 내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죄다 친구들 이야기다. 오랫동안 참았던 한국말 수다, 오래 참은 만큼 속사포로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녀의 특별한 친구들을 만났다. 때로는 병맛이어서 어이없고 때로는 뭉클해서 웃다가 눈물이 맺혔다.

 

파리에서 기차로 30분 떨어진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루브시엔. 이곳에 생각지도 못했던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살게 된 그녀는 길을 걷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하는 어리둥절한 순간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언제나 차라리 낯선 곳에서 길을 잃는 쪽을 선택했던 그녀. 예상과 달리 비위도 약하고 저질체력에 겁도 많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열흘 내내 줄구장창 한 테마로 듣다보니 알겠다. 그녀에겐 자기도 모르는 능력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친구를 사귈 줄 안다. 그녀에게 친구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열쇠이자 자신이 갇힌 틀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고 미로를 같이 헤매는 재밌는 길동무였다. 한번 사귀면 깊고 오래 간다. 외로움을 잘 견디는 만큼 외로운 친구를 한눈에 알아보고 아팠던 만큼 친구의 상처를 감지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안다. 헤맸던 만큼 길 잃은 친구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펴주는 네트워크. 서로 공명하며 살아있는 네트워크가 그녀에게 길을 제시한다. 그녀는 ‘친구’라는 살아있는 지도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 다 네 친구들 때문이야.”

 

나는 생각했다. ‘그 친구들을 이어보면 여기까지 이르게 되고 그 점을 따라올 수 있었던 건 어디에 떨어져도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네 천성 때문이지.’

 

도쿄, 로마, 파리로 살다 보니 그녀는 졸지에 멀티링구얼이 되었다. 그녀를 보면 사용 언어에 따라 달라지는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일본어를 쓰면 조신하고 성실한 범생이. ‘하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예의 바르게 상대와 조응한다. 이탈리아어를 쓸 땐 두 손을 앞으로 치켜 올린다. 몸을 흔들면서 달려든다. 침도 튄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그녀는 사뭇 사랑스럽다. 아름다운 비음과 가성으로 ‘송송송’ 거릴 때면 그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언어는 프랑스어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어를 말할 땐 이마에 주름이 잡히면서 걱정쟁이와 욕쟁이가 된다. 남편에게 잔소리하고 싸울 때는 한국어와 이탈리어를 쓴다.

 

이 언어들을 익히면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그녀 안에 시간 순으로 켜켜이 쌓여 있다. 각 언어의 스위치가 커질 때마다 해당 캐릭터들이 나타난다. 그 캐릭터들은 그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만난 친구들, 그들과 함께 한 그 시절 그 시간들이 빚어낸 것이다. 길을 잃는 것은 남는 장사였다. 독특하고 다양한 친구들과 벌인 우정 어린 행각들로 인생이 풍성해졌고 멀티링구얼 다중캐릭터로서 더 강력한 친구 만들기 기술을 갖게 되었으니까.

 

나는 드골 공항에서 헤어질 때 그녀에게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써서 보내라고 말했다. 친구가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열자 그녀의 첫번째 글이 도착해 있다. 나는 읽고 답을 했다. 그녀는 또 써서 보냈다. 재밌다, 진짜? 재미없다, 흠, 이건 빼자, 잘 썼다, 그뤠잇! 이렇게 쓰면 안 돼, 왈가불가, 알아먹게 말해 븅신아, 뭣이! 븅신?

 

7개월 동안 매일 이메일과 카톡으로 작업이 이어졌다. 숱한 원고와 매일매일의 안부, 푸념, 말 못할 절망, 침묵, 한숨들이 카카오톡과 메일함에 쌓여 갔다. 그 중에 책으로 담을 내용을 편집하면서 나는 어느새 두려워서 생각만 하고 있던 출판사를 시작하고 있었고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던 요시모토 바나나를 닮은 문체의 에세이스트가 되었다. 나비클럽의 첫 책 『사무치게 낯선 곳에서 너를 만났다』가 나온 것이다.

 


 

 

사무치게 낯선 곳에서 너를 만났다이주영 저 | 나비클럽
세상 모든 이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친구라는 것, 그리고 다른 삶은 다른 인연으로부터 온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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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치게 낯선 곳에서 너를 만났다 #나비클럽 #이영은 편집자 #파리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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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2018.01.11

와... 너무너무 책이 궁금해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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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은(나비클럽 편집자)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바람으로 나비클럽을 만들었고 사람을 만나고 책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