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의 측면돌파] 책은 남의 책이 최고예요 (G. 정세랑 작가)
오늘 모신 분은요. ‘공그르기를 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분입니다. 공그르기는 바느질법의 한 가지라고 하는데요. 이 분은 온갖 것들을 이어보고 싶으시대요. 정세랑 소설가님 모셨습니다. (2018. 01. 04.)
글ㆍ사진 김하나(작가)
201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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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정세랑 편 인터뷰 사진.jpg

 

 

그냥……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 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정세랑 소설가의 『피프티 피플』 속 한 구절이었습니다. 우리가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뉴스에서, 비합리적이고 불평등한 일들을 발견할 때가 많잖아요.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고, 좀처럼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데요. 그럴 때, 오늘 읽어드린 구절을 떠올리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느리기는 해도, 우리는 분명 나아지고 있는 중일 겁니다.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라는 체념과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자조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마음이 조급해진다면, 소설 속의 이 말을 주문처럼 외워보세요.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인터뷰 - 정세랑 작가 편>

 

김하나 : 정세랑 작가님, 안녕하세요.


정세랑 : 안녕하세요.

 

김하나 : 오늘 방송은 제 사심을 채우는 방송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굉장히 팬이거든요.


정세랑 : 저도요(웃음).


김하나 : 아, 감사합니다(웃음).

 

김하나 : 이번 달 11일에 ‘한국일보문학상’ 수상하셨잖아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정세랑 : 감사합니다.


김하나 : 수상에 앞서 예지몽을 꾸셨다고 알고 있어요.


정세랑 : 그게 예지몽이었는지, 그냥 제 욕망의 발현이었는지 모르겠는데(웃음)...


김하나 : ‘받고 싶어!’ 이런 거요(웃음)?


정세랑 : 그렇죠. 너무 받고 싶으면 꿈도 꾸잖아요. 후보가 먼저 발표되고 나서 어느 날 자다가 꿈을 꿨는데, 한국일보에서 전화가 와서 받는 꿈을 꾼 거예요. 굉장히 우아하게 전화를 받고 상을 잘 받겠다고 우아하게 인사하게 꿈을 꿨는데요. 사실 꿈을 꾸고 나서 엄청 웃었어요. 그런 꿈도 꿨다고, 내가 정말 욕망이 드글드글하구나, 이러면서(웃음). 그래서 약간 부끄럽고 농담 삼아 한 이야기였는데, 여러분들이 예지몽으로 받아들여주시더라고요. 사실 예지몽이라기보다는 저의 욕망 뻗치는 꿈이었고. 그런데 정말 제가 받을 줄 몰랐어요. 사실 실제로 전화 왔을 때는 너무 우아하지 못하게 다른 이야기를 해버린 거예요.


김하나 : (웃음) 뭐라고요?


정세랑 : 한국일보 기자님이 전화하셔서 ‘출판사에서 연락 받으셨어요?’라고 물어보신 거예요. 저는 당연히, 11월이 시상식 주간이잖아요, 그래서 ‘아, 연말 송년회요?’ 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동안 했어요. 몇 마디씩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기자님이 제가 이해를 못했다는 걸 파악하신 거예요(웃음). 그래서 꿈에서는 진짜 우아하게 받았는데, 실제로는 너무 우아하지 못하게 받는 바람에. 그래도 무척 기뻤어요, 정말. 스누피처럼 춤을 췄어요.

 

김하나 : 소설 쓰실 때 인물들의 직업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특이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자료수집 차원에서 질문도 많이 하시고요. 만나보신 분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직업을 가진 분들은 어떤 분들이었을까요?


정세랑 : 『피프티 피플』에서 쓴 것 중에는 ‘대환’이었죠. 아는 언니의 연말 파티에 갔다가 전투기 조종사였던 분을 소개받은 적이 있어요. 언니의 의도는 소개팅이었던 것 같지만 그건 실패했고요(웃음).
김하나 : 자료조사를 해버리셨군요(웃음).


정세랑 : 네, 자료조사를 해버린 거죠(웃음). 그 분한테 따로 감사 인사를 못 드렸는데 허락은 해주셨거든요.


김하나 : 그러면 지금 이 자리를 통해서 그 분께 인사를 전하시죠.


정세랑 : 선생님, 제가 그때 좋은 자료를 얻고 조금 애매해서 다시 감사인사는 드리지 못했는데요(웃음). 덕분에 좋은 소설을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디에 계시든지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웃음).

 

김하나 : 집필을 하실 때는 하루 일과가 어떻게 돼요?


정세랑 : 제가 아침형 작가라고 소문이 잘못 났는데, 그건 작가들 중에 아침형이라는 이야기고요(웃음). 왜냐하면 작가들은 오후 2시에 일어나니까요. 그보다는 조금 일찍 일어난다는 뜻이고, 정말 아침형 분들에 비하면 늦게 일어나는 편이죠. 7시나 8시쯤 일어나서...


김하나 : 아침형 맞네요.


정세랑 : 맞나요?


김하나 : 네, 맞아요. 제가 인증해드릴게요.


정세랑 : 하지만 직장인들은 6시에 일어나니까요. 그보다는 늦게 일어나는데요. 9시쯤 일을 시작해서 11시 반까지가 제일 잘 써지는 것 같아요. 그때 쓰고, 오후에는 짧은 에세이나 칼럼을 쓰고요. 오후 늦게는 어제 쓴 글을 고치고, 저녁때는 책을 읽거나 남의 콘텐츠를 즐기면서 스트레스를 풀죠(웃음). 그런 루틴으로 쭉 살고요. 제일 좋은 건 놀 때인 것 같아요. 사실 노는 거 너무 좋아해서, 놀기 시작하면 끝없이 놀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정말 저는 읽는 걸 훨씬 좋아해요. 읽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왜 이렇게까지 써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책은 정말 남의 책이 최고예요.

 

김하나 : “20대 여성으로, 편집자로 겪었던 일들 때문에 잘 써서 복수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적도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런 마음을 갖게 한 사람들을 소설에 등장시켜서 죽이기도 하셨나요?


정세랑 : 소설에서 제일 많이 죽인 건 전 남자친구들이에요(웃음).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김하나 : (웃음) 그때는 정말 살기등등해서?


정세랑 : 네. 정말 왜 그렇게까지 폭력적인 연애 경험을 많이 했는지, 정말 고난에 가까운 연애였어요. 그런데 되게 보편적인 경험인 것 같아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은 분들만 만났으면 괜찮은데, 너무 끔찍한 경험을 많이 한 거예요. 그래서 일단 자기 치유의 과정으로, 제가 나쁜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고, 자기 치유의 과정으로 전 남친들을 초기 단편들에서 엄청 죽였어요.


김하나 : 어떤 방식으로 죽이셨나요?


정세랑 : 흡혈귀한테 민감한 부위를 물려서 죽은 남자도 있고(웃음).

 

정세랑 : 일에서 괴롭혔던 사람들은. 그래도 조금 머니까 죽이는 것 까지는 아니고, 괴롭히기는 조금 괴롭혔나(웃음). 그보다는 제가 소설을 쓰면서 저한테 발언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들이 굉장히 힘들 거거든요. 굉장히 배 아프고 짜증나고 신경질 나고... 그래서 복수는 충분히 된 것 같아요.


김하나 : 와, 좋네요. 멋있어요. 발언권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굉장히 멋진 발언권이 생겼잖아요.


정세랑 : 되게 조심해서 써야 되는 발언권이기도 해서, 그걸 계속 생각해야 되는 것 같아요. 지면이 있고 글을 쓰고 말을 했을 때 조금 더 멀리 퍼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원래는 생각을 못했었는데요. 요 몇 년간 의외로 그런 발언권이 저한테 있다는 걸 깨달아서, 더 잘 쓰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렇지만 쉽지 않죠.

 

김하나 : 자, 이제 뜬금포 ‘스피드 퀴즈’가 돌아왔습니다!


정세랑 : 긴장됩니다.


김하나 : 바로 바로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생각 같은 것 하지 마세요.


정세랑 : 네.


김하나 : 나는 이런 소설가로 기억되고 싶다. 탁월한 상상력을 가진 소설가 or 독보적인 문체를 가진 소설가.

 

정세랑 : 탁월한 상상력을 가진 소설가


김하나 : 나는 솔직히 글을 잘 쓴다. 나는 문학상을 더 받아야 된다.


정세랑 : 받아야 한다(웃음).

 

김하나 : 독보적인 문체를 가진 소설가가 아니라 탁월한 상상력을 가진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정세랑 : 그건 현실적인 판단인 게, 저는 사실 문장이 되게 건조한 편이에요. 정말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사람들은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가 뭘 잘하고 못하느냐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름답게 유려한 글을 쓸 것 같지는 않고요. 제가 읽을 때도 건조한 문장 자체를 좋아하기도 해요. 그래서 건조하게 이야기를 차곡차곡 잘 쌓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하나 : ‘나는 솔직히 글을 잘 쓴다, 나는 문학상을 더 받아야 한다’라는 질문에 예스라고 하셨어요.


정세랑 : 제가 잘 써서가 아니라, 문학상이 최고인 것 같아요.


김하나 : (웃음) 문학상이 와따야!


정세랑 : 문학상이 정말 기뻐요. 세상에서 제일 기쁜 인정이기 때문에. 제가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작가에게 물어보면 문학상은 많이 받을수록 좋다고 할 것 같아요(웃음). 상 싫어하는 작가가 어디 있겠어요. 최고죠. 정우성이 잘생겼다는 말을 계속 들어도 안 질리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요(웃음).


김하나 : 예전에 영화 <라쇼몽>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칸영화제였나요, 상을 받고나서 소감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자신은 젊고 아직 어떤 크레딧 같은 게 없는 거죠. 그런데 ‘나에게는 꼭 이 상이 필요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는데요. 그게 어떤 인정과 권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조금씩 더 가져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거겠죠.


정세랑 : 훨씬 자유로워지죠. 상이 뒤에서 버텨주면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굉장히 늘어나요.


김하나 : 상을 스윕(sweep) 합시다! 그랜드슬램 달성!


정세랑 : 살면서 두어 개만 더 받으면 좋겠어요(웃음).


김하나 : 두어 개 더 받으시면 제가 플랜카드 만들게요.


정세랑 : 좋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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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작가)

브랜딩, 카피라이팅, 네이밍, 브랜드 스토리, 광고, 퍼블리싱까지 종횡무진 활약중이다. 『힘 빼기의 기술』,『15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등을 썼고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