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짐 아짐자드Azim Azimzade, <부자들의 라마단>, 1932년
라이너 베르너 파스벤더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독일 노동계층의 한 중년 여성이 젊은 모로코 남성과 사랑하는 이야기다.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은 모두 분가했으며 청소 노동으로 홀로 살아가는 나이 든 여자와 젊은 몸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아랍계 이민 남성의 우연한 만남은 서로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소외와 쓸쓸함을 부둥켜안게 만든다. 70년대 독일 사회에서 아랍인과 독일인의 조화를 곱게 볼 리가 만무하다. 이들은 이웃과 자식들의 모멸적인 시선을 견디며 결혼을 강행하고 사랑으로 관계를 지켜간다. 나이 차이도, 인종 차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랍 카페에서 아랍 음악을 들으며 함께 춤을 추던 그들이지만 식문화에서는 그만 장벽이 만들어졌다. 알리는 고향 생각이 나면 에미에게 쿠스쿠스를 먹자고 하지만 에미는 쿠스쿠스를 싫어해서 이를 거절한다.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상대의 거부감은 마치 내가 속한 문화적 배경을 배척하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사이에 놓인 식탁의 거리는 점점 늘어난다. 알리는 자신에게 쿠스쿠스를 만들어주던 카페의 젊은 주인을 찾아가 쿠스쿠스를 청한다. 나아가 그에게 쿠스쿠스를 함께 먹을 수 있는 관계는 곧 함께 침대로 뛰어들 수도 있는 관계였다. 쿠스쿠스를 거부하는 여자와 쿠스쿠스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자로 나뉘는 이 구도가 편치는 않지만, 영화는 외로운 인간들의 군상을 품격있게 잘 담아내었다. 내가 직접 무슬림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기 전과 후, 이 영화는 내게 다르게 다가왔다.
할랄 음식이 뭔지, 라마단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지금보다 훨씬 무지했던 시절, 중국 친구가 식사 초대를 했고 음식은 함께 만들기로 했다. 메뉴를 물으니 밀가루로 만든 피 안에 돼지고기와 약간의 채소를 다져서 넣은 다음 잘 싸서 익혀 먹는 음식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만두다. 함께 모여서 빚어 먹기에 좋은 음식이다.
친구가 초대한 사람 중에는 레바논 친구도 있었다. 우리는 둘러앉아서 열심히 만두를 빚었다. 먼저 중국 친구가 만두를 빚어 시범을 보였다. 한국에서 흔히 먹던 만두보다는 좀 작은 크기, 중국 식당에서 파는 물만두와 비슷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속을 만들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피를 만들고, 만두를 빚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렸다. 빚은 만두 중 반은 찌고 반은 프라이팬 위에 기름을 둘러 살짝 튀긴 후 식탁에 내놓고 보니 적어도 4시간은 걸린 듯했다.
작은 만두가 커다란 접시를 가득 채우며 식탁에 놓일 때 모두 젓가락을 들이대며 환호했다. 일단 만두를 빚느라 소모한 시간을 생각하면 배가 고파서 뭘 먹어도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때 딱 한 사람은 가만히 있었다. 레바논 친구는 조용히 감자칩만 집어 먹었다. 왜 만두는 먹지 않냐고 물었더니 돼지고기가 들어가서 자기는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그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인식했다. “왜 말하지 않았어? 진작 말하지.” 그때 우리중 누군가(어쩌면 내가) 이렇게 물었던 기억도 난다. 정확히 나인지 다른 사람인지조차 기억이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툭, ‘우리’는 그렇게 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 그는 그저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면서 ‘그냥’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 이 반응이 얼마나 상대에 대한 무관심을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는 태도였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날 그 맛있는 만두의 맛은 약간 민망한 기억과 붙어 다닌다. 레바논 친구와 만두를 빚어 ‘우리만’ 먹던 그 날의 당혹스러움은 내게 ‘함께 먹기’에 대한 다른 태도를 생각하게 했다. 누군가와 식사를 할 때 혹시 그가 종교나 정치적인 이유로 먹지 않는 음식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무슬림과 마주 앉아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가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떤 세계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는 때로 사소한 낯섦에서 출발한다. ‘없던 혐오가 생기려고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변태하기를 거부하고 무지에 양분을 주어 혐오를 발아시켰을 뿐, 없던 혐오가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때로 불편하다. 나는 모를 것이다, 몰라도 된다, 이렇게 스스로 설득시키며 차라리 몰라도 되는 권력을 지향하는 편이 오히려 편하다. 자신의 세계에 그 낯선 세계가 스며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조롱하여 멸시하거나 척결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때 음식은 가장 대표적인 조롱의 대상이다. 전라도 사람을 ‘홍어’라 비하하듯이. 혹은 혐오하는 대상이 먹지 않는 음식을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장난감 돼지를 들고 다니며 시위를 하는 것은 그나마 귀여운 수준이다. 독일 내에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있거나 모스크를 지을 예정인 많은 장소에는 최근 몇 달간 잘린 돼지고기들이 쌓였다” (『혐오 사회』, 153쪽)
손홍규의 소설 『이슬람 정육점』이 생각났다. “상처받은 사람을 놀리는 건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91쪽) 그렇다. 잔인한 능력이다. 대부분 입이, 혀가 그 능력을 발휘하는 잔인한 도구가 된다. 『이슬람 정육점』에는 고아인 화자 ‘나’를 입양한 터키 출신 무슬림이 등장한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한국에서 정육점을 하며 산다. 돼지고기를 썰지만, 그는 매일 기도를 하는 신자다. 무슬림을 신뢰하지 않던 동네 사람은 어느 날 배가 아프다면서 무슬림이 만진 돼지가 콜레라에 걸렸을 거라며 정육점에 와서 따진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너도나도 몸이 이상하다고 달려온다. 그에게 생고기를 뜯어서 먹어 보라고까지 한다. 그는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고 그저 가게 문을 닫았다.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며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낯선 인물에 대한 두려움 섞인 거부감이 제 몸을 아프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아짐 아짐자드, <빈자들의 라마단>, 1938년
소음보다 잔인한 인간의 매끈한 말이 세상을 짓밟기 쉽다. 나도 내 입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기에 늘 말이 두렵다. 그 입으로 아는 척을 하느니 내가 모르던 음식을 먹는 게 차라리 낫다. 그렇게 매번 입으로 “세계를 입양”하여 나의 피와 살을 구성하는 게 낫다. 내가 먹어보고, 만들 줄 아는 음식이 늘어날수록 나의 무지의 영역이 줄어든다. 오래전 히잡을 두른 모리타니 여성이 만들어 준 소고기가 들어간 스튜(?)를 처음 먹으며 마주 앉았을 때, 천장에 화려한 도자기가 잔뜩 걸린 튀니지 식당에서 처음 쿠스쿠스를 먹을 때, 처음 아프가니스탄 식당에서 벽에 걸린 기하학적인 그림을 보며 양고기 꼬치를 먹을 때, 내 안에서 단세포 세계는 다세포로 분열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북한 미사일 얘기부터 꺼내는 사람은 조금 피곤하다. 김정은과 카다피를 비교하며 아는 척을 하는 미국인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아는 이슬람에 대한 정보도 딱 저 정도겠구나. 눈을 마주하고 함께 앉아 인격적 소통을 해본 적 없이 피상적인 미디어의 정보만으로 어떤 세계를 접하면 가장 극단적 이미지만 수용할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북한과 이슬람 세계는 대부분 서구의 필터를 통해 걸러 나온다. 음악과 축구도 금지하는 극단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목숨 걸고 그 극단주의자들에 맞서는 이들도 역시 무슬림이다. 후자의 경우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함께 만두를 빚었던 레바논 친구는 그 후 파리 근교 어딘가에 사촌과 함께 레바논 음식점을 차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금 다시 그 친구를 만난다면, 쿠스쿠스에 토마토와 파프리카, 자색 양파를 섞고 민트와 레몬즙을 적당히 넣어 향긋한 타불레를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jijiopop
2017.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