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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저녁에 여는 개인 병원도 있는갑다.”
어머니는 김 부장에게 속삭이듯 말하고는 신기한 듯 의원 내부를 둘러보았다. 김 부장은 그를 알아보고 웃으며 눈인사를 건네는 조무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늘은 제가 아니라 어머니 진료 때문에 왔습니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가 일어서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에 피로해 보이는 얼굴. 몇 번째 보지만 늘상 같은 모습이다.
“잘 지내셨어요? 요즘 피로는 좀 나아지셨나요?”
“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선생님 덕분이죠. 담배도 끊었잖습니까?”
“스스로 하신 거죠. 저는 그저 조금 도와드렸을 뿐이고요.”
김 부장과 어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가 엷은 미소를 거두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어머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김 부장은 3개월 전, 그리고 어제오늘 이틀간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갑작스레 생긴 어머니의 증상과 종합병원에서 검사와 진료를 받았지만 특별한 문제를 찾지 못한 것에 관해. 김 부장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의사는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하듯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야기가 끝나자 그가 아닌 어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드님이 방금 이야기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실 텐데, 서울에 올라온 날의 일을 기억나는 부분까지만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글쎄요. 오전엔 교회에서 모임이 있었어요. 성가대를 하고 있거든요. 모임이 끝나고 교회 사람들하고 점심을 먹었지요. 집에 들렀다가 짐을 챙겨 나오기 전에 콜택시를 불렀는데 택시가 늦게 와서 좀 걱정이 되었어요. 예매해둔 버스 시간을 놓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터미널에 내려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가…, 요즘은 소변이 자주 마려워서 고속버스를 탈 때는 꼭 미리 들러야 해서요. 다행히 제시간에 버스를 타고 마음이 놓여 잠이 든 것 같은데, 그 다음엔 기억이 안 나네요.”
그녀는 앞에 앉은 의사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는지 잠시 머뭇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입가의 주름이 유난히 깊어 보였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이 나이가 되면 몸이 성치 않으니 나들이를 갈 때 준비해야 할 게 많지요. 평소 먹는 약만 해도 한 보따리인데 자주 탈이 나니 상비약도 챙겨야 하고 요즘은 버스 탈 때 어지럼증도 심해져서 멀미약도 붙여야 해요.”
“최근 평소 드시는 약에 변화가 있었나요?”
“혈압약은 먹은 지 오래되었고, 작년부터 당뇨기가 생겼다고 해서 약을 먹기 시작했어요. 또 뭐가 있나. 방광이 안 좋아서 먹는 비뇨기과 약이랑 관절약에다가…. 잠이 안 와서 가끔 수면제를 먹고 있어요. 하지만 다 이전부터 먹던 약들인데요.”
“서울 오기 전날에도 수면제를 드셨나요?”
“그랬지요. 잠을 설치면 다음 날 정신을 못 차려요. 집에서야 괜찮지만 서울까지 와서 골골거리면 안 되잖우.”
김 부장은 어머니가 먹는 약의 종류와 그 양에 새삼 놀랐다. 혈압약 한두 가지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동안 어머니 건강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서울에 올 때 멀미약은 항상 준비하시나 봐요.”
“예전엔 그래도 참을 만 했는데. 올봄에 성가대 교우들과 부산 여행을 갔었는데 멀미로 첫날 하루 종일 누워 있었어요. 같이 간 사람들한테도 폐가 되잖아요. 서울에 올라와서 아들 집에 드러누우면 안되니까, 이번엔 미리 챙겼지요.”
김 부장은 어머니가 평소 먹던 약이 정신 상태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왜 의사가 기억력에 대해 묻거나 검사를 하지 않고 다른 질문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선생님, 어머니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어머님에겐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없다니요?” 김 부장은 당황스런 말투로 되물었다.
“적어도 걱정하시는 치매는 아닐 겁니다. 증상이 갑작스럽게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 특정 상황에서만 생기는 것도 치매와는 달라요. 어머님의 문제는 치매보다는 일시적인 섬망 증상에 가깝습니다.”
김 부장은 일단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섬망이란 단어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섬망이 생기면 장소나 시간에 대한 개념에 혼동을 일으키고 불안과 초조 증상을 보이게 됩니다. 밤낮이 바뀌는 것도 흔하구요. 어머님이 보였던 증상과 비슷해요. 심하면 환각이나 환청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알코올 중독의 금단 증상으로도 알려져 있지요.”
차분했던 말투가 순간 거칠어졌다. 의사는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쉰 뒤 설명을 이어갔다.
“특별한 문제가 없던 사람도 큰 수술을 마치고 입원 중에 생기는 경우가 있고, 약 부작용으로도 생길 수 있어요. 특히 어르신들은 체내에서 약을 분해하는 기능이 떨어져서 부작용이 잘 생기는 데다가 여러 가지 약을 함께 먹는 경우 약들이 서로 영향을 줘서 부작용이 더 쉽게 생깁니다.”
“그럼 어머님은 무슨 약 때문에?”
“다음에 서울 오실 때는 멀미약을 붙이지 마세요.”
예상치 못했던 말에 김 부장과 어머니는 눈만 끔벅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멀미약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안전한 약이지만 드물게는 어머님 경우와 같은 문제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확실치 않지만 전날 드신 수면제도 영향을 주었을 수 있겠어요. 수면제의 효과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부작용이 더 생길 수 있거든요.”
낚시를 좋아하는 김 부장도 배를 타기 전에는 항상 멀미약을 붙였다. 해외 출장을 갈 때는 시차 때문에 비행 전 습관처럼 수면제를 먹곤 했다. 흔히 사용하는 약이 이런 공포스러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니. 자신에게도 생길 수 있는 문제였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다음에 서울 오시면 아드님과 병원에 한 번 더 들르세요. 멀미약을 꼭 써야 한다면 용량이 낮은 소아용을 쓰시는 게 좋겠어요. 전날 수면제는 드시지 마시구요.”
“아뇨. 이제 절대 안 붙일래요. 그냥 기차 타면 되지요.”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만 진료실 안의 사람들 모두가 웃고 말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김 부장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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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국소비자보호원에서 발표한 ‘붙이는 멀미약’의 부작용 사례에는 기억장애나 이상행동 증상이 포함되었다. 지금도 이 약의 부작용을 검색하면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멀미약의 주 성분인 스코폴라민은 부교감신경 작용을 억제해 시야장애, 입 마름 등의 증상을 유발할 수 있으며 드물게는 일시적인 기억장애와 착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고려해 식약처는 해당 약제의 복약지도를 강화할 것을 요청했으며, 2013년부터 소아용 제품을 전문의약품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멀미약으로 인한 위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 사례는 드문 일이지만, 약물로 인한 부작용은 매우 흔한 문제다. 약물 부작용은 특히 노인에서 더 흔한데, 약물 관련 문제로 입원한 사례가 일반 성인의 세 배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인들에게 약물 부작용이 흔한 이유는 일단 약물에 대한 대사와 배설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이지만, 여러 가지 약을 함께 복용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동시에 두 가지 약물을 복용하게 되면 약물 부작용의 위험도가 13퍼센트 증가하고 네 가지 약물을 복용하면 38퍼센트, 일곱 가지 약물을 복용하면 82퍼센트까지 높아진다. 만성 질환이 많은 노인은 여러 약제를 함께 복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환자 표본자료(2010-2011년)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외래 환자 열 명 중 여덟 명 이상이 6개 이상의 약을 처방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약제 복용과 그로 인한 부작용 문제는 일차 의원부터 대학병원까지 쉽게 병원을 옮겨다닐 수 있는 의료 환경과도 관련이 있다. 여러 병원을 이용하는 경우 문제가 되는 약을 함께 복용할 위험이 필연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환자의 건강 문제나 복용 중인 약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의사에게 일차적인 진료를 받는다면 이러한 위험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 환자일수록 지속적인 진료를 담당하는 주치의가 필요한 이유다. 한림의대 윤종률 교수는 ‘노인의료 관련 정책수립에서 고려해야 할 노인의료의 특성’ 기고문에서 우리나라 노인들의 다약제 복용은 노인의학 전문의나 주치의가 부재한 현실과 개별 질병중심의 전문의료만을 강조하는 의료체계로 인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 윤종률. <노인의료 관련 정책 수립에서 고려해야 할 노인 의료의 특성>, HIRA 정책동향 제10권 3호, 2016.
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