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최영건, 오른쪽 최진영
지난 7월 25일,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최진영x최영건 작가와의 만남’ 행사가 열렸다. 최영건 작가는 지난 4월 첫 장편 소설인 『공기 도미노』를, 최진영 작가는 지난 6월에 2년 만에 장편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를 펴냈다. 이날 강연은 ‘우리가 믿는 감정들’이란 주제로 허희 평론가가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다. 허희 평론가는 두 작가의 근황을 물으며 시작했다.
허희: 두 분께서 올해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최영건 작가님은 동인문학상 후보에도 오르셔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후보에 오르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최영건: 그럴 리는 없고요. 이 질문도 뭐라고 답하든 다 예상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좋습니다. 굉장히 좋고요. (웃음) 굉장히 좋고 기쁘고 감사하고 불안하고, 불안은 언제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 때문에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허희: 최진영 작가님은 최영건 작가님에 비하면 책을 많이 내셨잖아요. 책을 내고 어떻게 지내셨나요?
최진영: 이 책의 실질적인 마감이 작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어요. 그때 저는 얘랑 처음으로 한 번 헤어졌어요. 그런데 작품 선공개가 있어서 3월과 5월에 마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못 헤어지고 6개월 동안 만나고 있어요. 책이 나왔으니 이런 행사들이 끝나면 정말 헤어지겠지요.
허희: 단독 북토크는 아니고 함께하는 북토크입니다. 이 제안을 들으셨을 때 느낌이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최영건: 솔직히 말해서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비교당할 것 같고, 앉아계신 모든 분이 최진영 선생님 팬일 것 같고…… 하지만 제가 또 그걸 거부할 배짱은 없어서, 얌전히 순종했습니다.
최진영: 제가 평소에 생각이란 걸 안 해요. 그냥 그런 게 있구나, 하고 넘어가는 게 99%거든요. 이런 북토크를 할 거라고 해서 ‘네, 그런가요’하고 넘어갔습니다. (웃음) 저는 심지어 책이 나왔다고 할 때다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때가 많아서요.
부탁과 명령 사이, 복자와 연주
허희: 먼저 『공기 도미노』 인물들에 대해 여쭤보려고 해요. 많은 분이 지적하고 있지만, 인물들이 다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연결되어 있죠. 그런 부분이 『공기 도미노』라는 표제로 함축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최영건: 원래 좀 인물이 많이 나오는 걸 좋아하는 편인 거 같아요. 이런 취향이 생긴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웃음) 저는 인물보다는 인물이 아닌 흐름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흐름을 그리는데 필요했던 게 인물이고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인물을 가볍게 여기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인물 하나하나를 생동감 있게 그리겠다는 욕망과 동시에 흐름을 그리겠다는 욕망에서 인물들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최진영: 저 질문해도 되나요? 그러면 가장 먼저 만들어낸 인물이 누구인가요?
최영건: 그게 제가 방금 드린 답변이랑 관련이 될 것 같은데, 어떤 인물 하나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여러 인물들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흐름에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가장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흐름이지, 개인은 아니었습니다.
허희: 30대의 연주라는 인물, 그녀의 할머니인 복자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겠는데요. 그 이유 중 하나가 1장의 연주가 할머니의 명령으로 현석이라는 인물의 집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가족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연주는 안절부절못하면서 그곳에서 앉아 있고, 그런 불안한 상황이 1장에서 그려집니다.
연주라는 인물이 좀 더 적극적인 인물이었다면 그 불편한 장소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그걸 묵묵히 참아냅니다. 연주라는 캐릭터가 조금 답답했고, ‘어째서 할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왜 마치 할머니라는 절대적인 인물에 의해 규정되는 인물처럼 그려지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최영건: 할머니의 명령이란 단어가 쓰셨는데, 사실은 그건 부탁이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부탁과 명령이 서로 비슷해지기 너무 쉬운 것 같아요. 부탁이 명령처럼 다가오거나 부탁의 방식이 명령이 되기도 너무 쉽죠. 연주는 누군가에게 명령이라는 느낌을 줄 만큼 강하게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인물이에요. 연주와 다르게 자기 의사를 관철하는 할머니와 살고 있어서, 혹은 연주가 원래 그런 인물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죠. 연주의 성격에 대해 인과관계를 뚜렷하게 설명하는 것은 제가 이 소설을 쓴 방식과 위배되는 것 같아요.
연주가 답답한 사람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복자 이상으로 굉장히 완고하고 자기 생각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기 것을 훼손당하지 않으려고 해요. 연주는 어떤 상황 속에서 작은 침해들을 받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자기 태도를 크게 바꾼 적이 없죠. 자기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변형된다는 것이고 그거야말로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종류의 훼손이라고 생각 해요. 연주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끝까지 완고하게 그걸 지키다가 자기 것을 바꿔야 하는 최후의 순간, 불안,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때야 바뀌거나 끝장이 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런 인물 같아요. 근데 거기서 끝장이 나버리는 거죠.
허희: 피상적으로는 연주가 가장 많이 희생하다가 안타깝게 세상과 절연한 인물로 보이기도 하는데, ‘연주가 가장 완고한 인물이다’는 작가님의 의견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저는 작가님이 말씀한 ‘흐름’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도미노는 한 번 앞에서 힘을 가하면 다채로운 무늬를 형성하잖아요. 게다가 마지막에는 멀리서 보았을 때 새로운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냅니다. 『공기 도미노』라는 작품 역시 아주 작은 힘에 일어난 파장 때문에 여러 변형이 생기고 계속 변해가는 과정이 일어나요. 이 과정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등장인물의 행동들이 빚어내는 모습을 보며 『공기 도미노』라는 제목이 절묘하다고 생각했어요.
극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사랑, 도리와 지나
허희: 『해가 지는 곳으로』의 두 인물, 도리와 지나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도리는 자기 동생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인물이죠. 작은 주머니칼을 가지고 다니면서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면 맹렬한 공격성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외롭게 지내는 이 소녀가 지나에게는 따뜻하게 마음을 열어요. 저는 그게 지나라는 인물이 가진 특이한 매력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건지라는 외톨이 소년도 지나에 의해서 같이 탑차를 타고 러시아로 오게 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 소설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지나의 매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리와 지나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최진영: 쓸 때는 잘 몰라요. 쓸 때는 쓰고 싶은 대로 쓰는데 이렇게 해석을 해주시면 아 맞네, 하기도 해요. (웃음) 지나는 그런 매력이 있네, 하고. 일단 쓸 때는 도리와 지나의 관계를 그렇게 정하고 시작을 했어요.
우리가 살다 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잖아요. 쓰다 보니 지나가 그렇게 그려진 것 같아요. 모든 사람에게 내 마음을 오픈하지 않지만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도 되겠다 싶은 사람은 있잖아요. 그런 극한 상황에서 지나가 그런 인물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일단 두 사람(지나와 도리)이 사랑을 해야 또 이야기가 진행이 되니까. (웃음)
허희: 두 사람이 사랑을 해야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런 면에서 건지가 안타깝기도 해요. 이 소년이 좀 극성맞은 캐릭터면 약간 좀 나쁘게 변할 수도 있는데, 지나와 도리와의 사랑을 순순히 받아들이거든요. 건지를 보면 이 소설에서 나쁜 캐릭터, 악인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나오긴 하지만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선한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보여요.
최진영: 작정하고 그렇게 썼어요. 지금까지 제가 쓴 소설에도 독한 인물은 있었지만 마음이 악한 인물은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현실의 사랑에는 많은 부분이 있고, 어떤 사랑은 사람들을 많이 힘들게 하기도 하고 나쁜 점도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주요 인물들의 사랑을 통해 좋은 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허희: 작가님은 독한 캐릭터를 말씀하셨는데, 작가님이 오히려 독한 마음으로 캐릭터를 극한 상황에 몰아넣어 좋은 이야기를 쓰신 것 같습니다. (웃음) 그래서 그곳에서 피어난 사랑이 더 극적으로 보입니다.
재난보다 더 재난 같은 일상
허희: 이 작품에서는 ‘재난 이전의 상황이 더 재난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던 류와 단, 그리고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건지의 삶을 보면 오히려 재난 이전 상황이 더 끔찍하기도 합니다. 작가님도 일부러 이 점을 강조하신 건가요?
최진영: 처음에 소설을 구상할 때는 단순하게 두 젊은 여자가 끊임없이 달려나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러시아가 들어왔고, 여기에 재난이 더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지금의 설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최대한 배제하고 원래 말하려던 ‘사랑’에 집중하여 하고 싶은 말을 주로 썼어요. 그래도 소설에 비추어 현재의 우리 삶은 어떤가 고민해주시고 주목해주셔서 감사해요. (웃음)
허희: 이 소설을 보면 재난이 일어나서 행복한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지라는 인물이 학교에 안 가도 되고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불행하다는 말을 했을 때 무릎을 탁 쳤거든요.
최진영: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아무렇지 않게 ‘전쟁이라도 나면 좋겠다’ 라고 해맑게 이야기해요. 그게 농담처럼 안 들렸어요. 심지어 대학생 때도 전쟁이라도 나면 좋겠다, 세상 망하면 좋겠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런 걸 보면서 많은 걸 느껴서 이런 글이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자유라는 착각에 빠지다, 문과 성준
허희: 『공기 도미노』에 나오는 인물들은 도미노가 넘어가듯 연쇄적으로 관계를 맺어나가는데요. 이 연쇄에서 벗어나는 느낌을 주는 캐릭터가 바로 2장에 나오는 문과 성준입니다. 『공기 도미노』의 인물들이 상황 탓이든 성격 탓이든 자기 내부에 갇혀 있는 느낌을 준다면, 이 둘은 그렇지 않습니다. 카페에서 창문을 넘어 탈출하는 장면에서 이 둘이 유일하게 상황으로부터 탈출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작가님께서는 이를 완전한 탈출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라 서술하시는데요.
오늘 그는 연주 혹은 다른 누군가를 좀 더 불행하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한편으로 그건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달아났고 자유롭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 『공기 도미노』, 74쪽
이렇게 착각이라는 말을 넣어 완벽한 탈출이 아님을 꼬집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캐릭터들이 『공기 도미노』에서 중요한 인물로 보입니다.
최영건: 가장 자유로운 순간에도 전혀 자유롭지 않은 감정이나 상태, 즉 부자유가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물을 마시면서 갈증이 해소된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물잔을 던져 깨버리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욕망이 조금은, 조금은 공존한다고 항상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자유롭다는 착각’이라 쓴 건 어떤 상태가 자유라는 규정이 착각이라는 말로 표현 될 만한, 아주 옳지는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유롭다는 착각’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많은 분이 도미노가 넘어가듯 흐름이 연결되는 소설이라고 읽어주셨는데요. 사실 제 의도는 과연 어떤 인과나 흐름 자체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었어요. 이 의문을 담기 위해 작위적이거나 인과가 허술해 보이는 부분도 있어요. 문과 성준이 갑자기 등장하여 홀연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특별해 보일 수도 있는데요. 이는 『공기 도미노』가 ‘작품 속 인물들이 서로 같은 흐름으로 연결되는가?’라는 의문 자체를 표현하고 있고, 문과 성준이 이를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대부분 인물이 자신에게 닥쳐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들을 반복하고, 그 선택들이 조금씩 어긋나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오기도 해요. 그러나 문과 성준은 사실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자기에게 주어진 것 이상을 침범하는 행위에서 출발한 인물이에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른 인물과 다르게 (인과에서) 발을 빼고 도망가는 모습으로 비친 것 같아요.
우리도 타인에게 손을 내밀거나 나쁜 짓을 하면서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행동을 해요. 사실 거기서 빠져나오는 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쉽다고 생각해요. 원래 자기 자리도 아니었고. 그래서 문과 성준이 더 빠져나오기 쉬웠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저에게 중요해요
나는 서두르는 쪽이었다. 먹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구석에 숨었다. 데울 수 없으면 그냥 먹었다. 최대한 빨리 먹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허기를 잠시라도 지워 버리는 것. 내가 먹는 이유는 그뿐이었다. 지나는 다른 이유를 생각했다.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이번이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럼 감자 한 알을 먹더라도 제대로 먹고 싶어지니까.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한 끼 한 끼가 소중하다면,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중략)
지나를 닮고 싶었다.
지나처럼 먹고 마시고 걸으려고 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눈앞의 것을 최대한 보고 느끼고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지나가 아니고, 지나는 고유하고, 우리는 달랐다.
- 『해가 지는 곳으로』, 54-55쪽
허희: “나는 지나가 아니고, 지나는 고유하고, 우리는 달랐다”라는 부분을 ‘그렇기 때문에 지나를 사랑할 수박에 없었다’고 읽었어요. 작가님은 『구의 증명』에서도 그러셨듯이, 『해가 지는 곳으로』에서 사랑에 대해 많이 강조하고 계시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최진영: 사랑이 저에게 중요해요. 어느 순간부터 이제 쓰고 싶은 걸 쓰자는 생각을 했어요. 이전에 쓰기 싫은 내용을 억지로 쓴 적은 없지만, 사랑이야기가 워낙 흔한 소재라서 오히려 꺼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꺼리고 싶지 않았어요. ‘너무 흔하고, 촌스럽고, 가볍다는 편견에 휘둘릴 필요가 있을까? 나에게 이건 정말 중요한 가치이고 이걸 쓰면 진심으로 만족해하며 쓸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해서 『해가 지는 곳으로』에서도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썼어요.
허희: 작가님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사랑의 범주가 굉장히 넓어 보여요. 단순히 타인에 대한 애정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다채로운 감정이 보이는데요. 류와 단이라는 인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얘기하는데 작가님은 어떤 인터뷰에서 그것마저도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의 관계가 사랑이 되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최진영: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친구들의 힘든 얘기를 듣다 보면 ‘그렇지만 사랑하잖아’라는 생각을 해요. 생활적인 필요와 바쁨 속에서 지내며 서로에게 무심해진다고 해서, 이들의 사랑이 열정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의 범주에 벗어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는 범주 안에서는 그마저도 사랑이거든요. 사랑이 아니면 그들의 불평불만도 생겨나지 않않아요.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어요.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면서 ‘너무 그렇지는 않아’하고 말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느낌 같아요.
허희: 『공기 도미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혐오’라는 감정입니다. 자기 혐오, 혹은 타인에 대한 혐오요. 소현과 원균은 사이가 나쁘죠. 원균이 바람이 피웠고, 그 사실을 소현이 눈치 채서 이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혐오라는 키워드로 『공기 도미노』을 읽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영건: 어떻게 얽어주셔도 감사하지만, 혐오라고 하면 조금 무서워요. 내가 그런 무서운 감정에 대한 책을 썼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혐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섭기는 하지만 제가 소설에 혐오라는 말을 너무 많이 써놨기 때문에 부정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허희: 그런데 그 무서운 감정을 소설에 쓰셨잖아요. 어떤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통해 발현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무서움을 무릅쓰고 쓰셨던 근원적인 이유를 물어보고 싶습니다.
최영건: 근원적일 것도 없이, 이 세상에 혐오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혐오라는 단어에 빠져 있거나 제 속에 혐오가 가득한 건 아니고요. (웃음) 소설에서 일상적인 행위나 감정에서 서서히 고조되는 과정을 그리다 보니 혐오라는 감정이 유독 두드러지기도 했어요. 또 강한 의지로 상황을 끌고 나가는 모습을 그리려다 보니 강한 의지들이 서로 부딪칠 때 생기는 충돌에서 자연스럽게 혐오가 두드러져 보인 것 같습니다.
최진영 작가의 ‘악인’과 『공기 도미노』의 ‘사랑’
허희: 최진영 작가님과 아까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그렇다면 혐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작가님의 작품에는 혐오라는 감정을 두드러지게 찾아볼 수는 없거든요. 『해가 지는 곳으로』에 나오는 악인도 상황에 의해 그렇게 되어버린 사람들로 보여서 악인이라 느끼고 혐오감을 느끼기는 좀 어려웠어요. 작가님은 이 혐오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최진영: 오로지 나쁜 사람은 없고, 악인에게도 나빠질 무언가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전 소설에서도 누가 나를 얼마나 괴롭게 하던 그에게는 그의 사정이 있다는 식으로 썼어요. 하지만 나를 나쁘게 대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죠. 그렇지만 그가 순수하게 악인이라서 그런 건 아니라는 분명한 생각이 저에겐 있어요.
제가 순수한 악인을 그리지 않는 이유는 제가 쓰기 힘들기 때문이에요. 저는 쓰기 힘들면 쓰지 않아요.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쓰고 싶지 않은 것을 작품을 위해 쓴다고 감정을 혹사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은 독자분들이 읽어주시겠지, 하고 넘어가 버려요. (최영건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서우니까요.
허희: 『공기 도미노』에서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연주와 그녀의 남자친구인 경식은 서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복자와 현석도 마찬가지죠. 최영건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이들의 사랑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최영건: 사랑은 관계의 일종이에요. 이들은 관계를, 서로 섹스를 하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공기 도미노』에서는 최진영 선생님 소설에 나오는 정신적인 결합,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보다는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생성된 관계를 맺는 인물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연주와 경식은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이상하고 달콤한 같은 게 결여된 관계 같은 걸 하고 있죠.
현석과 복자는 조금 달라서 말하기 더 어렵네요. 최진영 선생님이 쓰신 형태는 아니더라도 사실 다 사랑이라고 생각은 해요. 사랑도 관계의 하나이지만 동시에 사랑은 다양한 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상태라고도 생각해요.
최진영: 사실 그것도 사랑은 사랑이죠. 오히려 여기(『해가 지는 곳으로』)에 나오는 사랑들이 훨씬 더 보기 힘들죠.
최진영x최영건 작가가 믿는 감정들
허희: 오늘 북토크의 주제가 “우리가 믿는 감정들”입니다. 사실 감정은 ‘느낀다’로 표현하지 ‘믿는다’고 말하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편집자분께선 ‘우리가 믿는 감정들’로 두 작가님의 작품을 묶을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두 작가님은 어떤 감정을 느낀다기보다 믿고 싶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최진영: 사랑을 믿고 싶죠.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중 제일은 사랑이니까요. (웃음) 사랑이 있으면 믿음과 소망이 생긴다고 봐요.
사랑은 굉장히 불투명하고, ‘그런 건 없어’라고 하면 없어지는 감정이죠. 사랑을 분해하면 지배욕, 소유욕, 성욕, 그런 것들로 나뉘는데, 여기에 예쁜 이름을 붙이면 그게 사랑이죠. 그래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 젊은 두 남녀의 사랑도 다른 이름을 붙여버리면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랑이라고 하면 약간 꺼림칙해도 사랑으로 보입니다.
사랑이라는 게 믿어야 생기는, 그만큼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살아가면서 어떤 감정 하나를 믿어야 한다면 사랑을 믿고 싶어요. 사랑을 부정하는 순간이 최대한 늦게 오면 좋겠어요.
최영건: 최진영 선생님 소설을 읽으면서 저랑 사랑에 대해 그리는 방식이 너무 달라서 어려웠어요. 이런 믿음, 사랑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정말 좋아! 라고 생각하며 읽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언젠가 부정하는 순간이 온다고 말씀하시니까 조금 섭섭하네요.
최진영: 언젠가 이 세상은 망하고 인간은 사라질 거라 생각해요. 인류가 신도 아니고, 언제까지고 이 지구에 남아 있겠어요. 언젠가 망하더라도, 우리가 조금 노력을 해서 천천히 망해갔으면, 언젠가 죽을 거지만 조금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이 모든 감정에 대해 내가 나를 배신하는 순간도 올 거에요. ‘너 바보 같이 그때 왜 그런 걸 믿었니’ 라고 미래의 제가 저를 지적하는 순간이 최대한 늦게 왔으면 좋겠어요. 일단은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어요.
최영건: 『공기 도미노』에서 ‘어떤 인과나 흐름이 있는가?’라는 이야기를 썼지만, 그런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요. 그러니까 현실에서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을 다 알고 싶고, 믿고 싶다는 게 있는 것 같아요.
-
공기 도미노 최영건 저 | 민음사
『공기 도미노』는 서로 다른 세대, 서로 다른 계층, 서로 다른 성별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불화와 반목을 세밀화처럼 근접한 시선으로 관찰하는 작품이다.
-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저 | 민음사
타인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고, 모든 감정이 죽어 버렸다고 생각한 세계에 나직하게 울리는 사랑의 전조. 재앙의 한복판에서도 꺼지지 않는 두 여자의 로맨스가 시작된다.
한재현(예스24 대학생 리포터)
81231004
2017.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