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결론의 결들을 따라 이리저리 이지러지는
감각과 인식이 자연스럽고도 절묘하게 연결되며 확장되는 이 결론 없는, 결론이 찢어진 세계는 그 찢어진 결들을 따라 이리저리 이지러지며, 전에 없던 세계를 향해 너무나도 가볍게, 너무나도 멀리 날아가는 것이다.
글ㆍ사진 황인찬(시인)
201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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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5월호 시집.jpg

 

지면에서 안미린 시인의 시를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정말 이상한 시라고 생각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멀고도 가까운, 시어와 시어가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그런 시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통과한 길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뒤돌아보게 되는, 그런 멀고도 이상한 나라로 이어지는 시. 내게 있어 이상한 시란 더없이 좋은 시란 말인데, 안미린 시인의 시가 그랬다.

 

복제되고 다음 날 같다
가가 다에게 고백을 했다
전생에 나는 너를 잡아먹은 적이 있어
나는 외계인이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어?
어른이었어,
여자애라면 머리를 돌돌 말아 고정시켰지

 

(중략)

 

여름의 정글짐
겨울의 정글짐
물을 먹지 않고 마시는 감각과
씨앗 근처의 눈부신 맛
팔을 벌려 납작해지며 벽을 안아 봤던 날
나도 몰래 홀수로 얼음이 얼고
무수해졌어
자기 이외의 생명?
자기 이외의 생명,
메롱하는 것
- 「라의 경우」 부분

 

복제된 다음 날이란 무슨 날일까. 어제의 나와 전혀 다름없는데도, 무엇인가 본질적인 부분이 다르다는 것, ‘나’이면서 ‘나’와 어딘가 일치하지 못하는 것. 바로 거기서 안미린 시인의 시는 시작된다. ‘나’에 대해 말하면서 ‘가’와 ‘다’가 등장하는 이 세계에서, ‘나’란 1인칭인지 3인칭인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아니었어’와 ‘아니었어?’의 반복, 그리고 그 반복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차이 사이에서 안미린 시인의 시는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름의 정글짐’과 ‘겨울의 정글짐’처럼 같으면서 다른 것에 대하여, 같으면서도 다른 그 많은 ‘자기 이외의 생명’에 대하여 물음표를 붙이고 반문하며 “메롱”하고 혀를 내미는 귀엽고도 능청스러운 태도 같은 것이 시의 문장과 문장 사이를 더욱 벌린다. 그러므로 안미린 시인의 시는 하나의 시 안에서 하나의 시어가 같은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에서 나와 다를 경유하는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그로부터 어긋남으로써 ‘라’에 도달하는 시, 그렇게 함으로써 ‘나’로부터 살짝 비틀어진 ‘라’(신의 이름)에 도달하는 이상한 경우의 세계. 이 기민하고도 자유로운 미끄러짐이 안미린 시인의 시가 만들어내는 경이의 지점이다.

 

미래의 약도가 은박지라면
박쥐로 접어놓은 은박지라면
신의 그림자는 은박지의 뒷면이겠지

 

아랫집 아이가 아래로 이사를 하면
거울 접시를 천장처럼 믿고 싶어져
아랫집 아이보다 아래로 이사를 하고
낮은 미로를 깊이처럼 풀어 두었어

 

네가 방에 없을 때 내 방의 불을 켤까
지도 위로 비스듬한 자세들을 불러 모을까
지도를 구길 때마다 지름이 생길 테니까
입술을 깨물 때마다 층계가 생길 테니까

 

(중략)

 

세계가 미지의 차원처럼 구겨졌을 때
미래에서 멀어지는 약도를 완성한다면
어서 와!
앞으로 우리가 만날 장소가 바로 흉터야
- 「초대장 박쥐」

 

시인의 치밀하고도 발랄한 은유의 구조가 빛나는 시다. 은박지->박쥐로 연결되는 말놀이와 어린 시절 은박지로 만들곤 하던 이런저런 종이 접기들이 겹쳐져 시인은 숨겨진 세계로 통하는 지도이자 초대장인 흉터를 발명해낸다. 무엇인가를 감싸는 물건, 즉 표면이면서 결국 버려지는 것인 은박지의 뒷면으로부터 숨겨진 세계를 발견하는 시인의 눈은, 점차 확장되어 이 세계 전체의 이면을 발견해낸다.

 

표면과 뒷면에 대해 말하던 시는 바로 이어져 위와 아래에 대해 말한다. 아랫집 사는 아이가 아래로 이사를 하여 아래가 깊어지면, 빛나는 접시에 비친 천장을 천장이라 믿게 되는 묘한 역전을 믿게 되고, 그로부터 낮은 미로가 출발한다는 발상, 그렇게 함으로써 위와 아래가 바뀌는 세계가 그려지는 것이다. 이처럼 안과 밖이, 정과 부정이 뒤얽히며 만들어지는 ‘구김’과 ‘깨물림’이 숨겨진 세계로 통하는 ‘층계’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그 구김과 깨문 자국이 만들어내는 흉터가 숨겨진 세계의 지도가 되고,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는 새로운 지평이 된다.

 

감각과 인식이 자연스럽고도 절묘하게 연결되며 확장되는 이 결론 없는, 결론이 찢어진 세계는 그 찢어진 결들을 따라 이리저리 이지러지며, 전에 없던 세계를 향해 너무나도 가볍게, 너무나도 멀리 날아가는 것이다. 내게는 이 놀랍고도 기민한 전복과 뛰어넘기의 세계가 놀랍고 아름답다. 천부적인 감각을 따라 움직이는 듯한 이 시인의 세계가 내게는 그저 부러울 따름인 것이다. 그저 내 깜냥이 부족한 탓에, 시인의 자유로운 감각의 논리를 관념에 치우친 말들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안미린 저 | 민음사
2012년 계간지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안미린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이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안미린 시인은 “비스듬한 차이들과 유사성에 대해 사유하는“ 시, ”부드럽게 거칠고 거칠게 부드러운“ 시, ”과감하게 생략하고 비약하고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어법 그 자체“라는 호평을 받으며 「라의 경우」 외 9편의 시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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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시인)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