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문장(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 한때는 톰을 사랑한 적도 있었어. 그렇지만 당신 역시 사랑했어."
『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저, 김영하 역/ 문학동네 167쪽
1.
우리 말 중에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끌리는 꾸밈씨들이 있는데 ‘도도하다’도 그 중 하나다. 사전적 의미로는 ‘거만하다’와 같은 부정적 느낌으로 풀이되지만 생활의 용례에서는 ‘시크하다’처럼 밉지 않을 만큼의 당당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한다. 도도한 고양이를 상상하면 그 품새가 더 잘 그려지는데 비굴하지 않고, 자존감 충만한 것이 섹시하게까지 느껴진다.
소설 속에서 도도한 여자 캐릭터를 찾는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겠지만 또 한 명을 꼽는다면 『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데이지다. 엄밀히 말해 데이지는 도도함 보다는 한국에서 희화되는 ‘OO녀’에 가까울 정도로 사치와 허영, 변덕과 자기과시가 강한 여자겠으나 소설 거의 후반부의 한 장면으로 데이지는 도도녀가 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2013년 ‘바즈 루어만’의 영화에서는 캐리 멀리건이 데이지 역할을 맡았다.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를 말하기 전에 우선 간단히 『위대한 개츠비』를 정리하자.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개츠비는 그러나 늘 상류사회 진입을 꿈꾸며 우연한 기회를 잡아 이를 실현한다. 그는 상류층 여인 데이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의 신분이 영원히 상승할 것을 기대했으나 데이지는 귀족 출신 톰에게 홀랑 시집가버린다.
5년 동안 오매불망 데이지를 그리워하던 개츠비는 으리으리한 저택을 지어놓고 데이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밤이면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연다. 개츠비의 집은 누구나 가보고 싶은 그 동네 핫플레이스가 된다. 바다 건너 살면서 그 집을 늘 동경했던 데이지는 그 집을 방문하고, 그 곳이 다름 아닌 옛 애인의 집이라는 것에 대해 로또 맞은 듯한 충격에 빠지고, 옷장의 고급 셔츠들을 보며 눈물의 호들갑을 떨다가, 개츠비의 속삭임을 듣는다. “ 좋아? 그럼 가출해, 내게로 오면 이 저택은 네 거야.”
그러나 톰이 자기 아내를 빼앗길 만큼의 호구일 리가 없다. 개츠비를 뒷조사한 후 그의 구린 과거로 엿 한 방 크게 먹일 순간을 기다리고, 소설과 영화 공히 가장 긴박한 장면인 뉴욕 플라자 호텔의 스위트룸 사건을 맞이한다. 더위를 피해 하루의 집단 피서를 떠난 그 호텔방에서, 개츠비와 톰은 데이지 쟁탈 빅매치를 벌인다.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지금 남편을 향해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라 하고, 이의 반격으로 톰은 준비했던 개츠비의 학력위조, 냄새나는 직업 등을 폭로한다.
이제는 데이지가 자신의 속마음을 밝힐 때이다. 옛날 애인인 개츠비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지금 남편인 톰을 사랑하는지 그녀의 선택이 남은 시간. 이리갈까 저리갈까 고뇌하다 결국 흐느끼며 개츠비에게 말한다. " 한때는 톰을 사랑한 적도 있었어. 그렇지만 당신 역시 사랑했어."
오오, 요런 불여시 데이지, 과거형으로 싹 말하며 두 남자에게 계속 희망고문을 하고 있으니. 그러나 나는 이 장면에서 매력이든, 미모든, 그것이 무엇이든, 믿는 구석이 있으니 선택의 결정적 순간에서도 저런 밀당력을 보이는 데이지에게 영악한 도도함을 본다. 데이지가 톰을 선택하든, 개츠비를 선택하든, 혹은 둘 다 포기하고 혼자 플라자 호텔방을 나가든, 그 모든 데이지의 선택은 그녀가 보인 눈물과 고민, 욕망 속에서 정당화된다. 다만 그녀는 끝까지 도도했기에, 남자들은 그녀를 쉽게 대하지 못했고, 개츠비 역시 파멸을 하면서 까지 ‘위대한’의 수식어를 붙일 만큼의 격정적 사랑을 데이지에게 보여준 것일 테다. 아무튼, 데이지 win!
2.
대선의 시국에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린 것은, 유권자에게 표를 호소하는 후보들의 모습이 데이지를 사이에 두고 애정다툼을 벌이던 호텔 방 두 남자의 모습과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촛불과 탄핵에서 이어진 조기 대선 때문인지 사람들의 관심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선거의 과정과 결과에 몰입돼있는 것 같다. 친한 사람들은 만나면 노골적으로 누구를 찍을 것인지를 묻고 덜 친한 사람끼리는 상대가 누구를 지지할지 염탐한다. 택시를 타면 택시 기사가 승객의 정치적 성향을 눈치보고 승객은 기사의 한 마디에 촉각을 세운다.
나 역시 후보들의 TV 토론을 꼬박꼬박 챙겨봤다. 내 색시 고르는 마음으로, 호감 가는 후보는 매의 눈으로 보려했고, 비호감 후보라도 장점을 찾아보려 했다. 이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아니 후보들의 공약 하나를 꼼꼼히 챙겨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내 편이 아니면 적(敵)이었다. 내 첫 대선은, 유시민 씨의 표현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해서 투표권을 시민에게 돌려놨더니, '시민'이라는 사람들은 투표장에 가서 노태우를 뽑았다. 그 다음 대선은 삼당야합한 이가 대통령이 됐다. 청산되지 않는 과거와 쓰레기처럼 구겨진 미래를 원통해하며, 이십대의 나와 친구들은, 선거권을 막걸리와 바꿔먹은 어른들을 저주했고, 늙은이들에게는 투표권을 반만 줘야 한다고 푸념 했다가, 더 술이 취했을 때 누군가는 “마흔 넘으면 다 죽어야 해, 그래야 민주화가 돼”라며 울부짖었다.
그 말대로라면 죽었어도 10년 전에는 죽었어야 했을 내가, 또 한 번의 대선 투표를 앞두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씨를 대통령으로 만든 1등 공신이 50대 라는 분석이 있었는데, 이제 내가 그 50대가 되었다. 언론에서 세대별 분석을 할 때 내 나이는 자연스럽게 보수 진영으로 분류가 된다. 시청 앞 태극기 화면이 자막 위를 덮는다. 그럴 때는 뭔가 좀 억울하기도 하고 나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 억울함과 눈치 보임의 정체를 표현하는 것이 영 구차하고 추례하다.
실제 나는 이번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로서 이전과는 뭔가 달라진 자신을 본다. 그것은 내 사람만 보이던 확증편향이 확실히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지지하되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을 수 있는 균형감, 내가 마음에 둔 후보가 실수를 했을 때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객관성이 어느 정도 생긴 것 같다. 내 지인은 이것을 나이 먹으면서 생기는 자연적인 보수화라고 말했으나 내 식으로 말한다면 이것이 유권자의 도도함이다. 데이지가 그러했듯, 투표소 입장 전까지 “당신도 사랑했어, 그렇지만 당신도 사랑했어”라고 후보들의 간을 보고 긴장시키는 도도함 말이다.
다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이유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는 유권자로 늙고 싶은 바람이다. 자기의 소신대로 찍는 것이 성숙한 투표라지만, 세상의 모든 유권자는 언제나 자신의 방식 안에서 소신적이었으며 소신의 알리바이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 수십 년 전에 고무신과 막걸리로 투표권을 팔아먹었던 사람들도 내 손 안의 콩고물이 최고라는 소신이 있었을 것이고, 지역주의와 빨갱이론과 가짜뉴스를 신앙처럼 섬기며 태극기를 두른 오늘의 애국 어르신들도 자신의 선택을 소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다만 ‘~카더라’가 아닌 자신의 철학과 주의를 토대로, 세월호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속죄를 하고 그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대통령과 공모하여 나라를 사적 욕심으로 채운 이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 국가의 품격을 더 이상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외교와 통일을 자주적으로 하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을 귀히 여기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불통이 아닌 소통의 시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내가 누군가를 선택했다면, 그 후보는 내 사랑의 이유가 될 것이고 그것을 합리적인 소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젊어서 욕했던 그 나이를 막상 내가 먹고 보니, 노추(老醜)와 아집과 독선에 빠지지 않을 유권자로 늙어야 한다는 경계감이 더 커진다. 나의 판단이 둔해진다면 나는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자신의 소신에 덜 오염된 내 자식과 손주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기를 또한 소망한다. ‘위대한 유권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도한 유권자’로 죽을 때까지 남고 싶은 것이다.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ldj1999
2017.10.20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좌빨 종북 나라 팔아먹는 xx로
여기어 지는 요지경 같은 세상.
각자의 신념이 과연 얼마나 객관적인 정당성을 지닐지
명확하게 밝혀지는 그런 날이 올 수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