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러버스 앤 베어> 의 한 장면
10년 넘게 어떤 작은 스크래치도 없이 매끈한 순정 그대로 좋아하는 배우가 있으니 오다기리 죠다. 나는 그의 전영상보기주의자다. 생각보다 다작 출연인 그의 일본 드라마까지 다 못 챙겨서 아쉬운데, 최근 이틀 걸러 본 <오버 더 펜스> <행복 목욕탕>에서 그에게 끌리는 이유를 선명하게 알았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는 것이 더 순도 높은 거라고 믿어왔지만 오다기리 죠에겐 분명한 이유를 댈 수 있겠다. 어떤 캐릭터든 오다기리 죠의 눈빛은 상대의 말과 상황을 ‘일단 알아먹는’ 것이었다. 행동을 하든 안 하든 그건 다른 차원. 말을 알아듣는다,는 게 얼마나 귀한 것인가. 눈빛으로 상대방의 말을 접수하는 연기를 하는 그에게 언젠가 내가 하고픈 말도 들려주고픈 착각마저 들었다. 이 ‘언젠가’의 가능성 때문에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면 뻥이겠지만, 정말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된다면, 더듬더듬 ‘아노......’를 연발하며 말을 해보리라.(어차피 못 만날 테니 그냥 이렇게 써보기라도 한다)
오다기리 죠의 매력 이야기로 에둘러왔지만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배우 데인 드한에게서 도 이런 눈빛을 발견했다. 루시를 첫눈에 알아보고 사랑하는 로만 역의 데인 드한은 연인이 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먹는다. 루시가 악몽에 시달리고, 2년 전 죽은 아버지의 환영을 보며 도망칠 때도, 대학교 합격증을 들고 떠나려고 한다고 할 때도 알겠다고 한다. 비록 실연의 아픔 때문에 장총을 자신의 목에 겨누는 행동을 하면서도 결코 루시를 이해 못하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로만과 루시는 각각 아버지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영혼. 그 상처 때문에 사랑 따윈, 사람 따윈 믿을 수 없다고 삐뚤어질 만도 한데 인간적 성숙함이 이들 사랑에 깊이를 더했다.
<투 러버스 앤 베어>를 영화관 로비가 몹시 붐비는 소란스러운 토요일 저녁에 보았다. 막상 이 영화의 상영관에 들어서니 손으로 꼽을 정도의 관객만이 앉아 있었다. 그 한산함이 영화 몰입도를 높였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눈 벌판은, 바깥이 봄이란 걸 잠시 잊게 할 정도로 강렬했고 영화 끝날 때까지 이 눈밭은 그대로였다. 북극 접경 지대의 현장에서 실제로 촬영했다는 영화는 배우들의 입김과 붉어진 볼만 보아도 화면 전체에서 한기를 내뿜는 기운을 전했다. 영화가 끝나고 다른 상영관 관객들과 섞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중간에서 내려버리고 말았다. 따뜻한 일상의 소음, 의미 없는 말들, 관람객 몸에 밴 팝콘 냄새가 낯설기 짝이 없었다. 로만과 루시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내내 얼얼한 기분으로 있다가 호흡을 고르며 돌아왔다.
두 사람의 모습은 스노모빌을 타고 달리는 연인으로서, 얼음낚시를 하는 연인으로서, 눈보라와 밤마다 하늘을 덮는 오로라를 감상하는 연인으로서, 시체를 운구하는 육체 노동자와 택시 운전사인 연인으로서 몹시 건강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밝은 청춘이었다. 그들이 품고 있던 상처를 발화하기 전까지는. 상처 때문에 멀리 도망쳐온 로만은 루시가 대학 문제로 마을을 떠나는 것은 그대로 실연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헤어질 수 없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그들은 더욱 굳건한 연인이 되어 함께 떠나기로 하고 북극을 횡단한다. 그 길에서 만난, 강에 빠진 채 그대로 얼어붙은 순록 떼를 바라보며 나눈 대화는 치명적이었다. “순록처럼 인간도 물에 빠질 걸 알면서도 강을 건널까?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계속 같이 가잖아.”
‘계속 같이 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죽는 것이 끝이 아니고 헤어지는 것이 끝이라니. 그들은 이제 죽음도 두렵지 않은 연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눈보라를 피해 들어간 옛 군사 시설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 또다시 아버지 환영에 쫓기는 루시를 위해 로만은 그 환영을 죽여주기로 마음먹는다. 군사 시절을 통째로 폭파시켜버리는 것이다. 로만이 군사 시설을 부순다면 루시를 쫓던 아버지는 영원히 죽는 것이다. 과거의 군사 시설을 폭파시킨 것은 과거의 상처에 구속되었던 둘을 자유롭게 만드는 의식이었다. 차가운 북극의 벌판에서 불꽃이 치솟는 군사 시설은 과거가 지워지는 듯 강렬했다. 그러고 그들은 눈보라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마지막으로 나누고 얼음덩어리로 변해간다.
제목에 곰이 등장한다. 로만과 내적인 대화를 나누는 실제 북극곰이 영화에도 출연한다. “도망간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머릿속 문제를 태워버려야 한다”고 조언하는 곰. 시나리오를 쓴 캐나다 감독 킴 누옌의 말은 이렇다. “곰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상상에 맡긴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쓸 때 곰은 없었다. 중간에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을 둘러싼 모험』을 읽으며 신적인 요소들과 세계관에 영감을 얻었다.” 오다기리 죠로 시작한 이 글을 무라카미 하루키로 끝내야 하는 것인가. 캐나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일본 배우와 작가로 끝내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인 일이다.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보다는 현실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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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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