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한시. 우리가 다음 술집을 찾아 이동한 장소는 홍대 주차장 거리였다. 불혹을 넘어선 우리 세 사람이 쉴 곳을 찾아 이곳을 찾은 날은 하필 금요일이고 게다가 할로윈 데이였다. 평일 출 퇴근, 주말이나 휴가의 개념이 없는 우리는 이런 순간에 다시금 깨닫는다. 아, 맞다. 우리는 비정규직 근로자. 아무 때나 내키면 놀 수 있고 그러다 밤새도록 놀 수 있다. 다음 날 실컷 늦잠 잘 수 있고 느지막이 일어나 또 낮술을 즐길 수 있는 우리는 프리랜서. 외박하고 그 다음날 또 외박을 해도 집에서 바득바득 이를 갈며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우리는 불혹을 넘긴 싱글 프리랜서.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할로윈 데이를 즐기기 시작한 거야?" 생경하고 재미있고 우리는 어색했다. "얘네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힘은 뭘까?" 최근 이혼을 치르고 돌아온 A가 질문했다. "외로움" 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지난여름, 꽃같이 젊은 여자와 짧고 뜨거운 사랑을 장렬하게 치른 B가 대답했다.
"섹스"
그렇게 여름을 보낸 뒤 솔로로 돌아온 독신주의자 B는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을 80살 노인네 취급한다. 나는 실눈을 뜨고 다시 한 번 홍대 주차장 거리를 주시했다. ‘쟤네들은 외롭다....’ 생각하고 보니 전부 외로워 보인다. ‘쟤네들은 섹스하고 싶어서 저런다....’ 생각하니 발정기운이 온 거리를 넘치는 것 같다. 나는 실눈을 하고 B를 본다. ‘아... 섹스가 정말 중요한 사람을 나는 그렇게 죽을 기세로 짝사랑했었구나....’ 조금 속상해졌다. ‘난 아닌데....’ 이번엔 시선을 돌려 애초 질문을 던졌던 A를 다시 본다. 그가 이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건 6개월 전이었다.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두문불출로 한 여름을 보내고 나타난 그는 그새 많이 야위었고 새까매져 있었다. 우리는 A의 제 2인생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그냥 지금 우리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농담’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A는 모두에게 너무나 사랑스럽고 좋은 사람이라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고통스러웠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된 것이다. 그의 아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은밀하고 알아도 모를 부부지사에 대해서는 더더욱 전혀 모르면서 나는 혼자 그렇게 단정 지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 왜냐고? 'B'가 내게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나빠도 좋은 사람. 그래서 나는 날 사랑해주지 않는 B를 미워할 수도 버릴 수도 없었다. 제기랄.
우리는 독주를 마셨다. 천천히 쉬지 않고 계속 마셨다. 깊은 밤이 지나고 모든 술집이 문 닫을 시간. 마지막 코스는 떡볶이 집으로 결정! 우리는 취했고 어지러운 코스프레 무리를 헤쳐 떡볶이 집까지 걸었다. 온 동네방네 떡볶이 집까지 밤새 파티를 즐긴 20대 젊은이들로 꽉 찼다.
“버펄로 이론 알아요?” A가 입을 열었다. “버펄로는 무리 지어 이동할 때 맨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 속도에 맞추어 전체가 움직인대요. 야생동물의 습격을 받으면 후방을 담당하는 버펄로들이 제일 먼저 잡아먹혀요. 모두 죽지 않기 위해서 걔네들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거예요. 우리는 맨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에요” “왜?!” 나는 발끈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왜 우리가 희생을 해야 돼?” “잘 생각해보면 희생이 아닌 거지.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가 전체를 움직이잖아. 그리고 전체를 구하고” “난 싫어요. 난 누구도 구할 생각 없어”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자기네 삶을 반추하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전체의 밸런스를 맞춰주는 사람들. 인구조절도 해주잖아” “그게 좋아요?!! 맨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가 정말 좋아요?!” “전체를 구하잖아” “... 완전 짜증나”
나는 신경질이 났다. 우리가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아무도 몰라주는데 우리끼리 전체를 구한다고? 내가 미쳤어? 나는 떡볶이를 와구와구 먹었다. 지금 허기를 채우지 않으면 자고 일어나서 혼자 쓰리고 빈속을 채워야 한다. 뭐든 같이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자. 와구와구. 순대도 먹자. 괜찮을까? 먹자, 다 먹자. 다 먹었다. 떡볶이 3인분에 순대 3인분. 오뎅 3개. 국물까지 싹싹 다 먹었다.
새벽 5시, 우리는 너무 배불렀다. 너무 배가 부르니 잠시 사라졌던 취기가 다시 밀려온다. 너무 너무 배가 부르고 정말이지 너무 어지러웠다. 지금 이 시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악의 컨디션 베스트 3 안에 들어갈 만큼 불쾌했다. 나는 불쾌한 포만감과 취기를 참지 못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안정을 원한단 말이야.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을 소비하면서 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난 확실히 안정을 원한단 말야” “그럼 경미씨는 결혼을 해야겠다” 이혼남 A가 말한다. “...네...” 참 뭐라 덧붙일 말도 없고 좋은 생각도 안 떠오르는 침묵이 흐른다. “가자”
떡볶이 집 밖으로 나오니 해가 떴다. 동이 튼 홍대 주차장 거리 바닥은 굴러다니는 쓰레기들로 어지러웠고 코스프레한 젊은이들은 대체 집으로 돌아갈 기미가 아직도 없다. "난 너무 불행해!" 갑자기 나는 바락 소리 질렀다. "나도 너무 불행해..." 독신주의자 B가 중얼댄다. ‘그래, 너는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속으로 빈정댄다. ‘새파랗게 젊은 년이랑 여름 내내 놀다가 그 년 떠나고 나랑 있으니까 전부 다 불행하지?’ 갑자기 너무 신경질 난다. "아우, 열 받아!" 나는 애꿎은 A를 노려본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B가 입을 연다.
“집에 가자”
할로윈 데이. 불혹을 넘기고 대단한 부나 괜찮은 명예, 따뜻한 가정도 없는 우리는 코스프레한 젊은이들로 펄떡이는 홍대 주차장 거리에서 이렇게 할로윈 데이를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깼다. 지난 밤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맙소사. 지난 새벽, 밤새 할로윈 데이를 뜨겁게 보낸 젊은이들의 난장판 가운데 서서 지나친 취기와 불쾌한 포만감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채 나는 '안정'을 부르짖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작년 연말의 기억이 떠오른다. 조촐한 송년회 자리에서 A가 질문했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의 답은 기억이 안 나는데 A의 답이 번개처럼 스쳤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죄책감’이에요” 어젯밤, 마르고 새까매진 얼굴로 오랜만에 나타난 A의 얼굴을 다시 떠올린다. 음... 정말 맨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가 좋은 걸까? 나빠도 좋은 사람이 매사 가슴 속에 품고 있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의 무게를 생각해본다. 그래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냥 그가 안고 있는 그의 무게를 감내하고 그의 곁을 함께 할 사람이 꼭 나타났으면 좋겠다. 맨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니까 더더욱 같이 맨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를 만나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지적인 행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을 A도, B도, 나도 누렸으면 좋겠다. 전체를 구한다는 의미만으로도 정말 신경질 나 죽겠는데.
이경미(영화감독)
1973년생. 영화 <비밀은 없다>, <미쓰 홍당무> 등을 만들었다.
sodalija
2018.04.06
myhalcyon
2017.04.13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낑기고 휩쓸리고 떠밀리는 인간들도 신경질이 나긴 해요.
어쨌든 맹수가 보이면 냅다 도망가세요~
다음 영화도 찍으셔야죠~!!!
팬인증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