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작
엄마에게 딸은 적당히 똑똑하면서 엄마 말을 잘 듣는 애완동물 같은 존재가 딱 좋은 모양이다. 엄마 친구나 주변 사람의 자녀보다 우수하길 바라면서도 내심 자신의 영향이 미치는 울타리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글ㆍ사진 아사쿠라 마유미, 노부타 사요코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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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레 에이전시 루이입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루이 씨. ‘그린그레이’의 유리예요.”


“네…….”


그동안 애타게 기다렸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던 연락이다.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하는 루이에게 상대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프레젠테이션 경합 건으로 전화했어요. 저희 회사에서 검토한 결과, 이번 일을 하레 에이전시에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루이 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간절하게 기다리던 결과를 전해 들은 순간, 루이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유리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머릿속을 휘감고 나서야 루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루이는 도쿄에 있는 소규모 광고대행사 하레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다. 몇 주 전부터 미국 패션 브랜드 ‘그린그레이’의 일본 진출 프로모션을 수주받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왔다. 프레젠테이션 팀은 기획 담당이자 팀장인 루이를 중심으로 디자이너와 매체 담당자 등을 포함한 네 명으로 구성되었다. 33세인 루이를 제외하면 모두 20대 후배들이다.


하레 에이전시는 지금까지 패션 브랜드의 광고를 맡은 경험이 없었다. 고객 대부분은 작은 부품 제조업체나 가업을 이어받은 유명 가게 등 기술은 믿을 수 있지만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중소기업뿐이었다. 그래서 회사 임원들도 이번에 패션 브랜드 건을 맡게 될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루이는 이렇게 녹록치 않은 분위기에서 패션업계의 일을 전문으로 도맡다시피 하는 다른 광고대행사를 제치고 수주를 따낸 것이다. 기획 담당으로서 이만큼 자랑스럽고 기분 좋은 일은 없다.


전화를 끊자마자 루이는 곧장 다른 층으로 가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일부러 심각한 듯한 말투로 거드름을 피우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은 말이야…….”


아무리 루이가 감추려고 해도 기쁜 표정이 새어 나온 모양이다. 한눈에 분위기를 눈치챈 팀원들은 한발 앞서나가며 흥분해서 말했다.


“팀장님, 우리가 이긴 거죠?”


“벌써 연락받으셨어요?”


루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힘주어 대답했다.


“여러분 덕분에 그린그레이의 일본 진출 프로모션은 우리하레 에이전시가 맡기로 결정되었어요!”

 
루이의 말에 팀원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팀장님! 우리가 해냈군요!”


“오늘 당장 축하해야겠어요. 한잔하러 가시죠!”


그 말을 들은 순간, 루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어. 나중에 다시 날을 잡자.”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루이는 컴퓨터 화면 구석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흘낏 쳐다봤다. 숫자는 오후 5시 5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큰일 났다! 오늘은 오후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회사에서 약속 장소까지는 지하철 환승 시간을 합쳐서 15분 정도 걸렸다. 루이는 허둥지둥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한 달에 한 번, 도망치고 싶은 두 시간

 

만나기로 한 사람은 엄마다. 고향에 사는 엄마는 딸의 얼굴을 보려고 한 달에 한 번 도쿄에 온다. 대학 때부터 도쿄에서 혼자 사는 나는 엄마와의 만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다.


6시 10분이 되어서야 엄마가 가고 싶다고 꼭 집어 말한 프렌치 레스토랑에 겨우 도착했다. 엄마는 무슨 일인지 웨이터로 보이는 남자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괜찮아. 일이 바빴나 보구나? 아, 얘가 내 딸이에요.”


엄마는 당황해서 사과하는 내게 짐짓 웃음을 지어 보이며 웨이터에게 나를 소개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애매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웨이터가 말을 걸어왔다.


“따님이시군요. 조금 전에 어머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라고 자랑스러워하셨어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달려온 탓에 바짝 마른 목소리로 겸손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내가 막 대답하는 순간 엄마는 새침한 표정으로 내 말을 낚아챘다.


“맞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아, 엄마! 그만해요. 창피하게.”


나도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어머, 무서워라” 하고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가 웨이터에게로 시선을 돌려 미리 골라놓은 코스 요리 2인분과 레드 와인 반병을 주문했다.


이렇게 또다시 우울하기 짝이 없는 두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저 엄마의 애완동물일까?

 

와인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치고 나자 엄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일이 바쁘니?”


나는 와인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시면서 대답할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솔직히 오늘 프레젠테이션 경쟁에서 이겨 수주를 따냈다는 소식을 전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가족이니까 좋은 일을 함께 나누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즐겁게 일하면서 바쁘게 산다는 이야기를 하면 곧바로 언짢아했다.


‘그렇게 사니까 결혼이 늦어지는 거야’, ‘남자 이상으로 일하는 여자는 매력이 없어’라는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별로 바쁘지 않다는 듯이 말하면 주말에는 집에 좀 오라는 둥 귀찮은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엄마에게 딸은 적당히 똑똑하면서 엄마 말을 잘 듣는 애완동물 같은 존재가 딱 좋은 모양이다. 엄마 친구나 주변 사람의 자녀보다 우수하길 바라면서도 내심 자신의 영향이 미치는 울타리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처음 보는 웨이터에게 애완동물 대신에 딸 자랑을 할 수 있는 정도를 이상적으로 여길 뿐, 딸이 일에만 전념하는 커리어 우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거의 없다.


이렇게까지 엄마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었지만 오늘은 일본에 처음 진출하는 브랜드의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회사에서 큰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살짝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일이 바쁘냐는 엄마의 질문에 언제나처럼 “그렇게 바쁘진 않아”라는 애매한 대답 끝에 무심코 한마디를 덧붙이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은 큰 안건을 계약해서 기분이 너무 좋아.”


기분이 너무 좋았던 탓일까, 아니면 마른 목을 축이느라 와인을 급하게 마셨던 것일까. 그 한마디로 엄마의 마음속에 들어 있던 지뢰를 밟고 말았다.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아사쿠라 마유미,노부타 사요코 공저/김윤경 역 | 북라이프
지금껏 딸이라는 호칭 앞에는 ‘친구 같은’, ‘착한’과 같은 단어들이 당연한 듯 따라붙었다.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엄마와 갈등을 겪고 있는 수많은 착한 딸, 아니 가족에게서 벗어나 나답게 살고 싶은 여자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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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라 마유미, 노부타 사요코

임상심리사이며 하라주쿠 상담소 소장인 노부타 사요코와 프리랜서 작가인 아사쿠라 마유미가 만나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를 집필했다. 가족, 특히 엄마와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