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과 풍자의 힘
우리는 지금 ‘광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시절을 지나고 있다. 촛불로 맺어진 연대는 가슴이 뻐근할 만큼 벅차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단함이 차오른다. 언제쯤 끝을 보게 될까, 지친 얼굴로 묻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과 거짓, 원칙과 부정, 정의와 불의의 대립.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우리는 ‘즐겁게 싸우는’ 방법을 택했다. 광장 한복판으로 ‘해학’과 ‘풍자’를 끌고 들어온 것이다. 시민들은 최순실 코스프레를 하고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하면서, 권력은 쥐었으나 영혼은 잃어버린 이들을 비웃었다. 장수풍뎅이연구회, 민주묘총 등이 적힌 깃발도 들고 나왔다. 사람들은 ‘그들이 장수풍뎅이와 고양이까지 분노하게 만들었다’며 사건의 주인공들을 조롱했다.
‘해학’과 ‘풍자’는 저력을 발휘했다. 절망에 찬 외침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광장은 투쟁의 공간인 동시에 축제의 공간이 됐다. 그 안에서 우리는 깨달았다. 나와 당신이 지키려는 가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과 맞서고 있다는 것을. 맞잡은 손에는 절로 힘이 실렸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명랑하고 경쾌하게”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달 8일, 국립극장은 신작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를 무대에 올렸다. 손진책 연출가는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마당놀이가 이어가는 기본 정신에 대해, 그리고 그 해학과 풍자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한판의 마당놀이를 통해 현실 사회의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흥겨운 감흥으로 모두의 고단함을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국수호 안무가, 김성녀 연희감독 역시 ‘상실’과 ‘다친 마음’, ‘위로’와 ‘치유’를 이야기했다. 극본을 맡은 배삼식 작가는 지금 우리에게 웃음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웃음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나 도피가 아니라 절망으로부터의 거리두기, 그 ‘악’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믿음의 표현”이라고.
한 걸음에 내달릴 수 없다면 쉬어가야 한다. 한바탕 웃으면서 피로를 털어내고, 다시 걸어갈 힘을 얻어야 한다. 그때 내딛는 한 걸음은 분명 이전보다 가뿐할 것이다. 악행을 꼬집으며 상식을 확인하고 그 속에서 맺어진 연대를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토록 유쾌하게 ‘상처 내지 않는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우리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이 순간,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와 만나야 할 이유다.
풍요로운 연말연시, <놀보가 온다>가 책임진다
<놀보가 온다>는 원작 ‘흥보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오늘의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요소를 더했다. 욕심 많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로 그려진 ‘놀보’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지고, ‘마당쇠’라는 새로운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공연의 진행자 역할을 하는 마당쇠는 놀보의 심보를 꿰뚫어보며 서슴없이 돌직구를 날리는 등 관객을 대신해 속 시원한 일갈을 이어간다.
‘해학’과 ‘풍자’가 안겨주는 묘미도 빼놓을 수 없다. 저출산, 월세 폭탄, 부당거래, 임금착취 등의 문제를 거론하는가 하면 현 시국의 문제를 유쾌하게 짚고 넘어가기도 한다.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던 마당쇠가 주인공으로 합류한 것을 보고 놀보는 ‘비선실세’가 아니냐며 항의하고, 이에 마당쇠는 ‘비(빗자루) 든 실세’라며 대꾸하는 식이다. 흥보와 놀보가 박을 타는 대목에 이르면, 다 아는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현대판 금은보화’가 쏟아지면서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낸다.
문자 그대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연으로써 풍성한 볼거리를 준비했음은 물론이다. 길놀이와 고사로 시작해 뒤풀이에 이르기까지 ‘마당놀이’만이 안겨줄 수 있는 흥겨운 시간은 고스란히 지켜내면서도 남사당패의 줄타기 장면을 재현하는 등 보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았다. 여기에 국립창극단의 희극연기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함께하며 신명을 더한다. 놀보 역의 김학용, 흥보 역의 유태평양, 마당쇠 역의 이광복이 열연하며 서정금과 조유아는 각각 흥보처와 놀보처로 분한다.
통쾌한 웃음과 날카로운 풍자로 가득 찬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는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풍요로운 연말연시를 책임진다. 공연은 오는 2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