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소설가는 사냥꾼, 끊임없이 새로운 걸 찾아야 한다”
사냥에 비유한다면 사냥을 집에서 하는 사람은 없죠. 소설가는 가축을 기르는 농부가 아니고요. 물론 가축을 기르는 게 더 경제적일 겁니다.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있겠죠. 소설가는 사는 게 고단해 비쩍 마른 야생의 짐승을 쫓아가서 나도 힘드니까 같이 먹고 살자고 사냥하는 존재 같아요.
글ㆍ사진 정의정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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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가가 첫 소설집을 낸 건 1996년이다. 꼭 20년이 지나고 새 소설 『믜리도 괴리도 업시』가 나왔다. 금발의 동성애인과 함께 돌아온 예전 친구를 만난 중년 남성, 소설을 한 줄도 못 쓰다가 천재적으로 이야기를 쓰는 동명이인을 만나 위험한 거래를 하는 소설가, 자연 속의 삶을 주장하지만 너무나 세속적인 산속 노인, 간첩으로 몰려 모든 관계가 박살 나고 자기 자신을 나무에 매다는 사람까지, 마냥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더불어 초기작을 엄선해 다시 엮은 『첫사랑』도 개정판으로 나왔다. 소설 속 인물들의 고통은 안타깝지만, 성석제의 소설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반가워할 일이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에 실린 노태훈 문학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성석제는 “의심할 여지 없는 프로 소설가이고 이야기해 한해서는 맹수에 가까”운 소설가다. 그러나 실제로 소설을 만들어 내는 걸 보면 맹수라기보다 맹수 같은 이야기를 사냥하는 사냥꾼에 가깝다. 날래고 눈치 빠른 초식동물 같은 사소한 이야기도 성석제를 만나면 꼼짝없이 붙들린다. 마냥 웃거나 마냥 슬퍼할 수 없는 일상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입담은 여전하다. 아무래도, 이 소설가는 독자마저 사냥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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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믜리도 괴리도 업시』, 판단은 독자의 몫


『믜리도 괴리도 업시』에 실린 「블랙박스」는 특이하게 글쓰기를 소재로 하셨어요. 선생님 이야기가 들어간 것도 같고요.


작가가 주인공이니까요. 저는 그 직업에 속해 있는 거고요. 소재가 고갈된 상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소재가 된 거죠.


「여행자의 지도」는 프랑스 지방을 자전거로 다니는 내용입니다. 자전거를 탄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모습이 작가님이 직접 경험한 내용 같았는데요.


책 속에서는 샤토뇌프뒤파프에서 자전거를 타는 내용이 나와요. 제 경험으로는 루앙스 강 인근에서 자전거를 빌려 탄 적이 있었고요. 빌려주기만 한다면 해외에서도 탈 용의는 있습니다. 안 빌려준다면 못 타겠죠.


차도 운전하시나요? 「블랙박스」도 혹시 블랙박스를 구입한 경험에서 나온 건가 해서요.


운전하지만 제 차에 블랙박스는 없어요. 달아야지 생각만 하고 있어요. 블랙박스 가격은 소설 쓰면서 검색해 봤죠. 생각보다는 싸던데요.


「매달리다」에는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 이야기가 나와요. 이야기에 역사성이나 시대 상황을 담아내야겠다는 의도가 있으셨나요?


간첩 사건은 70년대나 80년대에 워낙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예전 중앙정보부가 있던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어요. 대단히 음습하고 어두운 전설 같은 게 깃든 분위기가 나더라고요. 심지어 귀신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런 일들이 근래 일부 조명이 되어서 다큐멘터리로 다뤄진다든지 하는 식으로 많이 알려졌죠. 어떻게 하다 제 눈에 띈 사연이 있어, 지나간 일이지만 충분히 오늘날 다시 되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으로 소설을 써 봤습니다.


현재 시대 상황도 소설의 소재로 쓰시나요?


공동 창작 같은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일에 대해서 소설로 쓰긴 어려워요. 시는 가능하죠. 시는 과거에 프로파간다로 쓰인 적도 있으니까요. 시 자체가 역사의 변곡점이 된 적도 있고요. 하지만 소설은 막상 현재에 응전해서 소설을 써내기는 쉽지 않아요.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말하는 게 문학이 오랫동안 취해 온 방식이기에 과거의 일을 통해서도 현재를 말할 수 있고요. 간첩이라는 게 고리타분한 이야기 같지만 고문과 조작, 왜곡, 편견은 계속 작용하고 있잖아요. 아주 뜨거운 현재성을 다시 끌고 와서 지금 이 자리의 우리를 보는 거죠.


「나는 너다」에서 계속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현대인을 쓰신 것도 지금의 상황을 그리신 게 아닐까 했거든요. N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N분의 1의 N을 염두에 두고 쓰신 건가요?


모르겠어요.


저는 휴먼(Human)의 맨 끝 N이였나 싶기도 했고요.


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웃음) 저는 이미 썼으니까,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희극과 비극 사이


성석제 소설은 대개 희극이다, 혹은 성석제는 웃음이 많고 천재적으로 재밌는 이야기꾼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하지만 이번 단편 「매달리다」도 그렇고 건조하게 쓰신 소설도 많잖아요.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쓰고 싶은 순간과, 이번에는 조금 더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주기가 있나요?


의식적으로 이번에는 이런 스타일로, 그다음에는 저런 스타일로 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본능대로 하는 게 맞아요. 의식적으로 스타일을 만들어서 쓰려고 하면 잘 안 써져요. 제가 원하는 대로의 자연스러운 글쓰기가 되지 않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면서 내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걸 흉내 낸다고 느끼죠.


하지만 소설은 어느 정도 노력을 들여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해서 써야 하는 장르기도 합니다.


시에 비해서는 공작적이죠. 의식적이어야 하고 노동에 가까워요. 조작을 해야 하죠. 하지만 저는 방법론으로 따지면 시처럼 에너지가 쌓이고 난 다음에 풍만해져서 자연스럽게 용출하는 스타일이에요. 다행히 소설이 갖고 있는 무한대의 관용성, 어떤 걸 써도 소설이 된다는 그 관용성이 나를 받아들여 준 게 아닐까 싶어요. 거기에는 물론 제가 쓴 소설을 받아주는 독자의 관용성도 있죠.


작가님의 마감도 궁금합니다. 「블랙박스」 속 소설가처럼 마감에 쫓기다 쓰는 스타일인가요?


마감은 별로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어요. 일부러 마감을 안 지켜보려고 한 적은 있어요. 마감 전에 원고를 다 하고 나서 보내면 받았다 아니다 아무 대답이 없어요. 약속을 지켜서 제때 보냈는데 왜 답이 없을까, 하고 참다가 나중에 물어보면 아무도 안 내서 안 보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편집부 직원들도 몰아서 일하는 게 경제적이죠. 그래서 일찍 보내봤자 소용이 없어요. 일찍이라고 하면 마감에 맞춘 건데요. 이후로 마감을 어기려고 한 적이 있어요.


마감이 힘들다는 작가는 있었지만, 일부러 마감을 넘기려는 작가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네요.


몸부림을 치면서 마감을 사흘 넘겨봤는데, 아무 연락이 없었어요(웃음). 결국은 궁금해서 못 참고 원고 얼마나 들어왔냐고 물어보고는 보내버렸죠. 작가 중에는 마감이 넘기 전에는 쓸 마음이 안 생긴다는 사람도 있다고 해요. 마감이 넘는 순간에서야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는군요. 좋은 소설가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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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소설은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다


『첫사랑』 개정판도 나왔습니다. 기존에 냈던 소설이 다시 나오면 기분이 어떠세요?


『첫사랑』에 실린 중단편인 「새가 되었네」를 처음 책으로 낼 때,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진 채로 병원에 누워있었어요. 편집부에서 원고를 들고 와서 교정해달라고 하길래 판목을 부러진 다리 위에 얹어놓고 교정을 했죠. 다리가 피가 쏠리면 아프니까 오랫동안 못 보고, 조금 보다가 편집자분한테 넘겨버렸어요. 세월이 흐르고 다시 개정판을 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때 쓴 건 그때 쓴 거니까, 지금 손대는 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해서 개정판 작가의 말만 쓰고 바꾸지 않았죠. 이번에 내는 게 세 번째 개정이에요. 원고를 보니까 그때 다리 부러지기 전 정황 같은 게 떠올라서 아련하고 애틋한 마음이 드네요. 이렇게 개정판이 나올 때까지 떼돈을 벌지 못했다는 회한도요.


개정판도 나왔으니 조금씩 버실 거예요. (웃음)


네, 그리고 더는 고치지 않을 거예요.


예전에 쓰신 소설을 다시 보시기도 하시나요?


개정판 낼 때 말고는 거의 안 보죠. 책으로 만들어져서 한 번 떠나가고 나면 그때까지 고치는 과정이 힘들어서 만정이 뚝 떨어져요. 그래서 마치 하지 말았어야 할 욕까지 다 하고 서로 헤어진 연인처럼 이별을 한 상황에서 또다시 굳이 들춰봐야 한다면, 스스로 설득해야죠. 이것은 내 밥줄이다, 하면서.


「첫사랑」 에필로그도 새로 쓰셨잖아요. ‘이 세계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변하지 않을 것이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이미 쓴 표현을 어떤 의미로 썼다고 말하는 건 작가로서는 독재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쓴 걸 본 사람이 생각하는 자유가 있어야죠. 작가라고 해서 그 의미에 간섭할 권리는 없어요.


「믜리도 괴리도 업시」 에필로그에서도 ‘인간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의 산물이다.’는 말이 나옵니다. 조금 질문을 바꿔서, 이 생각을 하신 건 언제였나요?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태어났을 때 아니었을까요? 나는 누군가의 사랑의 산물이라는 개념. 모두에게 너무나 자명한 진실이니까요.


소설가 중에서는 밖으로 나와 자기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시는 분도 계세요.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할 말이 없죠. 그리고 얘기한대로 만정이 다 떨어져 있는데 계속 얘기해달라고 하면, 안 좋다고 이야기할 순 없죠. 그렇다고 좋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민망하고요.


하지만 ‘독자와의 만남’ 같은 행사를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해야 하잖아요.


그럼 다시 속으로 다짐하는 거죠. 아, 이것은 밥줄이다. (웃음)


영국, 독일 등에 작가님 작품이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번역본을 보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번역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어릴 때 보던 책의 태반이 다 외국에서 쓰이고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이에요. 워낙 무협지에 빠져있어서 그랬겠지만, 그걸 읽으면서 외국의 모르는 시대, 모르는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잘 모르겠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읽으면서 왜 악어 고기를 먹을 거냐고 물어볼까, 악어는 먹는 걸까, 이런 생각은 했지만요. 그때 번역자들이 제 수준에 맞게 잘 번역을 했던 것 같아요. 문학 작품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예술 장르보다도 가장 늦게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아가는 예술이에요. 하지만 잘 번역되기만 하면 영향력은 일찍 넘어간 다른 예술에 비해 훨씬 커지고 오래 가요. 잘 번역되기를,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외국의 어린 독자가 어릴 때 나와 같길 바라죠.

 

 

사내들의 이야기


소설에서 사내들이 자주 나와요. 상대적으로 여성은 비중이 적어 보이거든요. 남성들의 이야기로 성석제 소설을 규정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러게요, 다시 생각해보니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이 몇 안 되겠네요. 그렇게 볼 수 있겠죠.


「골짜기의 백합」도 여성이 주인공이지만, 여성이 구술하면 남성이 받아적는 식으로 결국 화자는 남성이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세밀하고 섬세하고 깊고 부드러운 세계를 잘 그려낼 자신이 없어요. 만약 가령 조선 시대의 신사임당에 관심이 생겨서 그 사람의 삶에 대해 신사임당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다, 그럼 저에게는 굉장히 억지스러운 일이 되겠죠.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억지스러운 상황을 피해왔기 때문에 아마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 같아요. 『첫사랑』에 실린 ‘유랑’이라는 소설에서도 일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국에서의 삶과 사랑, 비탄, 회한을 다룬 적은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목격하는 여성의 세밀한 삶이나 생각, 이런 것들은 잘 모르겠어요.


최근 문단 내 성폭력 이슈도 있었잖아요.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시대의 현상이나 사건 사고에 대해서 한마디 하는 게 저한테는 자연스럽지 않아요.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나 생각은 있고 그것이 잘못됐다거나 잘됐다는 생각은 있지만, 뭉뚱그려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의 집단을 폄훼하는 건 잘 안되더라고요.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성찰 없이 뉴스나 가십으로 소비하고 소진하고, 시체를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다른 이슈를 찾아서 가버리는 게 가장 우려스러워요. 나쁜 사건이면 다시 되풀이되겠죠. 성찰이나 기록, 뚜렷한 합의 없이 그냥 넘어온 게 현재 우리인지 모르겠어요.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소수자의 이야기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제목 그대로 풀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데, 그 사람은 누구 편도 들지 않는, 미워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에요.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회색인이라고 했죠. 그 사람이 가는데 양쪽에서 돌을 던져요. 그런 사람들이 약자예요. 그 사람에게 남쪽이든 북쪽이든 어느 쪽을 택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옳은가. 예전 70년대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지금 세상은 참 많이 좋아졌죠(웃음). 소수자나 약자에게 무분별한 공격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훨씬 더 교묘해지고, 악랄하고, 철두철미하게 모욕적인 방식으로 약자들을 괴롭히죠. 영원히 약자는 게토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놔요. 피부색, 성적 취향, 빈곤, 장애 등을 못 벗어나요. 더 정교하게 그물을 짜 놓죠. 수십 년을 그냥 취향대로 살아온 사람에게 동성애자나 유대인, 금발이니 흑발이니 하고 말을 갖다 붙여서 이방인화 하는 게 폭력이죠.


난민에도 관심을 가진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어릴 때는 농촌 인구가 전 인구의 70% 이상이었어요. 정주문화가 우세했고, 사람들이 다들 뿌리가 있다고 이야기했죠. 지금은 아마 90%가 도시에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유목적인가, 그것도 아니에요. 지금의 도시 문명은 이제까지 인류가 갖지 못했던 문명인데, 아직 그걸 뭐라고 이름 붙였는지 모르겠어요. 자신이 누군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새로 생성되는 관계와 가치에 적응을 해나가는 거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온 적이 없으니까 어딜 가도 굉장히 바빠요. 알 수 없는 적의와 사고에 항상 부딪히죠. 어딘가를 잠시 점유한 도시인은 밖으로 굴러온 돌이 자기 자리를 뺏을지도 몰라 불안하고요. 이 자리가 영속하진 않지만 어쨌든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뺏기지 않으려고 버티고 싸우고 배척하는 게 우리 삶이죠. 그러고 보니까 참 쓸 건 많네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세요?


공자나 부처, 플라톤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나 자신에게 큰 보탬이 될 것 같진 않아요. 삶을 사는 데 하나의 지침이 될 수는 있겠죠. 그럼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근거’라는 단어도 정주적 문화에서 나온 말이지만, 지금 뿌리 없이 떠돌고 적의에 찬 사람들의 세계를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어요. 나름 근거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 이 세계를 묘사한다는 게 근본적으로 모순이죠. ‘근본’도 뿌리 근 자가 들어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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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사냥꾼이다


‘이야기에 한해서는 맹수에 가깝다’는 평이 실려 있습니다. 동의하시나요?


네, 싫다고 한들 바꿀 것 같진 않네요.


작가는 화전민이나 유목민에 가까워서 옮겨 다니면서 써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소설을 만들어 내는 데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깔고 앉은 자리가 원래 금광이었으면 계속 캐내 먹으면 되지만, 소설가는 금은방 주인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전에 없던 무엇을 계속 캐내서 보여줘야죠. 기존에 없던 걸 보여주지 않으면 주문이 점점 줄어들겠죠. 새로운 자원을 얻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하고 바꿔야 하는데, 주로 장소를 많이 바꿔요. 집에서는 전혀 일할 수 없어요. 사냥에 비유한다면 사냥을 집에서 하는 사람은 없죠. 소설가는 가축을 기르는 농부가 아니고요. 물론 가축을 기르는 게 더 경제적일 겁니다.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있겠죠. 소설가는 사는 게 고단해 비쩍 마른 야생의 짐승을 쫓아가서 나도 힘드니까 같이 먹고 살자고 사냥하는 존재 같아요.


본인을 농부 같은 체질이라고도 하셨는데, 사냥을 열심히 해 오면 나중에 같은 자리에서 열심히 쓰는 시간도 필요하시잖아요.


전향한 농부 출신 사냥꾼이랄까요? (웃음) 전향했다기보다는, 농부였는데 농사지을 논밭이 없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냥을 나가는 상황이에요. 전직이라고 표현해야겠네요. 소설 사냥꾼은 다른 사냥꾼하고는 다르게, 매일 농부처럼 잡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활을 메고 밖으로 나가는 특징이 있죠. 대개는 안 잡히지만요. 안 잡혀도 그만이고요.


성석제의 소설은 ‘듣는 소설’에 가깝다는 평론이 있었습니다. 작가님도 듣는 행위를 많이 하실 것 같아요. 주변에 말을 잘하는 분이 있나요?


네, 많아요.


속칭 ‘입을 터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금광 같은 느낌일 것 같아요. (웃음)


(웃음) 요즘에는 뜸한데, 예전에는 그런 분들을 참 자주 만났죠.


술 자주 드시나요? 술자리에서는 누구와 어울리시나요?


자주 어울리는 사람과 자주 어울리죠. 몇십 년 된, 아주 오래된 사람들이 있고요. 비교적 최근에 만난 사람들도 다 같이 만나요. 또래도 비슷비슷해서 최근에 만난 사람들과 오래 만난 사람이 서로 친구도 되고 서로 할 말이 많은 거죠. 여럿이 같이 모여 떠들썩한 만남이 좋아요.


자전거도 요새 타세요?


어제랑 그제도 탔어요. 요즘 새로 생긴 자전거 길이 많아서 그걸 찾는 재미도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가 군포라는 곳인데, 공원이 생겼어요. 인공 폭포지만 폭포도 생기고 참 근사해요. 수리산 자락을 따라서 원래부터 돌던 길에 공원이 더해진 거죠. 또 뭐가 더해질지 모르겠어요.


 

 

믜리도 괴리도 업시성석제 저 | 문학동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집필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책이자, 작가가 1996년 첫 소설집을 출간한 이후 꼭 20년이 되는 해에 펴내는 새로운 소설집이다. 새 소설의 제목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다.


 

 

첫사랑성석제 저 | 문학동네
『첫사랑』은 ‘성석제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왜 성석제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로 꼽히는지 입증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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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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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정

uijungchung@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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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에 [문학사상]에 시 「유리닦는 사람」을, 1995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로서의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평론가 우찬제는 그를 거짓과 참, 상상과 실제, 농담과 진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선을 미묘하게 넘나드는 개성적인 이야기꾼이며, 현실의 온갖 고통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올바로 성찰하면서도 그것을 웃으며 즐길 줄 아는 작가라 평했다. 또한 평론가 문혜원은 “성석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농담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막힘없이 풀어놓으며 "마치 무협지의 고수들처럼"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입담을 펼친다.”라고 전한다. 이런 평론가들의 말처럼 성석제는 미묘한 경계선을 거닐면서 재미난 입담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소풍』은 흥겨운 입담과 날렵한 필치가 빛나는 산문집이다. 저자는 음식을 만들고 먹고 나누고 기억하는 행위가 곧 일상을 떠나 마음의 고삐를 풀어놓고 한가로운 순간을 음미하는 소풍과 같다고 말한다. 음식은 “추억의 예술이며 오감이 총동원되는 총체예술”이며, “필연코 한 개인의 본질적인 조건에까지 뿌리가 닿아 있다”는 지론은 곧 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사람살이의 다양한 세목을 되살려온 성석제 소설세계와 상통한다. 십수년간 각종 매체에 연재하며 갖가지 음식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낸 작업이 ‘음식의 맛, 사람의 맛, 세상의 맛’을 함께 음미하게 한다. 단편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모든 면에서 평균치에 못 미치는 농부 황만근의 일생을 묘비명의 형식을 삽입해 서술한 표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포함하여, 한 친목계 모임에서 우연히 벌어진 조직폭력배들과의 한판 싸움을 그린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돈많은 과부와 결혼해 잘살아보려던 한 입주과외 대학생이 차례로 유복한 집안의 여성들을 만나 겪는 일을 그린 「욕탕의 여인들」, 세상의 경계선상을 떠도는 괴이한 인물들의 모습을 담은 「책」, 「천애윤락」,「천하제일 남가이」등 2년여 동안 발표한 일곱 편의 중 · 단편을 한 권으로 엮었다. 이번 작품집도 예외없이 세상의 통념과 질서를 향해 작가 특유의 유쾌한 펀치를 날리는데, 비극과 희극, 해학과 풍자 사이를 종횡무진한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이후 성석제가 3년간 발표한 단편들을 모았다. 혼기에 이른 맏딸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이야기와 딸이 어머니에게 읽어드리는 옛이야기를 교차 시키며 유려하게 텍스트를 직조해낸 표제작을 비롯,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내 고운 벗님' 등 총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기성의 통념과 가치를 뒤집는 화려한 수사와 “웃음의 모든 차원을 자유자재로 열어놓는 말의 부림”으로 우리 주변에 있음직한 각양각색 인물들의 삶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표면에 드러나는 유쾌한 재미와 해학, 풍자 밑에는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통찰이 번뜩이기도 하고 그리움이나 인간을 향한 건강하고 따뜻한 시선이 은근히 깔려 있다. 이외의 소설집으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새가 되었네』 『재미나는 인생』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호랑이를 봤다』 『홀림』 『지금 행복해』 『첫사랑』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참말로 좋은 날』 『이 인간이 정말』 『믜리도 괴리도 업시』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등과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궁전의 새』 『순정』 『인간의 힘』 『도망자 이치도』 『위풍당당』 『투명인간』 『왕은 안녕하시다』(전2권) 등, 산문집 『소풍』 『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칼과 황홀』 『꾸들꾸들 물고기 씨, 어딜 가시나』 『근데 사실 조금은 굉장하고 영원할 이야기』 등이 있으며, 명문장들을 가려 뽑아 묶은 『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이 있다. 1997년 단편 「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0년 「홀림」으로 제13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고, 2001년 단편「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2회 이효석문학상, 같은 작품으로 2002년 제33회 동인문학상을 받았으며, 2004년 「내 고운 벗님」으로 제4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