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선우 "시는 숨쉬기 같은 것"
시는 숨쉬기 같은 것이어서 공기처럼 늘 시적인 순간들을 만나지요. 시적 영감이 오더라도 그것들을 바로 시화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냥 몸에 붙여두지요. 더러 잘 익기도 하고 더러 설익어 떨어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시간을 통과해서 끝내 몸에 남는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참을 수 없이 복받쳐 올라와요. 그러면 그때부터 갑자기 시를 시작하지요.
글ㆍ사진 서울국제작가축제
201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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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진

 

름다운 9월, 전국적으로 흥겨운 축제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문학애호가들이라면 놓쳐서는 안 되는 특별한 축제의 현장,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의 시작이 멀지 않았다. 시 쓰고, 소설 쓰는 작가들이 잠시 펜을 놓고, 축제를 즐길 마음만을 가지고 모이는 시간. 김선우 시인도 함께한다.

 

최근 펴내신 시집 『녹턴』의 「걸식이 어때서」의 부분입니다. “내 것을 준다는 의식 없이/그저 우린 서로를 빌려주며/ 먹고 먹이는 거지”. 작가님의 무소유 의식을 잘 드러내주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더 ‘잘’ 사는 것을 대변해준다고 믿는 요즘, 무소유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 같은 건 세상에 없는 것 같고요. ‘내 것’에 대한 과도한 욕망과 집착에서 생의 어떤 고통들이 발생한다는 통찰은 인류사를 통해 이미 많은 현자들이 설파해온 바이고, 저 역시 내 삶의 질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가치에 소유욕의 조절이 있다는 것에 동감하고요. 소유에 대한 집착이 줄면 사는 게 훨씬 가볍고 자유로워지거든요. 물질에 대한 소유욕뿐만 아니라 사람, 명예, 심지어 사랑에 대해서도 말이죠.

 

한 발 더 나아가면, 실은 세상에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유에 동의하는 편이에요. 모든 것은 순간이고 스쳐가는 것일 뿐이죠. 그러니 생이 허무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제 경우엔 그래서 생이 찬란하다고 느끼는 쪽이에요. 최선을 다해 찰나를 사는 생명들이 애틋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고요. 내가 이렇게 찰나적 존재구나, 당신도 그렇구나, 하는 각성이 자연스러워지면 찰나를 사는 서로에 대한 응원의 마음이 커지고 세상에 하찮은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요. 좋지 않은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세상에 대한 슬픔은 어쩔 수 없지만, 소유욕에 의한 내면의 불필요한 드잡이 질이 사라지고, 삶이 건강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첨언하자면, ‘무소유’라는 걸 무슨 도 닦아서 닿게 되는 어려운 경지처럼 여길 필요는 전혀 없다는 거. 많은 물질을 가진 사람이 가진 것에 비례해 행복해지는 게 아니란 건 우리가 대부분 아는 거잖아요. 소유에 대한 성찰은 행복감에 특히 자유의 감각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현대사회는 내게 불필요한 소유와 소비를 끊임없이 조장하는데, 그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내게 정말 필요한 소유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 말이죠.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 야하는 상황은 사절이에요. 자유롭지 않으면 정신이 죽고, 정신이 죽으면 몸이 죽어요. 찬란한 찰나인 이 생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 제가 도달한 결론은 단순해요. 물질적 소유는 심플하게 사유와 감수성은 풍성하게 사는 것.

 

『녹턴』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 싶습니다. 시집에서 ‘am’도, ‘pm’도 아닌 ‘om’의 시간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시는데, om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지. 어떤 세계인지요?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 하루 24시간이라고 규정된 시간성에 대한 저항이자 도발로 창조한 시적 시간성이에요. 오전(am) 오후(pm) 24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이 시간들이 진실로 ‘나의 시간’인지, 내가 정말 ‘나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지요. 시스템이 요구하는 시간에 ‘나’를 맞춰가며 ‘나’를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시적 성찰이고요. 내가 나로서 충만한 시간이라면 am11시가 om11시일 수도 있는데, 외부에서 규정된 시간에 쫓기며 제정신 아니게 살아간다면 아무리 많이 살아도 그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닌 걸 테고요. am/pm이라고 규정된 제도적 시간에 저항하는 이 시간성을 어떤 문자로 표현할지 많이 고민했는데 om으로 부르는 게 제일 좋았어요. 문자적으로는 am/pm과 대응되며 변주되는 균형감이 좋고 내용적으로는 산스크리트어 ‘옴’이 우주 시원과 생성의 소리이자 충만한 텅빔을 통해 자신을 깨우치는 각성의 소리이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공동체에 대한 관심도 큰 것 같습니다.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는 대안공동체인 오로빌에서의 체험기를 담고 있기도 하고요. 사회문제에 대해 행동도 많이 하십니다. 타인과 나누는 삶, 타인의 삶을 공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로 볼 수 있을까요?

 

개인의 인격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추구를 통해 성숙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글 쓰는 자로서의 정체성은 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인데 치열한 글쓰기로 스스로 이뤄낸 작가적 성취가 자리적 측면이라면 제가 쓰는 글과 글 쓰는 자로서의 저라는 인간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이타적 측면이 동시에 추구될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맺는 관계의 성찰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데, 자리적 성취와 이타적 관계성이 잘 순환되도록 노력하는 자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건 간에 스스로의 성숙을 위해 자주 점검하며 성찰해야 할 평생의 숙제인 듯해요.

 

운동권 학생으로 대학생 시절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로 혁명가들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셨을 것 같은데, 그 때 독서하였던 책들도 지금 시인 김선우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요. 어느 인터뷰에서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은 책 속에 다 있어요”라고 답하셨는데, 외국문학 가운데는 어떤 선생님들이 있었는지요. 어떤 시나, 소설을 감명 깊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십대엔 주로 세계문학의 고전들을 읽으면서 카잔차키스, 카프카에 매료되었던 시절이었고  이십대 초반엔 동서양 철학서, 역사서, 사회과학서들을, 이십대 중후반엔 예술, 미학, 종교, 자연과학 책들을 많이 읽었던 시절이었어요. 문학작품은 일종의 베이스캠프 같은 거라 흔히 말하는 운동권 취향의 작품과 전혀 그렇지 않은 작품들을 함께 좋아했고요. 조세희, 조정래를 읽으면서 오정희, 박상륭을 함께 좋아했고 시집도 마찬가지, 함께 좋아하긴 힘들다고 여길 만큼 성향이 다른 백무산, 이성복을 함께 좋아했으니까요.

 

『닥터 노먼 베쑨』, 『체 게바라 평전』, 『사람아, 아 사람아』같은 책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에선 보르헤스를 열렬히 탐독했고. 시인 중엔 특별히 네루다와 김수영, 백석을 좋아하지만 누가 좋아하는 시인을 물으면 제 대답이 늘 이랬어요. “나는 좋은 시가 좋다.” “한권의 시집에서 좋은 시를 열편 정도 만난다면 횡재한 거다. 열편의 좋은 시를 만나기 위해 한권의 시집을 정성들여 읽는 일이 너무나 즐겁다”라고요. 대학시절 열렬히 탐독했던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머리보다 심장으로 먼저 와서 꽂히던 책들이어서 오독의 여지가 많았지만 오독의 경험까지를 포함해서 마르크스적 에너지를 지금껏 좋아하지요. 그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 철학자였거든요.

 

잡식성 독서를 거쳐 지금껏 저를 계속 자극하는 선생은 고타마 붓다예요. 고타마로 인해 만나게 된 나가르주나, 원효는 삶에 대한 태도를 끊임없이 각성시키지요. 니체, 발터 벤야민, 비트겐슈타인은 제게 묘하게도 문학적 자극을 주는 철학자들인데, 그들은 철학과 문학의 접점, 사회와 문학의 접점에 대해 예민한 사유를 끊임없이 촉구하지요. 소로우나 스콧 니어링은 건강한 삶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스승들이어서 좋고요. 아무튼 저는 여전히 책만큼 훌륭한 학교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어서, 가끔 중고등학생 독자들이 작가님이 우리 나이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거 같아요? 라고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해요. “보나마나 학교는 때려칠 거고, 도서관에서 죽치며 살겠지. 거기가 제일 근사한 학교니까.”  

 

김선우 시를 평하는 여러 관점 중에 에코 페미니즘의 시인이라는 평도 들으십니다. 대지의 여신으로서의 자연과 생의 근원인 여성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 같은데, 시인 김선우가 그리는 시에서의 여성의 모습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

 

음, 에고, 이건 좀 많이 복합적인 설명이 필요한데요. 제 시집들에 출현하는 여성 이미지의 한 단면으로 어미목 시리즈가 있어요. 어미목은 일종의 위그드라실, 우주목이자 신단수의 상상력인데, 한국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신성한 나무인 우주목은 땅과 하늘을 잇는 매개물이자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샤먼의 역할을 해요. 한국 도처의 당산나무 이야기들을 비롯해 동북아 여러 지역과 지구 북반구에 골고루 흩어져있는 우주목 신화들은 장대한 스케일의 여성성, 야성을 품은 모성, 먹이고 보듬어 품어서 생명을 살리는 존재이자 반(反)생명을 조장하는 것에 대해 가차 없이 복수하는 변화무쌍한 가이아성을 동시에 보여주지요. 대상화되어 수동적, 관습적으로 호명되는 마더네이처, 마더유니버스와는 다른 이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어미목 이미지는 제 초기 시집에 강렬하게 등장하는 ‘바리데기’ 이미지와도 상통하는데요.

 

제가 주목하는 여신 바리는 삶과 죽음의 세계를 선순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자예요. 현대자본주의 문명은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지요. 죽음은 음지, 무용함, 피해야 할 것, 부정해야 할 것으로 손쉽게 치부되고 생산, 소비가 가능한 삶만이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삶의 쪽으로 반겨집니다. 하지만 삶은 죽음을 통해, 죽음은 삶을 통해 완전해지는 것이지요. 삶의 총체성 회복을 위해서는 삶과 죽음의 순환사유가 가능해야 합니다.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의 원융무애함이 만져져야 하거든요. 버려진 여자아이였다가 무조여신이 되는 바리 이미지를 통해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 중에는 삶으로부터 소외된 죽음에 대한 적극적 복구의지도 함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치부하는 파편화된 사유의 갱신이 필요하다는 것. 가능한 다양한 방식으로 삶과 죽음이 서로에게 말 걸고, 표현하고, 서로를 놀아야한다는 것. 삶을 놀 듯 죽음도 놀아야 하고 삶과 죽음의 총체가 비로소 삶임을 감각할 수 있는 다양한 예술적 방법들을 찾아내야하고, 그래야 정말로 힘 있는 생명감의 대지가 탄생한다는 것. 들숨과 날숨, 먹기와 배설이 자연스러운 순환을 이루어야 비로소 생명이 건강하게 유지되듯이 삶과 죽음의 순환성에 대한 사유가 자연스러워져야 삶이 진정한 생동감을 가지는 거니까요. 이 모든 것이 제게는 다 생명의 근원 힘으로서의 여성 혹은 여성성에 다양한 결로 닿아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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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진

 

전업 작가로서 김선우의 일상 그리고 관심사는 무엇인지요?

 

2008년에 첫 소설을 출간한 이후로 건강에 부쩍 신경을 쓰게 되었어요. 시만 쓸 때는 몰랐는데 소설을 쓰게 되면서 체력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본래 운동 같은 걸 무지 싫어하는데, ‘체력이 필력이다’를 절감하면서 하루에 한 시간씩 무조건 걸어요. 산책, 자전거 타기, 스트레칭, 백팔배를 중요한 하루 일과로 생각하게 되자 좋은 산책로나 자전거길을 발견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구요. 가장 큰 관심사는 물론 책이죠. 지금 쓰고 있는 책과 다음에 쓸 책! 제 일상이란 게 책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고 그런 삶이 저는 퍽 좋으니까요. 소설과 에세이 쓰기는 전업 작가로서의 저에게 건강한 일상성을 부여해주는 작업이라서 좋고요. 시 쓰기는 일상성에 특별한 차원의 생기를 부여해서 좋아요.

 

저는 성실하게 시를 쓰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보통 시를 몰아서 씁니다. 첫 시집 이후로 쭉 그랬어요. 시는 숨쉬기 같은 것이어서 공기처럼 늘 시적인 순간들을 만나지요. 시적 영감이 오더라도 그것들을 바로 시화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냥 몸에 붙여두지요. 더러 잘 익기도 하고 더러 설익어 떨어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시간을 통과해서 끝내 몸에 남는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참을 수 없이 복받쳐 올라와요. 그러면 그때부터 갑자기 시를 시작하지요. 시인 모드로 몸이 바뀌면 1주일이고 2주일이고 낮 밤 없이 시를 씁니다. 전화도 안 받고 메일 체크도 안하고 외부와 거의 단절된 채로 전혀 다른 시간을 살게 되는데, 보통 두세 달에 한 번씩 그런 시기가 오곤 해요.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굳이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잘 안 하고, 책상 앞으로 출퇴근하는 성실한 글쟁이 일상을 살지요.        

 

강릉에서 대가족으로 자라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강원도에 살고 계시구요. 만일 작가 김선우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대도시에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작가가 아니었다면 택했을지 모르는 가장 가능성 높은 삶의 모습은?

 

저는 시를 쓰면서 다시 한 번 살아보기로 맘먹은 사람이라, 작가가 아닌 저를 상상하긴 어려워요. 하하…… 20대 초중반의 젊은 날 생에 대한 애착이 거의 사라졌던 시기가 있었어요. 삶보다 죽음 쪽에 훨씬 많이 기울어있던, 어떻게 잘 살까보다 어떻게 죽으면 잘 죽을까를 더 많이 생각하던 때가 있었고 바닥을 친 그 허무와 냉소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게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맘먹고 나서부터예요.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미친 듯 습작하던 시절을 통과하면서 간신히 나를, 내 삶을 긍정하기 시작했어요. 시가 나를 구했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시를 쓰면서 간신히 스스로를 구원했다, 라고 말할 수도 있고,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치유했다고 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 작가가 아닌 김선우는 상상불가.   

 

“푸른 종소리”하면 “청각의 시각화”가 아직도 떠올라요. 아무래도 수업시간에 획일적인 방식으로 시를 처음 접했기 때문인지, 아직도 시를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요(웃음). 시인 김선우의 시를 잘 감상하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시험대비용으로 빨간펜 들고 밑줄 쳐가며 시를 학습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습관을 먼저 떨쳐버려야 해요. 분석하고 해석하려고 애쓰기보다, ‘느끼려고’ 해야 해요. 느낌엔 정답이 없잖아요, 하나의 시행에서 수없이 많은 다른 느낌이 올수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왔으니 사람마다 다 다르고 시를 접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한편의 시를 백 사람이 읽으면 1백 편의 시가 되는 게 시의 매력이에요. 같은 시인데도 한 달 전에 읽었을 때와 오늘 읽었을 때가 몹시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어떻게 읽어도 오독이 되지 않는 게 시장르의 가장 큰 매력이니, 느껴지는 대로 읽으세요. 다만 한 가지, 시의 ‘낯섦’을 ‘어렵다’고 치부하고 책장을 덮어버리지 말고, 낯선 여행지를 호기심 가득하게 탐험하는 여행자처럼 그냥 마음을 열고 자신의 느낌에 충실하게 시를 즐기면 좋겠어요. 요약하면, 맘대로 멋대로 읽기!   

 

2008년도에 이어, 올해에도 서울국제작가축제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올해의 작가축제에서 더욱 기대되거나 설레는 지점이 있으신지.

 

작가축제 초기였던 08년도보다 지금은 축제의 내용성이 훨씬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무대공연이 기대가 되는데, 08년도보다 전문적인 공연화 작업이 될 것 같아서 궁금하고 기대도 됩니다. 저와 ‘작가 수다’를 함께할 작가가 핀란드 시인인데, 한국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북유럽 시의 현주소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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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작가축제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가 9월 마지막 주, 대학로에서 그 막을 연다. 축제 준비가 한창인 8월의 어느 날. 설렘으로 잠을 설치는 소풍 전야처럼, 9월의 작가축제가 문득 궁금해진다. 작가축제에서 만나 볼 작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