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븐델
내가 뉴질랜드에 다녀온 것은 작년 이맘때쯤이다. 대략 열흘 정도 머물면서 <반지의 제왕>과 <호빗> 촬영지를 둘러볼 요량이었다. 북스피어 창립 10주년 기념 이벤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여행이었으므로 바칼로레아를 방불케 하는 테스트에 합격한 독자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 함께였다. 이 여행을 위해서 나는 마감일이 한참 남은 원고들을 미리 써두어야 했고 고정출연하는 라디오도 일정을 당길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임무들을 가까스로 처리하고 마침내 여행 전날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순간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내가 유일하게 ‘사부’로 인정하는 모 출판사 사장님이었다. 그는 나에게 원고를 검토해 달라고 했다. 영미권 추리소설인데 처음에는 끌렸지만 다시 보니 판매를 예측할 수 없어서 추리소설깨나 읽은 “너가 읽어보고 감상을 말해줘”라는 부탁이었다.
원고고 나발이고 없는 세상에서 홀가분한 열흘을 즐기다 오려 했는데 이 무슨 아닌 밤중에 전기요금 누진제 같은 상황이란 말인지. 하지만 존경하는 사부의 부탁을 딱 부러지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럼 보내주세요.” 원고는 메일로 왔다. A4로 100매 정도였다. 단행본으로 계산하면 300페이지가량이 될까. 다만 편집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하긴 편집이 되어 있었다 한들 읽을 마음도 없었다. 가져가긴 가져가되 이러쿵저러쿵하는 바람에 못 읽었다고 둘러댈 작정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써야 할 원고 때문에 챙겨가는 책도 두 권이나 있었으니 ‘편집도 되지 않은 원고까지 읽을 시간이 있을 리 없다’고 미리 단정했다. 그러고는 출력한 원고를 샘소나이트 여행용 가방 맨 아래에 말 그대로 처박아 두고, 거기에 원고를 처박아 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뉴질랜드는 땅덩이가 넓은 관계로 캠핑카를 이용하는 여행객이 많다. 이들을 위해 전국 곳곳의 사이트에는 샤워장과 취사장을 무척 잘 조성해 두었다. 캠핑카 여행이 이렇게 쾌적한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당연하다. 해 본 적이 없는데 알 턱이 있나. 호텔을 옮길 때마다 낑낑대며 짐을 쌌다 풀었다 할 필요가 없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까지 얘기하면 과장이겠지만 그로 인해 절약되는 숙박비를 포함하여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용해 줄 용의가 있다. 우리는 성수기의 복닥거리는 호텔을 피해, 느긋하게 드라이브를 즐기며 영화 속에서 엘프들이 살았던 리븐델과 호빗 마을이 조성돼 있는 호비튼(마타마타)과 운명의 산 모르도르가 있는 통가리로 국립공원과 <반지의 제왕> 특수효과를 책임졌던 WETA 스튜디오를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
WETA 스튜디오
한데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오클랜드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캠핑카의 계기판에 경고등이 켜졌는데 대관절 뭐가 고장난 건지 모르겠는 거다. 갓길에 차를 대고 렌트카 회사에 전화해 보니 “냉각수 이상인 듯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긴급 수리를 맡길 수 있는 AS센터의 위치를 전달받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센터에 차를 맡긴 지 한 시간, 기사는 단순 고장이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대로 계속 운전하면 곤란하다는 거다. 상황을 설명하니 본사에서는 “미안하지만 캠핑카를 교체해 줄 테니 거기서 기다려”라고 했다. “얼마나 걸리는데?” “글쎄다, 지금은 퇴근시간이라 사람이 없으니까 내일 아침에 기사가 출발하면 점심때나 도착할걸.” 느긋한 목소리였다. 이 나라에는 한국과 같은 24시간 다짜고짜 출동 서비스 같은 게 없는 것이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대부분의 회사가 업무를 종료하고 퇴근 이후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 실은 이쪽이 정상인 거겠지.
결국 우리는 뜻밖의 장소에서 계획에 없던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목적지인 오클랜드에서 차로 다섯 시간 거리의 타이하페라는 곳이다. 끝에서 끝까지 둘러보는 데 삼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아담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안달복달해 봐야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자고 마음먹었다. 우리는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고 선물가게에서 기념품을 사고 공원 비슷한 곳을 산책하고 장을 봐서 밥을 지어 먹었다. 다섯 시가 되자 상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슬슬 어둠이 깔리고 지나는 이 하나 없는 길거리는 괴괴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당구장도 노래방도 만화방도 심지어 술집의 네온사인도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은 느려도 너무 느렸다. 이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가져온 책 두 권은 벌써 홀랑 다 읽었다. 그제야 비로소 처박아 둔 원고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캠핑카와 마포 김사장
나는 캠핑카의 독서등을 켜고 샘소나이트 가방 안에서 원고를 꺼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매트리스 위에 드러누워 한 자 한 자 시간을 들여 읽어 나갔다. 마치 음식을 급하게 넘기는 습관 때문에 장염에 걸린 남자가 비로소 꼭꼭 씹기를 시작한 것처럼. 이걸 다 읽고 나면 정말로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원고만이 구원이요 티비요 인터넷이었다. 이따금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엉이 비슷한 새가 우는 소리도. 지금도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어둠 속에서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조심조심 산길을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읽기를 마쳤을 때 일행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고즈넉하다’는 형용사가 잘 어울리는 그런 밤이었다. 흥분한 탓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꺼내 물고 조금 전까지 푹 빠져서 읽었던 원고의 첫 줄을 떠올렸다. 이런 문장이었다. “‘위대한 설득자’의 어두운 꿈 속에서는 실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운명’이라는 표현은 상투적이지만 이 소설에 관해서만큼은 꼭 사용하고 싶다. 캠핑카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하룻밤을 보낸 곳이 오클랜드 같은 대도시였다면, 가져간 책이 두 권이 아니라 세 권이었다면 내가 원고를 읽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없었을 것 같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 제일 먼저 ‘사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날의 기이한 체험과 원고에 대한 느낌을 간단히 설명했다.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한국에서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겠지만 레이먼드 챈들러의 어떤 소설과 겨뤄도 뒤지지 않을 걸작이라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이 책은 북스피어에서 내고 싶습니다.” 막무가내로 보였을 수도 있는 내 제안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하여 몇몇 관계자의 양해와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 현재는 북스피어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다. 모쪼록 잘 팔려서 사부님에게 한잔 사드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미남이고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책을 만든다. 가끔 이런저런 매체에 잡문을 기고하거나 라디오에서 책을 소개하거나 출판 강의를 해서 번 돈으로 겨우 먹고산다.
고양이
2017.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