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의 생활은 참 바쁘게 흘러간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다른 많은 이들처럼 수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소비하는 기이한 능력을 갖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작 하루의 끝에 무엇을 보았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몰입의 시간을 갖기 어려워지고, 마치 땅에 발을 착 붙이고 서 있는 게 아니라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왠지 이곳에 살고 있지만 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 나도 처음엔 내가 정말 그곳에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언젠가 아이슬란드의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한 폭포 사진을 보면서 ‘와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하고 믿기지 않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에게 북쪽 끝의 섬나라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고, 물가는 또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아서 그저 그림 속 풍경일 뿐, 실제로 그런 풍경 위를 터벅터벅 걸어볼 엄두가 쉬이 나질 않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갈 수 없으니 북쪽 나라에 대한 호기심은 다시 매일의 생활에 휩쓸려 서서히 잊히게 되었다. 그것이 그때까지 우리가 맺은 소박한 인연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기대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내게는 고마운 이웃이 있다. 바로 워싱턴에 사는 혜진과 민우 부부가 그들이다. 지난 봄 그들에게서 반가운 연락이 왔다. 한 달간 워싱턴에 있는 자신들의 아파트에서 지내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려 전시를 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숙소에다 비행기표까지 제공해 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행여나 그들의 마음이 변할까 선물로 줄 커다란 바나나 그림을 잽싸게 말아 들고서 떨리는 마음으로 워싱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하던 날, 고요하게 떠가는 기내에서 나는 잠시 둥그런 지구를 떠올렸던 것 같다. 왠지 그날따라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던 건지 우연히 워싱턴과 아이슬란드 사이의 거리를 점쳐봤는데, 나는 곧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워싱턴에서 아이슬란드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워싱턴에서라면 6시간 반 만에 아이슬란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순간 나는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느라 한동안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러나 기쁜 마음도 잠시, 문득 아이슬란드에는 햄버거 하나가 5만원은 한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그 추운 나라에서 굶어 죽는 건 아닐까.’ 그러자 나는 다시 덜컥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그렇다면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오래 머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린, 다소 엉뚱한 생존 방법은 바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 멀리 있는 아이슬란드까지 가서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참가하게 된 거예요” 하고 대단한 듯 물어보지만 사실 거기엔 다소 아련한 사연이 있다. 그것은 아티스트로 근사하게 초청되어 간 것이 아니라,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었던 내가, 살인적인 물가를 피해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기 위한 묘책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회화, 비디오, 드로잉, 퍼포먼스, 시나리오 작가 등 예술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얼마간 특정 장소에 거주하며 작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이러한 레지던시는 전 세계에 엄청나게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작가들은 이탈리아 시골 후미진 마을에서부터 베를린과 뉴욕, 아일랜드 어딘가의 구석진 공장에서도 얼마간 머물면서 작업을 할 수 있다. 공간의 성격에 따라 항공료와 작업비를 일부 지원해주는 곳도 있고, 작가가 비용을 전부 부담하기도 한다. 물론 지원을 많이 해주는 곳은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다. 내가 가게 된 곳은 아이슬란드 북부의 끝자락, 올라프스피외르뒤르에 있는 ‘리스트후스’라는 작은 레지던시였다. 때마침 서둘러 제출한 포트폴리오가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레지던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워싱턴에서 아이슬란드로 날아갔고, 40여 일간의 짧은 아이슬란드 생활을 시작했다.
이 책은 아이슬란드 전역을 훑는 활발한 여행기라기보다는 북부 아이슬란드의 어촌 마을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 어느 느릿한 은둔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너무나 고요하던 그곳에서 나는 매일 똑같은 곳을 천천히 산책했는데, 이상하게도 매일 새로운 것들에 감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놀라움은 뭐랄까…… ‘아무것도 없음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었다. 작은 어촌 마을에서 눈에 닿는 모든 풍경은 어딘가 조금씩 비어 있었고, 그 사이로 얼기설기한 여백이 흐르고 있었는데 나는 그제야 ‘텅 빈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체감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그런 헐렁한 것만 느끼고 왔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긁적긁적. 나도 그 이유를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헐렁한 풍경들이 내가 삶을 다시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준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여전히 자연 예찬론자라고 하기엔 날아오는 나방 한 마리에도 기겁을 하는 모순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낯선 풍경 속에 잠시 나를 던져본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주었다.
얼마 전, 아이슬란드를 먼저 다녀온 지인이 내게 말했다.
“살아가다 보면 너도 모르게 문득 그곳의 풍경이 신물처럼 올라오는 날이 있을 거야.”
한국에 돌아와 다시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동참한 나는, 어느 날 망원동 골목길 어딘가에서 문득 아이슬란드의 하얀 풍경이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몸속 어딘가에 굴러다니던 그 풍경이 어떤 작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돌부리에 걸린 듯 툭 하고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그 풍경이 희미해지기 전에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만난 어떤 심심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책을 만들면서 과연 내가 그곳의 웅장한 자연을 발끝만치라도 담아낼 수 있을까, 마음이 몇 번이고 콩알처럼 작아졌다. 또 내게 이렇게 소중한 풍경들이 어느 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느 날 이 책이 세상에 나오고야 만다면, 이 책이 누군가의 작은 그림 주머니 같은 것이 되어주면 참 좋겠다고 상상해본다. 복닥거리는 지하철 어딘가에서 책을 펼치는 그 누군가에게 잠시나마 기분 좋은 심심함을 건네주는 그런 책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올라프스피외르뒤르의 설원이 그 모습 그대로 계속 있어주기를 소망하며.
2016년 봄
엄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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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엄유정 저 | 아트북스
느림의 미학에 빠진 청춘, 아이슬란드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텅 빈 아름다움을 담아내다! 아이슬란드 북부에 위치한 작은 어촌 마을 올라프스피외르뒤르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머물면서 매일 낮과 밤, 두 개의 시간을 살아가는 산의 모습을 옮겨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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