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다큐멘터리 <자작의 딸>은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편성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가문의 딸, 윤채령 박사를 주인공으로 한 내용이었다.
구성과 글을 맡은 나는 윤 박사와 다섯 차례 사전 인터뷰를 했다. 1920년생인 그녀는 고령임에도 보청기를 사용하는 것 말고는 지팡이도 짚지 않을 만큼 정정하고 정신도 맑았다. 특히 우리가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청년기의 기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 기억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도 풍부했고 무엇보다 드라마틱한 삶 자체가 흥미진진했다.
촬영 과정은 순조로웠고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윤채령 박사는 자신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촬영이 끝나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치 숙제를 마친 아이처럼 홀가분하고 편안한 얼굴로 잠자리에 든 뒤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는 윤채령 박사의 마지막 생전 모습을 담은 기록물이 됐다. 우리는 엔딩 컷으로 장례식 장면을 내보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장면은 잊어서는 안 될 시간이 지금도 흘러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작품의 의미를 더해 주었다. 방송은 꽤 호평을 받았다. 정규 방송으로 늦은 밤 시간대에 편성됐던 프로그램은 광복절 당일 오전에 재방송되었다.
<자작의 딸>이 방영된 뒤 박사의 손주 윤성우 이사는 별장으로 촬영 팀을 초대했다. 그는 윤채령 박사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섭외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양수리 별장엔 그의 아내와 아홉 살 된 아들, 일곱 살짜리 쌍둥이 딸들도 와 있었다. 노을 진 강을 배경으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한 정원에서의 바비큐 파티는 상류사회를 다룬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윤성우 이사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초, 중, 고로 이루어진 윤성학원의 주인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만만치 않은 부동산도 물려받았다. 윤 이사의 부친이자 윤채령 박사의 외아들인 윤진수 씨는 1980년대 초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란 윤성우 이사는 조모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대단했다. 우리끼리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촬영 팀 누군가가, 나라도 그렇게 많은 걸 물려준 할머니라면 하느님처럼 떠받들겠다고 했다. 우리는 웃으며 그 말에 공감했다.
윤성우 이사는 다큐멘터리가 지난해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한 고등학교 지원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방송 이전에도 비리 없는 건강한 사학으로 인정받아 온 윤성학원이었다. 설립자 윤채령 박사의 신념이나 철학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윤 이사는 내게 할머니의 평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먹고살기 위한 글쓰기에 매여 있지만, 나는 두 권의 책을 펴낸 소설가다. 내 이력을 파악하고 있는 그는 전 연령층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평전을 원했다. 그동안 간간이 해 왔던 기업가나 연예인의 자서전 대필 작업에 비하면 훨씬 매력적인 일이다. 우리는 조만간 따로 만나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했다.
며칠 뒤 프로덕션 사무실 직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방송을 본 누군가가 내 전화번호를 묻는데 알려 줘도 괜찮은지 묻는 내용이었다.
“무슨 일인데? 사무실에서 처리할 수 없는 일이야?”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나면 여러 일들이 뒤따른다. 내용과 관련된 출연자의 항의 전화도 있고, 반대로 감사함을 표시하기도 하고, 출연자의 지인이라며 연락처를 묻기도 하고, 또는 뒤늦게 내용과 관련된 요긴한 제보를 주기도 하고……. 대부분 누가 대응하든 상관없는 일들이다.
“그게요, 콕 집어서 강 작가님 번호를 알려 달래요.”
엔딩 크레디트에 나간 이름을 보고 일을 맡기려는 건가? 방송을 본 지인들로부터 글이 좋았다는 말을 듣긴 했다. 이게 다 윤채령이라는 인물을 만난 덕분이다. 알려 주라고 한 뒤 바로 전화가 왔다. 노인요양병원 실장이라는 사람은 곧장 용건을 말했다. 다큐를 본 환자 중 한 사람이 나를 불러 달란다는 것이다. 방송국으로 전화했더니 다큐를 제작한 외주업체 연락처를 알려 줬다고 했다.
사실 일반 시청자들은 다큐멘터리의 작가에게는 관심이 없다.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래서 나를 지목해 보자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작의 딸>을 보고서라니 윤채령 박사와 연관된 사람이거나 관련된 일인 것은 분명했다. 윤 박사와 동갑인 할머니로, 이유는 직접 만나서 말하겠다며 함구하고 있다고 한다. 친구일까? 윤채령 박사에 관해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을지 모른다. 평전을 쓰게 될 수도 있으니 윤 박사와 연관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환영이다.
나는 다음 날 경기도 양주에 있는 요양병원을 찾아갔다. 윤성우 이사에게 열정과 성의를 보여 주는 일이기도 한지라 별 성과가 없어도 시간 낭비는 아니다. 산자락에 있는 요양병원은 요즘 기세 좋게 생겨나고 있는 여느 노인 대상 병원들과 비슷했다.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실장에게 할머니에 대해 물었다.
“기대 안 했는데 와 주셨네요. 정말 감사해요. 김수남 할머니는 여기서 박사 할머니로 통해요. 그 연세에 영어도 할 줄 알고 아는 것도 많으셔서요. 총기 있는 분인데 얼마 전 심하게 앓고 나서는 기력이 많이 약해지셨어요.”
실장 말대로 그 나이에 영어를 하고 박사라고 불릴 정도면 상당한 지식인이다. 짐작대로 윤 박사의 유학 시기 친구일 확률이 높다. 진작 알았다면 다큐에 인터뷰 한 꼭지쯤 넣었어도 좋았을 텐데. 이미 방영된 것을 안타까워할 만큼 나는 윤채령 박사의 삶에 매료돼 있었다. 실장은 작은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는 휴게실로 안내했다. 가족과 만나거나 두셋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노인들이 보였다. 잠시 후 간병인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한 노인이 다가왔다. 자그마한 몸집에 백발의 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였다. 얼굴엔 굵고 가는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했지만 단아한 인상이었다. 분명히 초면인데 낯이 익었다. 하긴, 노인이 되면 다 비슷해지기 마련이다.
휠체어가 맞은편에 멈춰 섰다. 실장이 노인에게 찾는 사람이 왔음을 알렸다. 팔걸이를 잔뜩 움켜쥔 할머니가 날 뚫어져라 보았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맞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강해란이라고 합니다.”
나는 꾸벅 인사했다. 노인이 간병인과 실장을 물리쳤다. 단둘이 되고서도 할머니는 말없이 나를 보기만 했다. 온몸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가동하는 듯 형형한 눈빛이었다. 나보다 갑절도 더 산 노인의 눈빛이 내 밑바닥까지 투시할 것 같아 서둘러 용건을 꺼냈다.
“절 보자고 하셨다면서요? 윤채령 박사님을 아세요? 박사님과 동갑이시던데 혹시 친구분이세요?”
“내가 그 자작의 딸이외다.”
내 말을 자르듯 치고 들어온 목소리는 떨리지만 또렷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그 윤채령이란 말이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윤채령 박사님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
나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낯이 익은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윤채령 박사와 비슷했다. 아주 많이. 자매일까? 아니, 나이가 같으니 쌍둥이? 하지만 윤 박사에겐 여자 형제가 없었다.
“그 사람은 가짜요.”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어투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소용돌이치듯 끓어오르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멍해져 노인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보면 볼수록 윤채령 박사와 닮았다. 만에 하나 앞에 있는 할머니가 정말 자작의 딸 윤채령이라면 그녀의 삶을 방송으로 만든 우리, 아니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다큐멘터리의 실질적 기획자는 나였다.
자료 조사차 20여 년 전 시사 계간지를 뒤지다 우연히 윤채령 박사 인터뷰를 읽은 게 시작이었다. 나라에서 주는 훈장을 받고 난 뒤에 한 인터뷰였다. 그녀가 설립한 윤성학원은 명문 사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도 ‘자작의 딸로 태어나 한국 교육계의 대모로 살다’라는 눈길을 끄는 제목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호기심을 끈 건 ‘한국 교육계의 대모’가 아니라 ‘자작의 딸’이었다. 반만년 역사에서 유럽식 귀족 칭호가 사용된 때는 일제강점기밖에 없다. 경술국치 뒤 일본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나 조선 왕족들에게 조선총독부에서 작위를 주었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친일파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해방 뒤에도 친일파 자손이 선대의 영화를 이어 누리는 예는 너무 흔하기에, 자작의 딸과 교육계의 대모라는 간극에는 별다른 의문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자랑이 아닌, 자작의 딸이라는 이력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그간의 세월에 관심 가져도 좋을 만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윤 박사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는 일제강점기와 맞물려 있었다. 잡지에 실린 그 시기의 이야기는 짧지만 강렬했고, 간략하게 기술된 만큼 상상력을 자극했다. 90대 중반의 나이라 고인이 됐을 거라고 추측했는데 윤채령 박사는 생존해 있었다.
나는 제이프로덕션 정 대표에게 광복절 특집 기획안을 냈다. 몇 년 전 방송국을 나와 외주 프로덕션을 설립한 그는 대학 선배였다. 윤채령 박사의 인터뷰 기사와 내 기획안을 본 정 선배는 탐탁지 않아 했다.
“유관순 같은 열사도 아니고, 만주 벌판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뭐 특별한 게 없잖아. 게다가 자작의 딸이면 빼도 박도 못하는 친일파 자손인데 광복절 특집으로 다뤘다가 괜히 구설에 오르는 거 아니야? 생존 인물은 더 골치 아프고.”
“사람들은 이제 국사책에서 골백번 본 것 같은 인물이나 이야기에는 감흥을 못 느껴요. 일제강점기 자작의 딸이면 금수저라는 이야기잖아요. 사람들이 왜 욕하면서도 재벌 나오는 드라마를 보겠어요? 특별한 삶에 대한 동경이나 호기심 때문이라고요. 그동안 작위를 거부하거나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남자들 이야기는 많이 나왔어요. 그런데 여성 인물로는 공부한 신여성이나 기생을 다룬 적은 있어도 귀족의 딸은 없었던 것 같아요. 윤채령 이야기는 그동안 다뤘던 일제강점기 인물들하고 차별화가 돼 관심을 끌 거라고요. 인물을 발굴한다는 의미도 있고요.”
나는 정 선배를 설득했고 결과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랬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4개월 동안 만났던 윤채령 박사와 내 눈으로 확인한 자료들이 거짓일 리 없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안 가요. 증거라도 있나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임을 다했다는 듯 노인의 표정은 급격하게 허물어졌다. 눈에서 빛이 사라지자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삭정이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갑자기 정신이 든 듯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간병인을 부르더니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의례적인 작별 인사도 없이 멀어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롱당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찜찜했다.
“김수남 할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실장이 맞은편에 와 앉으며 물었다. 분명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 듯한 실장을 보자 짜증이 치밀었다.
“저분 정상이신가요? 글쎄 당신이 다큐에 나온 분이라고 하시네요. 그분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내 목소리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연락한 것에 대한 항의가 담겨 있었다. 실장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치매 전조 증상 같다고 했다. 치매. 그 단어가 너무 반가웠다. 정정하고 깐깐하던 윤채령 박사도 가끔씩 엉뚱한 소리를 할 때가 있었다. 아무 이상 없는 게 오히려 신기한 나이였다. 그런데 치매라고 해도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는 궁금했다. 그럴 만한 접점이나 단초가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을 다른 인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김수남 할머니 가족은 어떻게 되나요?”
나는 별 의미 없이 묻는 체했다.
“아무도 안 계세요.”
노인과의 만남이 허무하게 끝났음을 안 실장은 공연히 시간을 빼앗았다며 미안해했다. 이것저것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나는 참고 돌아왔다. 아는 만큼 신경 쓰이는 법이다. 그래, TV 보다가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나오니까 착각한 거야. 치매에 걸리면 없던 이야기도 막 꾸며 낸다잖아. 나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방송에 나간 윤채령 박사가 가짜여서는 안 된다. 아니, 가짜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김수남 할머니의 표정과 목소리가 잊히기는커녕 더욱 생생해졌다. 당장이라도 쫓아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캐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한가한 처지가 아니다. 칠순에 가까운 친정어머니와 중2짜리 딸을 부양하기 위한 글들이 빚쟁이처럼 줄 서 있었다. 헤어진 전남편한테서 양육비를 받아 내기란 은행에서 대출받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며칠 뒤 요양병원 실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김수남 할머니가 다시 날 불러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전하지만 바쁘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마치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즉시 답했다. ‘지금 출발할게요.’ 문자를 보내자마자 모든 걸 팽개치고 뛰쳐나갔다.
가는 내내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아 초조했다. 정정하던 윤채령 박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처럼 노인의 건강은 당장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김수남 할머니는 자신이 윤채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상태로 돌아가시거나 정신을 놓는다면 평생 할머니의 목소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보자마자 노인의 건강부터 묻는 내게 실장은 우려했던 대로 할머니에게 치매 증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그래도 아직은 양호한 상태세요. 증상이 더디게 진행되길 바라는 수밖에요.”
잠시 뒤 나는 김수남 할머니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2인실 방엔 할머니 혼자였다. 처음 보였던 그 눈빛으로 돌아온 노인이 내게 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소?”
이유 모를 압도감에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동안 이어진 만남의 시작이었다. 또한 앞으로 펼쳐질 긴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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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
‘이 시대 최고의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로 꼽히는 이금이는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이후, 30여 년 동안 진한 휴머니티가 담긴 감동적인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소천아동문학상과 윤석중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여러 편의 작품이 실리기도 한 그는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초월하여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너도 하늘말나리야』,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유진과 유진』, 『사료를 드립니다』, 『청춘기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