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빛의 제국>의 경계인, 배우 지현준
평양에서 남파된 공작원. 하지만 10년이 넘도록 특별한 지령도 받지 못하고 어느덧 남한의 평범한 남자가 돼버린 김기영. 그런 그에게 24시간 안에 평양으로 돌아오라는 이메일이 도착하면서 김기영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가려진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글ㆍ사진 윤하정
201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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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빛의 제국>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남파된 공작원. 하지만 10년이 넘도록 특별한 지령도 받지 못하고 어느덧 남한의 평범한 남자가 돼버린 김기영. 그런 그에게 24시간 안에 평양으로 돌아오라는 이메일이 도착하면서 김기영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가려진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작품은 김영하 씨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데다 배우 문소리, 지현준 씨가 주연을, 또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 오를레앙국립연극센터 예술감독인 아르튀르 노지시엘이 연출을 맡아 개막 전부터 화제였는데요. 하지만 공연을 보고 나온 관객들의 표정은 영 개운치 않습니다.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연출이었기 때문일까요? 이럴 때면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은 도대체 작품에 어떻게 접근했을지 궁금해지죠. 그래서 배우 지현준 씨를 직접 만나 일단 객석에서는 좀 힘들었다는 말부터 건네 봤습니다.

 

“물론 예상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대 위에서 고민을 안 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고, 그런 결정이 새로운 걸 보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연출이 ‘관객들을 설득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는 작품에 초대하는 느낌으로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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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본 뒤 찬찬히 생각해 보니 단순히 분단된 남북의 현실을 다룬 건 아니더군요. 개개인의 단절을 더 크게 얘기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무엇을 표현하고 있나요?

 

“경계인? 과연 이 극장에서 이뤄지는 연극이라는 건 허구인가 진실인가, 김기영이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김기영인가 지현준인가... 북한에서 20년, 남한에서 20년을 산 사람은 북한사람인가 남한사람인가... 관객들과도 이렇게 자세히 얘기할 수 있으면 재밌을 텐데. 저희들은 흥미롭고 견고하게 이 작품에 참여하고 있고, 비록 좀 힘들더라도 그 안에서 뭔가를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상황과 인물이 영상으로도 꽤 비중 있게 나옵니다. 사실 무대는 매일매일 달라지는데 미리 찍은 영상을 보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일단 제 얼굴이 너무 싫어서 소리 누나가 예쁘게 나온 것만 보고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영상도 볼 때마다 다르더라고요. 마음에 안 든다면 그 느낌을 갖고 시작해서 뭔가 다른 걸 하면 되니까요. 이런 것도 있어요. ‘나 출근한다.’는 대사가 있는데, 그러면 보통 출근하는 연기를 해야 해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영상으로 출근하는 장면이 나오니까 그걸 보면서 ‘어, 나 출근한다!’라는 식으로 달라지는 거죠. 관객들도 이걸 알고 보시면 더 재밌는데.” 

 

외국인 연출가와 작업하는 건 어땠나요? 새로운 점도 있고 힘든 점도 있었을 텐데요.

 

“초반에는 불안했어요. 예전에도 외국 분과 작품을 한 적이 있는데 언어가 갖고 있는 장벽은 넘기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함께 작업을 하면서 그런 불안이 사라졌어요. 굉장히 수평적인 교류라고 할까요? 어른이 고개 숙여서 듣는 게 아니라 그냥 어린이처럼 들어주는 느낌이 좋았어요. 공통의 목표를 향해 서로 믿고 가고, 정확하게 좋다 아니다를 말하고. 어차피 연극은 사람이 만드는 건데, 그런 새로운 교류와 작업이 훌륭했던 작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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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하는 객석 분위기와 달리 무대 위 배우들은 안정돼 보이던데 연출과 배우 간에 무척 견고한 교류가 있었나 봅니다.

 

“네, 연출 선생님이 가시면서 편지를 주셨는데, 저더러 ‘아이 같은 기질에 늙은 영혼의 소유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얘기가 너무 와 닿았어요(웃음). 많은 것이 다른 프랑스 사람과 한국 사람이 만나서도 함께 작업을 하면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경계들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북한 분들과도 시간을 갖고 얘기하면 그런 교류가 이뤄지지 않을까요.”

 

남파된 공작원 김기영,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인데 캐릭터는 어떻게 잡았나요?

 

“제가 그걸 연출한테 물어봤더니 지현준이라고 얘기했어요(웃음).”

 

그럼 본인에 대해 무척 고민했겠네요?

 

“엄청 고민했죠. 전작 <시련>에서도 그랬는데, 배우에게 가장 괴로운 역할은 자신과 비슷한 역할인 것 같아요. 혼란스럽고 무겁고, 뭔가 있으면 감추고 싶고. 그래서 너무 힘들었는데, 이번에도 지현준으로 하라는 거예요(웃음). 이게 제가 풀어야할 숙제인가 봐요. 하지만 이번 작품을 하면서 많은 답을 얻었어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게 나니까 어떻게 하면 연기를 덜 할까. 내가 알고 있는 북한 사람을 드러내 보이는 건 실수였던 것 같고, 그냥 내 안에 있는 목소리로 해야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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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김기영은 특정 맥주와 축구, 그리고 스시를 좋아합니다. 문득 취향이라는 것도 자유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던데, 지현준 씨가 그동안 참여한 작품을 보면 노래, 춤, 연기를 다 하시잖아요. 도대체 어떤 취향을 가진 겁니까(웃음)?

 

“모두 배우로 엮이는 것들이죠. 바이올린은 어릴 때 8년 정도 배웠었고, 그래서 나중에 피아노도 좀 배웠고. 배우를 하면서 몸이 중요하다는 걸 알아서 무용단에 들어가서 3년 정도 현대무용을 했어요. 타고나지 않아서 뭔가 하나로 승부할 수 없으니까 배우는 거예요(웃음). 배우면 재미가 있고, 그걸 얻게 되면 다음 작품에서 다른 나로 출발할 수 있으니까요.”

 

2012년에서 2014년 이런저런 신인상을 휩쓸었잖아요. 연기 10년 하고 받은 신인상인데 이후 배우로서, 또 작품을 선택할 때 달라진 게 있을까요?

 

“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좀 더 넓어질 수 있었던 계기였죠. 뭔가 많이 하려고 했다면 그때부터는 쳐내는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작품을 선택할 때는 ‘내가 지금 삶에 있어 어떤 입장인가, 뭘 고민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요. 그래서 <빛의 제국>은 지금 제 상황에 가장 맞는, 정확하게 필요한 작품인 것 같아요.”

 

기영이라는 인물도 본의 아니게 자기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어쩌면 실제 취향이 된 거잖아요. 배우라는 롤에서 앞으로 어떤 캐릭터를 가장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나요?

 

“배우는 정체성이 없는 것 같아요. 내 매력과 장기를 가지고 무대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그때그때 물처럼 바뀔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했던 작품을 보면 모두 다른 캐릭터였고, 그래서 나름 공부하고 연구해서 다가가면 그 인물과 일치하는 부분이 저한테도 반드시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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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는 내내 지현준 씨에게서는 작품에 대한 확신과 연출가 아르튀르 노지시엘 씨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습니다. 한 편의 연극을 만들어내는 사이 그들에겐 얼마나 끈끈한 교류가 이뤄진 걸까요? 이 작품은 오는 3월 27일까지 서울에서 공연된 뒤 5월에는 프랑스로 무대를 옮겨 공연될 예정입니다. 그곳 관객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문득 우리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그것 역시 한국과 프랑스라는 두 나라의 경계겠죠. 연출가의 의도가 명확했고, 배우들이 그것을 잘 구현했다 해도, 그 무대를 보고 웃고 웃을 수 있는 몫은 관객의 것, 관객의 취향이니까요. 작은 컵라면 하나를 후루룩 들이마신 지현준 씨는 그날도 확신에 찬 모습으로 무대에 섰고, 4월에는 연극 <지구를 지켜라>와 또 한 편의 무용작품으로 또 다른 자신을 보여줄 예정입니다. 지금의 자신을 고민하는 그를 무대 위에서 확인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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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