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자의 3원칙 <검사외전>
세상 인심이 그렇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정의라는 게 과연 순수한 자들의 순수한 피와 땀에 의해서만 가능할까. 그 물음을 던져보고 싶은 것이다.
글ㆍ사진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201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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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검사외전>은 쉬운 진실을 추구한다. 차장검사 우종길(이성민)의 음모에 빠져 교도소에 갇힌 전직 검사 변재욱(황정민)의 복수 계획은 출소한 사기범 한치원(강동원)에 의해 한끝의 오차 없이 집행된다. 진실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 변재욱은 위기를 맞지만 꿋꿋하게 일어나 법정으로 향한다. 

 

쉬운 진실 찾기는 이것만이 아니다. 2002년 서울중앙지검에서 일어난 피의자 사망 사건을 기둥 소재로 삼지만 그 이상은 없다. 검사가 천식 환자인 피의자를 폭행하는 장면부터 차장검사가 피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장면, 교도소 식당에서 죄수들이 일제히 담배를 피워 무는 장면까지 모두 현실과 거리가 멀다. 오롯이 주연배우 강동원만 빛나는, ‘강동원의, 강동원에 의한, 강동원을 위한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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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검사외전>의 한 장면

 

그런 면에서 현실감을 주는 인물은 변재욱이나 한치원, 우종길이 아니다. 특수부 부장검사 양민우(박성웅)다. 우종길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양민우는 시간이 갈수록 호감 캐릭터로 변해간다. 그가 귀엽게 느껴지는 건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속이 들여다보이는 때문이다. 그의 덕에 변재욱과 한치원이 이겼기 때문이다. 양민우가 우종길에서 변재욱-한치원으로 말을 갈아타지 않았다면 상황은 역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영화에서 주목한 것은 양민우의 변신 과정이었다.

 

변신은 휘문고 출신 검사를 사칭한 한치원이 양민우에게 접근해 우종길에 대한 증인 출석요구서를 승인한 것처럼 가짜 사인을 하면서 시작된다. 곤혹스런 상황에 놓였지만 그때까지도 양민우에겐 계속 우종길과 같은 길을 갈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었다. 양민우가 우종길과 갈라서겠다고 결정적으로 마음먹은 건 한치원의 귓속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고 나면 인지도 급상승하고… 모래검사 아시죠?”

 

양민우는 현실주의자요, 기회주의자다. 그는 철저히 상황에 충성한다. 그는 늘 이기는 쪽에 베팅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배신을 귀엽게 받아들인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양민우의 뒤를 따른다. 양민우의 변심에 당혹감을 나타내던 재판장 최 판사는 대세가 기운 것을 아는 순간 우종길과 거리를 둔다. 우종길의 뒷배 역할을 하던 강 의원도 “(우종길과) 전화 몇 번 한 것 말고는 없다”고 한다.

 

세상 인심이 그렇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정의라는 게 과연 순수한 자들의 순수한 피와 땀에 의해서만 가능할까. 그 물음을 던져보고 싶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정의감은 복수심에서 진화한 것일 수도 있다. 복수를 한 결과 정의로워졌다면 그것 역시 정의가 아닐까.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듯 정의도 개인적 복수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실현되는 건 아닐까.  

 

현실은 순정만화가 아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말하듯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다. 양민우도 선량한 시민이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얼마쯤은 자신의 정의감을 속일 수도 있는, ‘복잡하게 나쁜 우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양민우의 가슴 속에도 일말의 정의감은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회주의자들이 돌아설 때 혁명이 성공하는 것처럼 현실주의자들이 정의 편에 설 때 정의가 이긴다. 어쩌면 정의가 승리하는데 필요한 것은 현실주의자, 기회주의자들을 정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과 전술인지 모른다. 성패는 ‘저스티스 리그(정의의 사람들)’가 얼마나 일을 제대로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주의자(기회주의자)의 행동양식을 잘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우선 떠오르는 것이 ‘로봇 3원칙’이다. 로봇과 인간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로봇은 인간을 모방해 만든 것이고, 인간 역시 유전자 지도에 새겨진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기계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만든 로봇 3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내가 재구성한 ‘현실주의자(기회주의자) 3원칙’은 이러하다.

 

제1원칙: 자신을 지켜야 한다. 
제2원칙: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에게 유리한 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남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검사외전>에서 내가 얻은 교훈이다. 자, 이제 머리를 맞대고 현실주의자들을 끌어들일 방법을 작당해봄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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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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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ling

2016.03.06

와~ 영화에 대한 해석이 멋집니다 ^^ 공감돼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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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인

2016.03.04

권석천 기자님, 첫 칼럼 잘 읽었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못 봤지만 기회주의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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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iu22

2016.03.03

권 기자님의 칼럼을 채널예스에서도 보게 되다니! 넘 좋네요! 잘 읽고 잘 소화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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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