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폭스 파인더> (원작 다운 킹 / 연출 박지혜 / 손상규, 양조아, 양종욱, 최희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비오는 날, 주디스와 사무엘 부부의 농장으로 ‘폭스 파인더’가 찾아온다. 폭스 파인더란 말 그대로 ‘여우 수색 조사원’으로, 이 세계에서 여우는 자연재해와 전염병의 온상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농장은 여우에 감염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폭스 파인더가 이들을 조사한다. 여우는 실제로 목격되거나 포획된 적 없지만 그것은 여우가 그만큼 교활하기 때문이며, 여우를 부정하는 것은 여우에 감염되었다는 증거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통치에 이용한다는 설정은 이강백의 희곡 <파수꾼>과도 겹쳐 보인다. 잘 만들어진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이 연극이 인상 깊었던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소 직접적이지만 현 상황에서 충분한 의미를 발휘하는 은유, 최소화된 소품으로도 극대화된 효과를 이끌어내던 조명, 보기 드물게 입체적이던 여자 캐릭터 등. 그중에서도 이 리뷰는 계간홀로가 중시하는 (비)연애 감정-관계 위주로 쓰였음을 미리 밝힌다.
출처 : 플레이디비
폭스 파인더 윌리엄은 19세의 청년으로, 어릴 때부터 국가기관에서 훈육 되었다. 그는 늘 미소를 띤 얼굴에 정중하지만, 국가 권력의 대리자로 언제든 서늘하게 얼굴을 바꾸며 주디스와 윌리엄 부부를 압박한다. 부부는 처음에는 여우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윌리엄이 이들 부부가 겪은 아들의 죽음이 여우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내놓는 순간 남편 사무엘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내내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며 우울증과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것이 폭우 등과 겹쳐져 농장의 생산량 하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여우 탐색에 나서고, 여우에 대한 환청과 환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아내 주디스는 폭스 파인더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언제나 친절하게 그를 대하고, 따스한 심성으로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 윌리엄을 연민한다. 철저하게 폭스 파인더로 길러진 윌리엄은 이런 주디스에게 이성적인 감정과 성적 욕망을 느낀다. 여우에 감염되면 ‘음란’하고 ‘변태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는 점을 근거로 사무엘과 주디스의 성생활에 대해 질문하기도 하고, 그런 욕구를 느낀 뒤에는 “나는 깨끗하다”며 스스로 맨몸을 채찍질한다.
극의 후반부, 윌리엄은 자신의 스킨십을 피하는 주디스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저한테 잘해주셨잖아요.” 주디스는 당황스러워하며, 더듬거리며 말한다. “그냥…잘해준 거예요.”
윌리엄은 주디스의 친절을 자신에 대한 호의, 접근에 대한 허용, 그리고 연애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주디스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디스는 분명히 말한다. ‘그냥’ 잘해준 것이라고. 이때 ‘그냥’의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주디스의 친절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수준이며, 또한 권력자에 대한 공포로 인한 것이다. 주디스의 친절은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윌리엄이 가진 권력은 점점 미쳐가는 사무엘을 보며 농장을 빼앗기고 공장에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떠는 주디스에게 그가 하는 대사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덮어줄 테니 “나랑 자요”. 분명한 거부의 의사를 밝혔던 주디스는 그 협박에 입술을 꾹 깨물고, 자신을 내던지듯 바닥에 눕는다. 윌리엄은 주디스의 친절을 빌미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권력으로 약자의 섹슈얼리티를 착취하는 폭력일 뿐, 결코 로맨스일 수 없다.
출처 : JTBC
한때 인기를 끌었던 JTBC의 프로그램 <마녀사냥>에는 상대의 태도가 ‘그린 라이트’인지 아닌지 묻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점원이 나에게만 웃어주었다’거나 ‘나에게만 다른 인사를 했다’는 식의 형식적인 친절조차 연애의 낌새로 읽으려는 황당한 사연도 꽤 있었다. 이러한 도식은 일상에서도 매우 흔하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인간은 인간에게 친절할 수 있다. 모두가 그렇다면 참 따뜻한 세상이 될 텐데. 특히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언제나 싹싹하고 친절하고, 배려하도록 훈육 된다.
나는 말투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에게 콩 타작 하듯 털렸고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하고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친절은 자주 ‘꼬리치는 것’이 된다. 양말을 사러 갔다가 싹싹하게 인사했다는 이유로 안에 들어와서 차 한잔 하고 가라며 손목을 잡는 아저씨로부터 진땀을 흘리며 탈출했고, 1살 위의 오빠를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저것도 개성이다’고 했다가 커플 구도로 몰리기도 했다. (택시, 택시에 관해선 너무나 할 말이 많으므로 넘어가자.) 친절을 그린 라이트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를 <연애가능군/불가능군>으로 대상화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우리 사회의 관계가 연애로 획일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기승전연애! 친구도 동료도 그냥 놔두지 않고 모두가 도달해야 하는 최종 목적지인 양 제시되는 연애!
한편 이러한 형식상의 친절이 아니라, 진짜 상대에 대한 호감이 친절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호감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연애감정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자기가 그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뇌가 핑크색인 건지, 왜 무슨 낌새라도 잡으면 연애와 연결하지 못해서 안달. 아오 피곤하다 증말.
물론 연애 대상으로서 호감이 있으면 당연히 친절하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친절이 ‘연애의 가능성’이 되려면, 우선 상대방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둘 사이의 기류를 판단하는 성의가 필요하다. 사실, 두 사람 사이의 흐름은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안다. 이것이 그냥 친절한 것인지, 나에 대한 호감인지,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인지, 나에게만 이러는지.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수신자는 그럴 수고를 할 생각이 없고 오류는 여기서 발생한다. <폭스 파인더>에서 윌리엄은 냉혹한 시스템 내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성의 친절 자체가 낯선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인지와 주디스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면, 그것을 섣불리 그린 라이트(시쳇말로 ‘끼부림’이라고도 한다)로 읽고 덥석 만지려 드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극 전체에서 주디스를 견인하는 중심 감정은 남편 사무엘에 대한 감정과 농장을 지키겠다는 의지이다. 윌리엄이 주디스를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대상으로서 조금만 존중했다면 모를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흘리는’ 경우를 들고 와서 부들부들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오해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런 사랑이 넘치는 이에게 설레어 잠 못 이룬 적, 있다. 백아연의 노래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를 듣고 내 얘기라고 쌍수 들고 환영한 사람이 한둘이겠냐며. 그러나 선은 분명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선을 넘은’ 친절을 베풀어, 그것이 너무나 명백한 그린 라이트로 느껴진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단계까지는 당신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권리를 침해하거나, 곤란한 방식으로 구애해도 된다는 프리 패스는 아니다. 그린 라이트인 줄 알고 직진했는데 아니면, 신호등을 때려 부수는 대신 통행 방향을 바꾸어야 하듯.
멋대로 거리를 좁혀서 다가간 뒤 상대방이 거절하면 “나한테 잘해줬지 않느냐”, “니가 먼저 꼬리 쳤다”, “이러려고 그런 거 아니야?”는 전형적인 성폭력 가해자의 변명이나 레퍼토리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성폭력 가해자들은 자신이 ‘조금 거친 연애’를 한다고 생각한다.) 친절하면 곤란해지는 세상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판단은 상식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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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