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은 흔히 좋은 작품, 참신한 작품, 자신의 틀을 깰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합니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어떤 공연을 좋아할까요? 아마도 국내 관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무대에 가장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지만 그 배우를 따라 여러 공연장을 드나들다 보면 관객들 역시 좋은 작품, 색다른 무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그 안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게 되죠. 그런 차원에서 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배우와 관객의 기대를 다방면에서 만족시킬 수 있는 멋진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2013년 영국 올리비에어워즈에서 최고신작상, 연출상, 남우주연상, 조명상, 무대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했고, 2015년 미국 토니어워즈에서도 최고작품상과 연출상, 남우주연상, 조명상, 무대상 등 5개 부문을 휩쓴 연극. 수상 내역을 보면 바로 작품,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배우와 무대의 힘이 강한 공연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텐데요. 그래서 이번 무대에서 더욱 돋보였던 배우입니다. 자폐 소년 크리스토퍼로 또 한번 자신의 틀을 깬 배우 전성우 씨를 공연이 끝난 뒤 연습실에서 만나봤습니다.
“퇴장이 딱 한 번 있어요. 그때 땀 닦고, 물마시죠. 아무래도 공연 전날부터 부담이 되기는 해요.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무대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으니까 항상 신경을 쓰고요.”
인터미션까지 3시간 공연. 공연 한 번 하고 나면 몸살이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사량도 상당하던데요.
“많죠. 양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보다는 이 아이가 혼자서 말을 많이 해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도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라서 그런 부분이 어렵고, 대사도 더 많게 느껴질 수 있어요.”
연극 <한밤개..>는 잔인하게 살해된 옆집 개를 발견한 자폐증 소년 크리스토퍼가 범인을 밝히는 과정에서 자신의 닫힌 세계를 깨고 외부 세계로 발을 내딛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자폐라는 특이 상황은 확실한 캐릭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뻔할 수 있어서 고민이 많았을 텐데, 크리스토퍼에는 어떻게 접근했나요?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참고하고. 그런데 자폐증은 일반적인 모습이 없더라고요. 아이의 성향이나 자라온 환경 등에 따라 너무 다양해요. 그 안에서도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이.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사람의 눈을 보지 않는다거나 만지는 것을 싫어한다, 애완동물을 좋아한다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 크리스토퍼라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했어요.”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인데 사실상 무대 위에 특별한 세트는 없습니다. 대부분 조명과 영상으로 장면이 연출되고, 때로는 배우들이 하나의 소품이 되기도 하는데요. 객석에서 보기에는 무척 참신하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연습 때 그려지지 않는 모습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무대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디에 올라가거나 탄다는 걸 생각만 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가장 낯설었어요. 막상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 리허설 시간이 부족해서 심리적인 불안감도 있었고, 연습실에서 했던 도구들보다 훨씬 무거워서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고요. 하지만 어떤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 다가가기는 어렵지만 정말 이 아이처럼 생각하는 거죠. 결국은 등장해서 퇴장할 때까지 이 아이의 감정을 어떻게 연결하고 표현할지가 중요했어요.”
아빠 역의 김영호, 심형탁 씨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만큼이나 호흡을 맞추는 데도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달라요. 영호 선배님은 저희 부모님과 3~4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요. 실제로 20대 딸이 있는 아버지이다 보니 따로 뭘 하지 않으셔도 느껴지는 게 있죠. 형탁이 형은 미혼에게서 느껴지는 투박한 아빠의 느낌이 있고요.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아이는 두 분 모두에게 낯설지만, 아빠가 돼 본 경험의 유무는 무대에서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죠.”
이 작품처럼 공연하면서 특별한 인물, 특별한 상황을 만나는 재미가 크겠죠?
“그게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항상 새로운 것을 통해 내 안에 있는 것이든,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든 도전하고, 깨 나가는 재미가 있어요.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요. 그걸 깨고 싶었어요, 목표는 서른 전에.”
사람들이 어떤 이미지로 바라본다고 생각하세요?
“좋아하시는 캐릭터를 보면 굉장히 여린 이미지가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수동적이거나 연약한 느낌으로 많이들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오히려 강한 임팩트가 있는 캐릭터나 아직까지는 시도하지 않았지만 정말 악 중에 악을 해보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지금까지 맡은 역할들이 <쓰릴 미>의 나,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순호,
“그렇죠,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약하고 여리죠. 하지만,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순호도 누구보다 순수하고 강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주도할 수 있었고, <쓰릴 미>의 나도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위에 있고 그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이렇게 직접 만나 보니 예상보다 강인함이 느껴져서 놀라기는 했습니다.(웃음). 실제 성격은 어떠세요?
“무척 조용한 편이에요. 예전처럼 내성적이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주도권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활달한 편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여리지도 않죠?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여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친구들이 제가 출연한 작품을 보면 많이 웃어요. 한 예로 <쓰릴 미>에서 ‘그’가 저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겉으로 드러난 제 이미지를 깼던 작품이 <베어 더 뮤지컬>이었던 것 같아요. 캐릭터가 굉장히 외향적이고 활동적이라서 처음에는 관객들이 의아해 하셨어요. 생각했던 상대역 피터가 아니라 제이슨이라서. 연기를 할 때 스스로는 불편하지 않았지만, 제가 가진 음색이나 체격이 제이슨의 성향과는 맞지 않아서 그걸 극복하는 게 어려웠죠.”
<한밤개..>에서 크리스토퍼는 15살이고, 그만큼 앳돼 보이지만, 실상 20대 후반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20대에 굉장히 좋은 작품을 많이 하셨네요.
“얼마 전 친구와 얘기하다 보니까 20대가 며칠 안 남았더라고요(웃음). 정말이지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많이 하게 될지는 몰랐어요. 주위에서 때로는 일상적이고 편한 역할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데, 로맨틱코미디에는 마음이 안 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시대극이나 내용이 굉장히 깊거나 센 작품을 해왔어요.”
실제로 로맨틱하지는 않나요(웃음)? 로맨틱코미디물은 할 수 있는 연령대가 제한적이잖아요.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남자랑 있을 때 더 캐미가 있대요, 큰일이에요(웃음). 저도 로맨틱코미디 좋아하는데, 제가 나이보다는 좀 어린 이미지여서 로맨틱코미디에 주로 나오는 작가나 백수 같은 역할에는 잘 안 맞더라고요. 대본에 보면 29살로 설정이 돼 있어요. 분명히 제 나이인데, 제가 실장으로 보이지는 않잖아요(웃음). 물론 작품을 하게 되면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노력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연극 <한밤개..>를 잘 풀어가다 보면 30대가 돼 있을 텐데요. 30대에는 어떤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싶으세요?
“저만의 색깔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영화든 연극이든 색깔이 뚜렷한 분들이 있잖아요. 최근에는 다양한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 매체 오디션도 봤어요.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매체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공연을 통해 저를 보면서 위로를 얻는다고 한두 분 말을 걸어올 때마다 ‘와,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나?’ 용기를 얻게 되고, 자신감도 생겼어요. 다양하고,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매체에서는 또 새로운 시작이더라고요. 물론 배우는 인생이 오디션이기는 하지만요.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제 색깔을 찾아야겠죠. 계속 보고 싶은 배우, 앞으로가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공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똑같은 작품을 서로 다른 배우가 연기하면서 다른 재미와 감동을 이끌어낸다는 점이죠. 그 차이를 확인하면서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리스트를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만의 믿고 보는 배우, 이른바 ‘믿보배’가 탄생하는 것이겠죠. 연극 <한밤개..>의 크리스토퍼 전성우를 보고 나면 물론 그의 다음 무대가 궁금해질 겁니다. 20대 전성우 씨가 자신의 이미지를 깨고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했던 노력은 이미 누군가의 ‘계속 보고 싶은 배우’가 되는 초석이 되지 않았을까요? 옆집 개의 죽음을 파헤치려다 크게 성장한 크리스토퍼는 마지막에 말하죠. ‘그건 제가 뭐든 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관객들은 크리스토퍼에게도, 그리고 전성우 씨에게도 ‘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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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