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택시 드리벌>, 합승 하실래요?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라고 읊조린 이는 자이언티뿐만이 아니었다. 약 20년 전, 영화감독 장진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물론 그는 ‘아버지는 택시 드리벌’이라고 했을 테지만. 1997년 초연한 연극 <택시 드리벌>은 장진 감독이 택시 기사였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집필한 작품이다. 아버지를 통해 들여다봤던 소시민의 삶이 조각조각 박혀있다.
개인택시 한 대를 가지면 출세했다는 말을 듣던 시절이 있었다. 1종 면허를 딴다는 건 그런 성공에 한 발짝 다가섰다는 의미였고, 빚을 내서라도 택시를 뽑는 건 돈을 벌기 위한 투자로 여겨지던 때였다. 장진 감독의 아버지 세대가 살아낸 시대였고 <택시 드리벌>의 덕배에게 주어진 세상이었다. ‘taxi driver’를 ‘택시 드리벌’이라 읽는다고 해서 창피할 일은 없었다. 덕배처럼 짧은 가방끈을 가진 사람은 흔했으니까. 그래도 폼나게 살고 싶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그 음악을 듣는 자신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멋져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서울로 상경해서 택시 운전을 하다 보면 금세 자리도 잡고 돈도 벌 줄 알았지만, 성공과 꿈은 요원했고 피로와 염세는 짙어졌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차 안에 갇힌 채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하는 오늘이 반복되고 있었다. 지난밤의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승객을 태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밤의 어둠 뒤에 숨어 끈적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승객과 만나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했다.
일상의 무게만큼이나 그를 짓누르는 것은 지키지 못한 연인 화이에 대한 기억이다. 고향을 떠나오며 약속했던 마음과 재회는 빛이 바래버렸다. 덕배는 끝내 연인의 마지막을, 자신의 순정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 앞에서 덕배의 현재도 무너져 내렸다. 자괴감에 빠진 그는 새로운 사랑을 감히 꿈꾸지 못한다. 택시 안에 남겨진 핸드백을 보면서 어쩌면 다시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뚜렷해지는 화이의 기억 때문에 섣불리 용기를 낼 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순정을 잃었다
<택시 드리벌>은 서로 다른 시간의 이야기를 잘 버무려놓은 작품이다. 덕배는 지나간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삶에 투영된 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택시의 승객들은 이 시대의 군상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갑질을 일삼는 강남 사모님, 정치와 지역감정에 대한 이야기로 대립하는 아저씨, 성형수술 때문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아가씨 등 이곳의 일상을 증언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독특한 캐릭터와 재치 있는 대사를 앞세워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한다. 덕배가 가지고 있는 상처와 일상의 고단함 가운데에서도 <택시 드리벌>이 코믹극으로써 매력을 잃지 않는 이유다.
막이 내릴 때 쯤 관객들은 우리의 삶이 택시 기사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덕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하루는 수많은 타인들로 기억된다. 누군가를 만났는지, 누구와 함께 웃었는지, 어떤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일상은 요약된다. 갇혀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택시 기사만의 운명은 아니다. 생존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벗어나고 싶은 곳이다. 그 안에 있을 때면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곤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뛰쳐나가기란 늘 버거운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자리에 매여서 비슷한 시간들을 쌓아간다.
화이에 대한 덕배의 기억도 낯선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화이는 순수했던 시절의 상징이고 순정 그 자체다. 그것은 사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느 샌가 멀어져 버린, 그래서 잊어버린 꿈과 시간과 마음과 장소의 동의어다. 그런 순정을 지켜내지 못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모두 순수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택시 드리벌>은 관객에게 기분 좋은 드라이브의 경험을 안겨준다. 덕배의 택시에 합승한 관객들은 서로 다른 빛깔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운행을 마칠 때가 되면 켜켜이 쌓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낸다.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요즘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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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