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여행하다 뜬금없이 짜장면이 당겼던 적이 있었다. 인종차별을 하루에 두 번이나 당한 재수 없는 날이었다. 그날 짜증나서 짜장면이 떠올랐는데 유럽 어디서 먹을 수 있겠나 싶어 매우 난감했다. 굶다가 위장이 트위스트를 출 때쯤 한국식당을 찾아냈으나 짜장면인 척만 하는 이상한 음식을 만 원이나 내고 먹어야 했다. 다음부턴 기분 메롱일 땐 마카롱이나 먹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이런 안 웃긴 이야기를 한 이유는 한국에서 헤비메탈을 하고 싶다면 느낌이 그와 비슷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추구하기 보단 음종차별(?)을 하는 이 척박한 음악 풍토에서 헤비메탈이 좋으면 고생인 것이다. 실력 있는 헤비메탈 밴드가 혜성처럼 등장해, 음원 차트를 씹어 먹고, 꾸준히 음악성의 지평을 넓혀가며 롱런 궤도에 오르길 기대하기란 유럽에서 관록 넘치는 짜장면을 찾는 것만큼 어려울 것 같다. 아니 사회에 갖은 부조리가 만연해 있는데 그것 좀 대차게 까는 시끄럽고 저항적인 음악이 드문 것도 부조리 아닌가. 마카롱을 연속으로 열여덟 개 먹고 싶다.
좋다. 헤비메탈은 철 지난 장르일 수도 있다 치고, 음악 중에서 반항심 넘치는 장르가 뭘까 생각해봤다.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지만 발라드나 댄스곡으로는 좀 난감할 것 같다.
‘갑의 횡포를 엿 먹이고 싶다/ 힘 세면 다냐/ 같이 좀 살잔 말이다~’ - 이런 노랫말을 가진 감미로운 발라드가 있다면? 상상하다 집어치웠다. 문법이 도저히 안 맞는 거다.
‘마카롱 값이 너무 올라/ 혈압이 올라요/ 정부에 닭대가리들만/ 있는 건가요~’ - 걸그룹이 섹시 안무와 함께 이렇게 노래한다면? 할 리도 없고, 안 어울리고, 출연도 안 될 거고, 기사도 안 실릴 거고, 심지어 잡혀갈지도 모른다. 안 되는 거다.
아니 그럼 뭐로 반항하나? 힙합이나 포크도 반항을 담당하기 적절한 장르이긴 한데 요즘 힙합은 깊이 있는 비판적 힙합정신 대신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윽박지르기 느낌만 좀 강해져 아쉽고, 포크는 저항보다 서정을 많이 추구하는 듯 해 복숭아를 찍어먹을 힘도 없어 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개인적으론 아직 헤비메탈이 장땡인 것 같다. 답답한 무언가를 깔 때는 시끄럽고 화끈해야 먹어주는 거다. 조곤조곤 얘기하면 부조리는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헤비메탈은 우리나라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린 적도 없었고 참으로 꾸준히 소외되어 온 장르다. 혹자는 헤비메탈이 무식하고 시끄럽고 지겨워서 이미 멸종한 장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웬걸, 홍대 인디 무대엔 아직도 수십 팀의 헤비메탈 밴드들이 오르고, 여전히 들을만한 수준 높은 앨범들이 나오고 있으며, 음지에서 록정신과 저항정신을 발딱 곧추세우고 있다.
오랜 세월 짱짱한 존재감으로 국산 헤비메탈의 자존심을 지켜온 블랙홀이 중심을 잡고 있어서 이게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블랙홀은 그냥 록 밴드가 아니고 관록의 록밴드다. 독보적, 역대급, 전설의 레전드, 꾸준 갑, 짱이에요 등의 수식어를 아낌없이 써도 되는 대한민국 1세대 헤비메탈 밴드다. <깊은 밤의 서정곡>이 85년생이니 까마득한 세월이 느껴지지 않는가. 30년 동안 헤비메탈 한 우물을 파며 멸종되지 않고 버텼다는 것도 놀라운데 작년에 이 노장밴드가 9년 만에 정규 9집을 내며 ‘우리 아직 안 죽었어’까지 과시했다. 그들은 오로지 헤비메탈이 좋아서, 꾸준히 험난한 외길을 달려왔고 가공할 실력으로 수많은 명곡들과 전설의 라이브 무대를 남겨왔다. 또한 이 글의 주제에 걸맞게 블랙홀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터프한 곡도 여럿 작곡했다.
9집에 실린 오늘의 주제곡 <라이어>는 어떤 거짓말쟁이를 대놓고 씹는 노랫말을 담고 있다. 헤비급 욕심꾸러기이자 뻥의 대가였던 어떤 정치적 인물이 떠오르면서 들을 때마다 속이 시원해지는 음악이다. 그가 저질러 놓은 삽질이 도처에서 똥냄새를 풍기는데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가는 부조리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이 신나는 헤비메탈이 대신 욕하고 엿을 선사해줘 속이 풀린다. <라이어>가 요렇게 안 까줬으면 홧병에 걸렸을 것만 같다. <라이어>의 노랫말에는 마치 80년대 민중가요 부르듯 굵직하게 따라 부르게 되는 부분이 있다.
돈과 힘만이 세상의 진실, 성가신 정의여 숨을 거둬라?
It′s a lie I can′t believe, It′s a lie I don′t believe
부조리가 만연한지 너무 오래되었고 동조하지 않으면 거지같은 꼴을 당하는 세상이다 보니 사람들은 저항할 생각조차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가 넘치는 사회지만 반항하기 싫거나, 반항하는 데 지쳐버린 것 같다. 그래서 헤비메탈의 팬이 많지 않은지도 모른다. 록 페스티발마다 청중이 넘쳐날 만큼 해방구가 절실한 시대에 헤비메탈의 이 희미한 입지란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세상이 시종일관 더러워도 분노할 줄 모르면 우리는 홀딱 망해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홀 형님들이 영원한 현역 밴드로 계속 저항하면서 존재해 주기를, 이 땅에서 정의도 숨을 거두지 말고, 좀 아프지 말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칼럼을 마친다. 이제 짜장면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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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시골아낙
2015.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