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발발, 새로운 국면을 맞는 정명공주
광해군은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그들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했다. 의구심과 불만, 적대감이 치솟는 그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인목대비 폐위를 강행하는 광해군의 마음 자체가 의구심과 불만, 적대감으로 가득했다.
글ㆍ사진 신명호
2015.08.12
작게
크게

hwajung.jpg

드라마 <화정>에서 등장한 인조.

 

 

광해군을 향한 적대감, 인조반정으로 터지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대의명분은 역모였다. 비록 어머니라고 해도 왕에게 불충하면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효와 충의 윤리 중에서 어느 것을 상위에 두느냐의 문제였다. 여기서 광해군은 충(忠)을 우선시했다. 하지만 충을 명분으로 내세우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충이라는 명분하에 아버지나 어머니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구심과 불만, 적대감으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광해군은 자신의 뜻에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모조리 불충으로 몰아 처벌했다. 그 결과 폐모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폐모를 요청하는 목소리는 나날이 높아졌다. 그래서 인목대비의 폐위는 절대다수의 뜻이라고 광해군은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로 광해군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이 인목대비의 폐위를 요구하고 선동했다. 즉 인목대비 폐위는 절대다수의 뜻이 아니라 광해군과 그 측근들의 뜻이었을 뿐이었다. 광해군의 위력 앞에 절대다수는 겉으로 찬성했지만 속뜻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은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그들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했다. 의구심과 불만, 적대감이 치솟는 그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인목대비 폐위를 강행하는 광해군의 마음 자체가 의구심과 불만, 적대감으로 가득했다. 그런 광해군의 마음이 지지자들에게는 같은 의구심과 불만, 적대감으로 펴졌지만 반대편 사람들에게는 그와는 다른 의구심과 불만, 적대감으로 퍼졌던 것이다. 이런 의구심과 불만, 적대감이 마침내 인조반정으로 터져 나왔다. 반정 주체들은 ‘폐모살제(廢母殺弟)’를 거사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죽인 광해군을 패륜아로 규정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정에 호응했다. 억눌린 속마음들은 그렇게 표출되었다.

 

 

정명공주 21세, 인조반정 발발 

 

인조반정은 1623년 광해군 15 3월 12일 한밤중에 거사되었다. 이해에 정명공주는 21살, 인목대비는 40살, 광해군은 49살이었다. 능양군 인조 이 반정에 성공하여 창덕궁을 장악했을 때는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광해군은 북쪽 궁성을 넘어 도망간 뒤였다. 반정군의 함성 소리에 광해군이 잠자리에서 깨어났을 때 시위하던 신하들은 대부분 달아나고 없었다. 광해군은 궁궐 주변에 불길이 치솟자 반정이 일어난 줄 알고 사다리를 타고 북쪽 궁성을 넘어갔다. 광해군은 젊은 내시에게 업힌 채 도망가다가 사복시 개천가에 있던 의원 안국신의 집에 숨어들었다.

 

광해군은 그때까지도 누가 반정을 일으켰는지 알지 못했다. 광해군은 안국신의 친척 정담수를 시켜 주모자를 알아오게 했다. 그러나 정담수는 광해군의 은신처를 밀고해 버렸다. 능양군의 지시를 받고 이중로가 광해군을 체포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왕은 초상난 사람의 복장으로 변장해 있었다. 그러나 이중로는 대뜸 알아보고 앞으로 나가 절을 올렸다. ‘너는 누구냐?’는 광해군의 질문에 ‘신은 이천부사 이중로입니다.’라고 대답한 이중로는 왕을 번쩍 안아 말에 태웠다. 광해군은 창덕궁의 약방에 갇혔다. 광해군은 그 상태에서도 누가 거사했는지 궁금했다. ‘오늘의 거사는 누가 한 것이며 어떠한 사람을 추대하였는가?’라는 광해군의 질문에 ‘추대한 분은 바로 왕실의 지친인 능양군인데 인목대비의 명을 받들어 반정한 것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편 인목대비는 한밤중에 군사들이 들이닥치자 혹 광해군이 정명공주를 뺏으려 보낸 사람들은 아닌가 의심했다. ‘공주는 이미 죽어서 담 밑에 묻었다.’ 말하며 인목대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능양군이 직접 서궁을 찾았다. 3월 13일 저녁, 능양군은 말을 타고 창덕궁을 떠나 서궁으로 갔다. 뒤에는 남색의 작은 가마에 태워진 광해군이 따르고 있었다. 흰색의 개가죽 남바위를 쓴 광해군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서궁에 도착한 능양군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인목대비를 만난 능양군은 엎드려 한참을 통곡했다.

 

세검정_인조반정 때 반정에 참여한 이괄, 이귀, 김자점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 칼을 씻었다는 일화가 전해 온.jpg

세검정의 모습.

인조반정 때 반정에 참여한 이괄, 이귀, 김자점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 칼을 씻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소재.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다음 편에 계속...>

 


 




 

img_book_bot.jpg

화정, 정명공주신명호 저 | 생각정거장
요즘 드라마 〈화정〉으로 인해 17세기 조선왕실의 역사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당대 여성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될 만큼 뛰어난 필체로 남자보다 더 기개 있는 작품을 후대에 남긴 정명공주. 파란만장한 그녀의 일대기를 통해 17세기 혼란의 조선, 궐에서 일어난 음모와 암투의 역사를 살펴보고 어떻게 위기를 이겨냈는지 역사 속 이야기를 살펴본다.

 

 

 [추천 기사]

- 역사학자 신명호 교수가 말하는 진짜 정명공주 이야기
- 노래 속 전파 찾기
- 선조의 승하는 자연사일까, 타살일까?
- 『B파일』 밤새 안녕하셨나요
- 조선 최고의 여성 서예가, 정명공주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명공주 #화정 #조선
0의 댓글
Writer Avatar

신명호

1965년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 역사를 특히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강원대학교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공부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왕실사를 전공하여 『조선초기 왕실편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를 거쳐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