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어리석음
어리석을 데는 어리석고, 어리석지 말아야 할 데는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글ㆍ사진 박수밀
201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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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을 데는 어리석고,
어리석지 말아야 할 데는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愚於其可愚, 不可愚於其不可愚.

박팽년, 〈우잠〉

 

‘어리석음’이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다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때론 어리석어야 할 때가 있다. 바보 같은 선택일지라도 계산하지 말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좇아야 할 때가 있다. 어리석어야 할 때 어리석을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지혜로운 어리석음’이 아닐까.


박팽년(1417~1456)은 성삼문과 더불어 사육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말수가 적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열일곱 살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유성원, 이개, 하위지 등과 함께 집현전의 관원에 발탁되었다. 집현전에는 유능한 젊은 학자가 많았는데 그 가운데도 박팽년은 학문과 글쓰기, 문장이 남보다 뛰어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집대성’이란 별명을 얻었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뒤를 이었다. 문종이 병이 들자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어린 단종을 무릎에 앉히고 당부했다.


“이 아이를 잘 부탁하오.”


그날 모두 술에 취해 잠들었는데 문종은 손수 집현전 학사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학사들은 감격하며 단종을 잘 보필하기로 맹세하였다.


문종의 뒤를 이어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야심가였던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박팽년은 크게 절망하여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지려 했다.


이때 지우인 성삼문이 뜯어말렸다.


“아직 상왕(단종)이 살아 계시니 살아 있어야 훗날을 도모할 것이네.”


박팽년은 친구의 설득에 마음을 돌이켰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박팽년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세조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에 글을 올릴 때는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신臣이라는 말 대신 거巨(이미지11)라고 쓰거나 ‘아무개’라고만 적었다. 나라에서 준 녹은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


1456년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복위하려는 일을 계획했으나 밀고자가 생겨 발각되고 말았다. 일을 꾸민 이들이 모두 잡혔다. 박팽년은 순순히 자백했다. 평소 그의 재주를 아꼈던 세조는 그를 살리고 싶었다.


“마음을 고쳐 나를 섬기면 살려 주겠다.”


박팽년은 말없이 웃으며 그저 “나으리”라고만 할 뿐이었다. 세조는 화가 났다.


“네가 이전에 이미 신하라고 말했고 녹까지 먹었으니 지금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다.”


박팽년은 말했다.


“저는 상왕의 신하이지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신하라고 일컬은 적이 없고 녹을 먹은 일도 없소이다.”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정말로 신하라고 쓴 글이 하나도 없었다.


세조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했던 그는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죽기 전 그는 주위 사람을 돌아보며 “나를 난신이라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도 모두 능지처사되었다. 박팽년의 아버지를 비롯한 동생과 아들 모두 죽음을 당했고 그의 아내는 관비가 되었다.


한 가정사로 보자면 삼대가 멸문을 당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결말이었다. 세조의 편에 붙어 승승장구한 신숙주를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후세는 신숙주를 변절자라고 부르게 되었고 박팽년은 사육신으로서 충절의 상징으로 불리게 되었다.


숙종 대에 그의 관직은 복구되었으며 영조 대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정이라는 시호도 얻었다. 박팽년은 그 시대엔 역적이었으나 후세엔 충신이 되었다.


그가 죽기 전 한 지인이 물었다.


“공은 어쩌자고 어버이에게 불효하여 스스로 화를 자처하는가?”


그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소.”


어린 단종을 지켜 달라는 문종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박팽년은 그야말로 어리석었으나 어리석지 않았던 진정한 ‘바보’였다.


다음은 그가 남긴 시조 한 수이다.

 

아름다운 물에서 금이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며
곤강에서 옥이 난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겠는가
아무리 사랑이 중요하다고 한들 임마다 따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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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공부벌레들의 좌우명박수밀,강병인 저 | 샘터
옛 지식인들의 삶을 이끈 한마디와 그 문장을 오롯이 드러내 주는 인생의 한 국면을 담은 책이다. 아침저녁으로 눈과 귀로 접하는 해와 달, 바람과 구름, 새와 짐승의 변화하는 모습에서부터 손님과 하인이 주고받는 자질구레한 말들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공부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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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밀

한양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연암 박지원의 문예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옛사람들의 문학에 나타난 심미적이고 실천적인 문제 의식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음미하고, 인문적 관점으로 재사유하는 데 천착해 왔다.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새기고 싶은 명문장》,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연암 산문집》, 《살아 있는 한자교과서》(공저) 등의 책을 썼다.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