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많은 여인
악극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 명자의 인생은 ‘어쩌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기구하다. 식을 올린 다음날 남편 동탁은 집을 나가버린다. 유명 배우가 되어 돌아오겠다며, 부모님과 동생을 결혼한 지 이틀 된 아내 명자에게 맡겨둔 채 서울로 도망친다. 결혼식 다음날 남편이 떠나버린 여인의 삶이 어땠을까? 안 봐도 뻔 한 비디오다. 명자는 병든 시아버지의 병수발도 모자라 매서운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당하고 집안의 생계도 책임진다. 참으로 딱한 팔자건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견뎌낸다. 자신을 버린 무능한 남편을 탓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간다.
악극 <봄날은 간다>는 전형적인 한국형 뮤지컬이다. 한 많은 한국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녀 삶을 따라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슬픔을 악극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시킨다. 한국전쟁, 월남전 참전 등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 청실홍실, 꿈이여 다시 한 번, 여자의 일생, 만리포 사랑 등과 같은 노래 역시 그런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애환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건과 노래들을 통해 그 시절의 감성을 무대 위로 옮겨온다. 여기에 최주봉, 윤문식 등 대표적인 악극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극의 감칠맛을 더한다.
봄날은 온다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갈꼬” 라고 말하는 명자의 마지막 대사는 지난 30여 년 동안의 그녀 삶을 함축적으로 말해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혹은 미워하면서 오롯이 타인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감내해 온 명자.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했다. 가장 사랑해야할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살아 온 그녀의 인생은, 누군가를 위해 평생 희생하며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더 애잔하고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20대인 내가 삶의 모진 풍파를 겪어 온 명자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명자가 남편이 돌아올 거라는 ‘희망’으로 그 모든 것을 버텨냈지만, 내게는 그 희망이 조금 고집스러운 ‘미련’으로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온 그녀의 태도는 충분히 존경스러웠다.
쓸쓸히 눈이 내리는 걸 지켜보던 그녀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위로를 해줄 자격이 되진 않지만, 만약 그녀가 내 어머니라면 자식의 입장에서 이런 얘기를 진심으로 해주고 싶었다. 눈이 내리고 쌓이고 그러다 사르르 녹아서 다시 봄날이 온다면 이제 정말 당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라고.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모님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할 악극 <봄날은 간다>는 6월 21일까지 디큐브 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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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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