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상위 3%를 향한 욕망
연극 <모범생들>은 날카롭고 잔인하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을 보는 느낌을 준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내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가감 없이 파헤친다. 연극을 보고 난 뒤 느껴지는 찝찝함과 불쾌감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오랫동안 연극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건 아마도, 연극에서 말하고자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우리 현실과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 명문외고 3학년 명준과 수환은 목적 없이 수단으로 공부를 한지 오래다. 그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기계처럼 공부 한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란 명준은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가 원하는 건 상위 3%가 되는 것. 자신이 3%가 되지 못한다면 평생 97%의 삶을 삶아온 자신의 부모처럼 살 것이라 믿는 명준은 작은 성적 변화에도 예민하게 굴며 불안해한다. 늘 성적에 초초해 하던 두 사람은 결국 컨닝을 모의하고, 여기에 전학생 종태와 반장 민영이 합류하면서 상황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
두 명에서 시작했던 모의는 세 명, 네 명을 넘어서 급기야 반 전체가 가담하는 판으로 커진다.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지만 결코 컨닝을 멈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들 중 가장 욕심 없는 종태가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하지만 이미 명준은 이성을 잃은 상태다. 정신이 나간 채 소리를 지르고, 울고 애원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컨닝을 성공하고자 한다. 비뚤어진 욕망으로 가득 찬 명준은 더 완벽하게 더 치밀하게 컨닝을 할 계획을 세우고 반 전체가 모두 합류한 컨닝을 밀고 나간다.
사회의 축소판
연극 <모범생들>에선 4명의 주인공들만 무대에 등장하지만 사실 더 많은 등장인물들이 존재한다. 어둠 속에서, 뒤에 숨어서 그들의 컨닝을 모른 척 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컨닝을 모의한 것을 알면서도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눈 감은 선생, 성적을 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함께 동조한 반 아이들. 모두가 이 엄청난 범죄에 가담한 가해자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피해자인 척 가증스럽게 상황을 벗어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당한 사건을 고발하지 않고 모른 체 하는 사람들은 소름끼치도록 서로가 서로를 닮아있다. 상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면서도 자신은 깨끗하다고,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믿는 그들의 모습은 비열하다 못해 불쌍해 보인다.
<모범생들>은 권선징악이라던가 해피엔딩의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컨닝을 주도했던 명준, 수환은 10년 후, 모두 부러워 할 성공을 이룩한 사람들로 성장해 있다. 검사, 회계사, 국회의원 보좌관 등등. 원하던 대로 상위 3%의 삶, 아니 상위 0.3%의 삶을 살고 있다. 어른이 된 그들은 10년 전 보다 더 치밀하고 계산적이다. 자신들의 비열한 과거는 그저 지나간 일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일말의 죄책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익을 계산하고 욕망에 충실한 채로 사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추악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연극 <모범생들>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교실이라는 곳으로 축소시켜 비유적으로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사람들,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강자들의 권력. 해결되지도, 해결 될 수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상황들. “저흰 모범생들이잖아요” 한 마디로 상황을 벗어나는 명준의 가식적인 웃음이 오랫동안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한참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사회는 무조건 1등, 무조건 최고만을 강조한다. 엘리트에 의한 사회 구조 역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개천에서 용난다’ 와 같은 말은 불가능한 현실이 된지 오래다. 2007년 초연된 <모범생들>이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현실을 파헤치는 <모범생들>은 8월 7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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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빈
현실과 몽상 그 중간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