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가 곧 ‘스릴러’인 세상에서
몇 번 말했지만, 한국에서 장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주 고생스러운 일이다. 성공을 장담하기도 힘들고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얻기도 힘들다. 특히 그 장르라는 게 공포나 스릴러라면 성공의 확률은 한없이 낮아진다.
로맨스는 고정 독자층이 있다. 판타지나 무협도 ‘아직까지는’ 믿을 만 한 구석이 존재한다. SF는 다른 장르에 비해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이점을 지닌다. 추리는 지적이라는 이미지를 풍기고.
나머지 두 장르, 그러니까 공포와 스릴러는 가장 마이너하다. 외국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면 거의 팔리지 않는다. 혹평을 받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팔리는 장르는 ‘팩션’이다. 역사소설이라고도 하고 대체역사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역사소설이면서 추리 장르를 빌렸거나 로맨스 장르를 빌렸다면 어느 정도 흥행을 보장할 수 있다. 헌데,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런 작품들을 추리와 로맨스에 넣고 싶지는 않다. 팩션은 판타지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팩션이 잘 팔리는 이유는 추리와 로맨스 때문이 아니라 ‘역사’라는 요소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뭐,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하기로 하고, 아무튼 살아남기가 힘든 만큼 한국 작가의 괜찮은 스릴러를 만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이 땅에서 공포와 스릴러가 유독 천대받는 이유는 그리 멀리에 있지 않다. 현실이 곧 공포요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출근길, 스마트 폰으로 포털 사이트 앱을 실행한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뉴스이다. 내가 잠들어 있던 순간, 혹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일을 하고 있던 순간에도 수십, 수백 건의 사건사고가 일어난다.
누군가는 인질극을 벌이다 살인까지 저지른 후에도 되레 큰소리를 치고, 어딘가의 아파트에서는 화재가 일어나 주민들이 대피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반찬을 남긴다는 이유로 어린 아이의 뺨을 때린다. 한 소년은 국제 테러조직에 가입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고, 정부에서는 교묘한 방법으로 세금을 올린다. 그리고 정말로 무서운 것은 그 어디에도 희망적인 뉴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니 굳이 공포나 스릴러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안부를 묻는 이 질문이 섬뜩하게 들리는 나라, 바로 2015년의 대한민국에서는 뉴스보다 더 독한 스릴러를 써야 겨우 독자들의 관심을 끌 판이다. 그러나 어쩌랴. 현실은 늘 소설보다 더 극적인 것을…….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한 스릴러 소설, 『B파일』
여기 『B파일』이 있다. 2013년에 출간 된, 한국 작가가 쓴 한국 스릴러 소설이다. 배경은 현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몇 년 전부터 각광 받아온 경성도 아니다. 작품 속에는 바로 어제 내가 지나쳐온 도로가 나오고 지명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우리가 출퇴근 전쟁을 벌이는 지하철을 탄다. 지금 이 순간이라도 인터넷을 켜면 접할 수 있는 사건들에 분개한다. 대도시 서울에 대한 묘사는 눈앞에 그려질 듯 생생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활극은 금방이라도 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작품은 ‘현재’만이 가질 수 있는 생동감으로 살아서 꿈틀거린다.
먼저, 지금 이 시대를 스릴러로 그려낸 최혁곤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전작인 『B컷』으로부터 수 년, 작가는 그 긴 시간동안 역사 속으로 도망가지 않고 바로 이 세계의 지옥도를 다시 한 번 묵묵히 그려냈다. 작가가 들이댄 현미경 속 한국은 차별과 오해가 존재하고, 시기와 욕망이 가득하며, 음모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다.
네 명의 주인공, 은행원과 킬러, 그리고 고참 기자와 신참 기자의 시선으로 진행되다가 결국 하나로 모이게 되는 이야기 구조는 작품에 긴장감을 더하고 얽히고설킨 사건을 더욱 흥미롭게 보여준다. 게다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서로의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진행되는 모습도 무척 짜릿하다.
미덕은 또 있다. 주된 이야기와 관계가 없는 주변부의 묘사가 무척 섬세하다. 덕분에 현실감이 더해진다.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스쳐지나가는 등장인물들 모두 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할 것만 같다.
주인공들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던지는 대사나 농담, 하다못해 생각까지도 모두 한국적이다. 외국 작품을 번역한 듯 어색한 문장도 없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산과 강남과 조선족의 의미가 분명한 만큼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 또한 분명하게 와 닿는다.
미국의 스릴러는 전문적이면서도 쉽다. 빨리빨리 읽힌다.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강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요즘 각광받는 북유럽의 스릴러는 차갑고 묵직하다. 미국에 비해 훨씬 암울하고 어둡다. 일본의 스릴러는 얌전한 반면에 송곳처럼 날카롭다. 어느 순간 폐부를 찌르는 솜씨가 제법이다. 그렇다면 한국 스릴러의 특징은 무엇일까? 예로 삼을 만 한 작품이 턱없이 부족해서 뭐라 특정 짓기는 힘들지만 『B파일』만 놓고 봤을 때는 아주 분명한 특징을 읽을 수 있다.
질척거리고 끈끈한 느낌
한국사람, 나아가 한국 사회의 특징이랄 수 있는 이 묘한 감성을『B파일』은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네 명의 주인공 중 어느 하나도 ‘쿨’하지 않다. 긴박한 순간에 빛나는 농담을 날리는 사람도 없고, 깊게 고뇌하며 멋들어지게 폼 잡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분노로 치를 떨지도 않는다. 주인공들은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늪 안에서 허우적대기 바쁘다. 정(情)과 관습과 인맥과 국가라는 거대하고 질척질척한 진흙탕에 빠진 인물들은 그저 이 빌어먹을 현실을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다. 그래서 더 스릴이 넘친다.
『B파일』은 한국 스릴러 소설의 기준이라 부를 만 하다. ‘Why’보다 ‘How’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낸 모습도 좋았으며 반전의 강박에 시달려 전체적인 구조와 정서를 망치지 않은 점도 좋았다. 액션과 추격전을 통해 스릴과 서스펜스를 불러오는 솜씨도 훌륭했다. 과장되지 않고 있을 법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도 칭찬할 만 했다. 사실,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이게 굉장히 힘든 일이다. 언제나 덜 쓰는 것보다 더 쓰는 것 때문에 작품을 망치게 되니까 말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스릴러야말로 현재의 문제를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날카롭게 지적할 수 있는 장르라고.
나는 최혁곤 작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 사회의 심장 깊숙이 칼을 찔러 넣어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질척질척하고 끈적끈적한 핏빛 리얼리티를 미치도록 재미있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바로 이 작품『B파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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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파일최혁곤 저 | 황금가지
의문의 살인사건 뒤에 숨겨진 거대 기업의 음모를 파헤치는 추리 스릴러로서, 밀리언셀러 클럽 한국편 시리즈 24번째 편이다. 생생한 묘사와 빠른 전개, 탄탄한 구성으로 극찬을 받았던『B컷』의 작가 최현곤이 야심차게 내놓은 최신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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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우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앙ㅋ
2015.01.26
투명우산
2015.01.24
나이기를
2015.01.23
허황된 공포보다 현재할 것 같은 스릴러가 더 무서워서 즐기지 못한답니다.
좋아하는 이들에게 많이 사랑받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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