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인상(印象)
가슴 한구석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춘천을 떠올린다. 나에게 춘천의 첫인상은 낡은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지금은 전철이 생기고 출퇴근도 가능한 곳이 됐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리가 꽤 느껴졌다. 춘천 터미널에 내려 들이마시는 숨은 서울의 것보다 높고 차가웠다. 그때부터 나는 그 호반의 도시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언제나 빠뜨리지 않는 곳은 소양강 댐이었다. 굽이진 길을 넘는 버스 뒷자리에 앉아 종점까지 가노라면 왠지 모를 아득함이 차올랐다. 배를 타고 오봉산에 들어가 청평사를 거닐기도 했다. 그곳에선 풍경소리에 기대어 태극 문양이 새겨진 소맷돌을 만지작거리다 배 시간에 맞춰 내려왔다. 이렇지도 않고 저렇지도 않은 한적한 골목길을 거니는 것도 춘천에서의 일정 중 하나였다. 공지천에서는 자전거를 탔다. 사방으로 퍼지는 안개 낀 풍경이 앨범 속 빛바랜 사진 같았다. 숯불에 구운 닭갈비와 거친 면발의 메밀 막국수는 당연하지만 특별한 식사였다. 명동 중앙시장에서는 주전부리를 샀고, 그걸 들고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바스락대는 검은 봉지를 끌어안고 깜빡 졸다 깨면 다시 아침에 떠나왔던 서울이었다. 하루가 단꿈 같았다. 가슴 한쪽에 쏟아지던 비도 어느새 그쳐 있었다.
흐리게 지워지는 풍경 너머 어디쯤
지난 날 그대에게 엽서를 보내던 우체국이 매몰되어 있을까
결국 춘천에서는 방황만이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다
「안개 중독자」, 이외수
오타루의 인상(印象), 그리고 러브레터
홋카이도에도 춘천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곳이 있다. 항구 도시 오타루(小樽, Otaru)다. 홋카이도의 개척을 이끈 부두와 탄광, 무역 등으로 번성했던 한때의 영광을 간직한 도시다. 많은 이들이 오타루를 이렇게 노래했다. ‘눈 내리는 항구, 로맨틱한 운하의 도시, 오르골과 유리공예가 빛나는 골목길들…….’ 그런 기대를 안고 처음 오타루를 찾았을 때 나는 무척 실망했다. 운하는 한 블록 정도밖에 안 되게 짧았고, 어딘가에서 하수구 냄새도 올라왔다. 거리는 관광버스에서 쏟아진 객들로 정돈되지 않았으며, 값비싼 스시 가게의 호객행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유리공예와 오르골은 이 도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수단처럼 보였다. 버리긴 아깝고 걸어두기에도 어중간한 풍경화 한 폭을 들여다 보는 기분이었다.
오타루를 다시 찾은 건 창 밖에도, 내 속에도 차가운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고, 자주 밖을 내다보곤 했다. 누가 찾아온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가슴 벅차 오르는 영화가 한 편보고 싶어졌다. 오래 전 서울극장 맨 뒷자리에서 눈가의 물기를 훔치던 교복 차림의 한 소녀를 떠올렸다. <러브레터>는 ‘먹먹함 애호가’인 나에게 가장 여운이 남는 영화다. 순백의 눈과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레이스 커튼 자락이 스크린을 뽀얗게 채웠었다. 소녀는 두 손을 모아 심장이 있는 곳에 가져갔다. 한창 첫사랑을 기다리던 여중생 시절의 심장은 아직도 내속에서 박동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되살아난 수줍은 사랑 이야기는 어른이 된 뒤에도 목울대를 뜨겁게 달구곤 했다. 그런데 영화의 배경이 오타루라는 사실을 안 건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작품이라면서 촬영지가 어딘지도 몰랐다니……. 그래도 홋카이도에 머물고 있는 동안이라 다행이었다. 어쩌면 엄청난 운명적 순간이라며, 순박한 심장이 두근댔다.
나는 실망스러웠던 첫인상은 모두 잊고 오타루행 기차에 올라탔다. 경춘 고속도로변의 숲과 소양강 댐을 오르는 산길, 공지천의 안개 낀 풍경을 볼 때처럼 아득한 기분까지 들었다. 출근 하는 사람들을 중간 역에 내려놓고 나니 승객은 몇 명 남지 않았다. 한숨 돌린 열차는 이시카리 바다로 향했다. 구름 사이에 잠시 얼굴을 내민 햇살이 기차를 내려다 보았다. 검은 바위섬과 몽돌 해변이 나타났다. 나는 김 서린 창문에 볼을 맞대고 작게 입을 벌려 소리 냈다.
“바다다.”.
오타루는 열차의 종착역이다. 나는 플랫폼에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개 같은 입김 사이로 사라지는 열차를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울려오는 항구의 기적소리, 기러기 날갯짓이 휘젓고 간 구름 낀 하늘, 백 년의 기억을 품은 오래된 건물들에게 다시 인사했다.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겡끼데스.’
잘 지냈나요?
나는 잘 있었어요.
곧장 영화의 첫 장면이었던 텐구산으로 갔다. 여자 주인공이 버티지 못할 만큼 숨을 참아 보았던 곳이다. 잃어버린 시간 속의 첫사랑을 추억했던 눈밭이다. (촬영지는 스키장 주차장이라고 한다.) 낡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오타루 시가지와 바닷가가 마치 우주의 가장자리 같이 느껴졌다. 눈보라가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풍경 속에 있으니, 누군가의 전생을 방문하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니 실로 그러하기도 했다. 내가 거니는 지금의 생생한 삶도 누군가에겐 이미 전생인 것이다.
그렇게 오타루는 나에게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 되었다. 열차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 바다가 부서지는 창가에 볼을 비볐고, 삿포로보다 추운 날씨에 어깨를 더 움츠렸다. 적당한 관심을 가지고 아기자기한 공예품을 구경하기도, 운하에 들어차는 가로등 불빛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도 했다. 동행을 두었을 때에는 후미진 골목의 식당에서 스시와 텐푸라 정식을 시켰고, 혼자였던 날에는 어묵 튀김을 사먹었다. 어떤 날엔 오타루 맥주에 취해 오르골 소리를 들으러 가야 한다고 우겨대기도 했다. 돌아올 땐 ‘르타오(LeTao)’에 들르는 걸 잊지 않았다. 거기서 산 치즈 케이크는 무척 부드러워서 혹여 녹아 내리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니까 오타루는, 사실은 별 거 없는 그런 작은 동네다. 나는 매번 비슷한 감정 소모를 하며, 비슷한 피로감을 느끼고 돌아오곤 했다. 어쨌든 내 심장은 오타루를 계속 좋아하는 중이다.
영화 속 소년은 전학을 가기 전까지 소녀에게 차마 고백을 하지 못한다. 소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책을 대신 반납해달라며 소녀의 집을 찾는다. 오타루 역에서 네 정거장 떨어진 ‘제니바코’라는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그 집이 얼마 전 불에 타 사라졌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나서 나는 이유 없는 예감이 들었다. 당분간은 오타루를 찾지 않을 것 같다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아무래도 나는 멀쩡하게 사는 것 같다가도 불규칙한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 같은 그런 심정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 부류인 듯 하다.
영화의 주제곡인 ‘A Winter Story’를 들을 때면, 마음 속 어디선가 눈이 내린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연주가 절정으로 치닫는 그 부분이 나는 참 좋다. 정말로 누군가의 전생을 다녀온 기분이다.
* 삿포로-오타루 웰컴 패스
- 삿포로와 오타루 사이의 JR과 삿포로 지하철 원데이 패스를 1,530엔에 구입할 수 있다. JR 삿포로 역의 관광안내소에서 판매하며, 관광 비자가 날인된 여권을 제시해야 한다..
※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은 아래의 책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 어려서 눈이 많이 내리는 밤이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자주자주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곤 했다. 밖에 누가 찾아온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자의 초상』, 윤대녕
-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 춘천도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유안진
- 멀쩡하게 사는 것 같다가도 불규칙한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 같은 그런 심정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中 황정은의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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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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