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마왕’의 시간
우리 시대와 호흡하며 대체 불가능한 독특한 카리스마를 선명하게 보여주던 한 가수가 갑자기 쓰러졌다.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그의 별명은 ‘마왕’이었다. 이 별명은 그의 특별한 색채에 잘 어울렸다. ‘마왕’은 낮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밤의 카리스마’다. 어떤 밤인가? 그 밤은 몇 시를 가리키는가? ‘마왕의 시각’을 그가 오랫동안 진행했던 라디오방송이 흘러나오던 ‘새벽 2시’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새벽 2시’는 정말 새벽인가? 그냥 ‘02시’라고 해야 하지 않나. ‘02시’는 아침을 예비하는 새벽이 아니라 밤이, 정확히 말해서 ‘도시의 밤’이 비로소 본령을 드러내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02시에서 0은 시작의 숫자가 아니라 어떤 텅 빔, 도시적 어둠의 한복판을 지시하는 기호다.
그가 진행하던 02시의 라디오는 특별했다. 그는 이름난 록그룹의 리더였고 말수가 적지 않았지만, 밤 10시 시간대 라디오의 아이돌 DJ가 지닌 친구 같은 수다스러움과는 달랐으며, 자정 시간대 전문 아나운서 DJ의 부드러운 감성 또한 흉내 내지 않았다. 그 방송은 ‘호객 행위’를 하지 않았다. 시청자 위주의 편성이 아니라, 진행자의 독특한 아우라가 발산하는 불편함과 해방감이 기묘하게 동거하는 02시의 라디오방송은 낮의 쇼윈도가 아니라 밤의 마네킹, 인적 끊긴 밤거리, 빛보다 그림자가 많은 도시 뒷골목, 어떤 고독한 바의 실루엣 같은 느낌이었다. 도시의 마천루 사이 어딘가 지하실에서 흘러나오는 아마추어 방송, 공중파 주파수대에 우연히 잡힌 해적방송 같았다.
02시의 DJ는 비현실적으로, 아니 비일상적으로 자주 ‘낄낄’거렸으며 직설적이었다. 그는 자기 뜻을 우회하는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래서 제멋대로 얘기하는 듯했으나 무례하지는 않았다. 일상성의 경계를 넘는 시각의 해방성이 종종 위협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시각이 충동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똑같이 찾아 올 ‘오늘’과 ‘내일’의 편안함을 약속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멘트는 서점가의 ‘힐링 멘토’의 것이 아니었다. 02시의 DJ의 목소리는 소시민적 건강성을 회복시키는 달콤한 수면제가 아니라, 일상성으로 잘 반죽되지 않는 까칠하고 돌출적인 무엇이었다. 02시의 라디오방송은 ‘스탠다드’가 아니다. ‘마왕’은 그런 점에서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野性)이며, 밤의 실체로서 야성(夜性)이 드러나는 02시에 부합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첫 차를 기다리지 않는 자들의 심야식당
02시의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 방송을 듣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잠들지 못하는가. 그들은 네다섯 시간 후부터 시작될 아침 출근 준비를 설레는 맘으로 기다리는 중인가.
여기 하나의 풍경이 있다.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포착한 ‘나이트호크(Nighthawks)’라는 풍경이다. 유리창 내부는 심야식당이다. 세 명의 손님이 바에 둘러앉고 가운데 주인이 있으나, 그들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대화는 없다. 그 중 한 명은 우리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중절모를 쓴 이 손님의 몸은 반은 밝은 빛으로, 반은 어둠에 가려 있다. 유난히 밝은 식당 내부의 빛은 바깥으로 발산된다. 그러나 유리창으로부터 번진 빛은 그 너머 칠흑 같은 밤의 경계를 더 명료하게 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식당 내부의 사람들은 인적이 완전히 끊긴 식당 바깥 도시의 거리 풍경과 대조되어 극적으로 강조된다. 밤 한복판 이 식당은 몇 시인가. 잠들지 못하는 이 밤의 고독은 02시가 아닐까.
밤 식당의 손님들은 밤을 즐기는 이들이 아니라 ‘잠들지 못하는’ 자들이다. 밤은 그들에게 안식의 시간이 아니다. 새벽은 또 다시 도래하는 아침을 위한 예비 시간이 아니다. 그들에게 밤은 깊고, 그들은 비로소 도시의 ‘텅 빔’을 목격한다. 사람 소리가 끊어지고, 네온사인 빛과 간판의 불이 꺼지며, 막차가 끊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횡단보도 신호등은 여전히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한다. 건널 사람이 없어도 주기적 명멸을 반복하는 신호등과 비출 사람이 없어도 켜져 있는 가로등은 무엇으로 서 있는가.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는 무용한 도구들의 주기적 명멸. 그것은 기계적이고 계획적이며 자동적이며 단단하게 구획된 도시 일상의 주기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발동시키는 기호다. 여기에는 파란불과 빨간불, 허용과 금지에 관한 문명의 엄격한 규칙에 참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포함된다.
낮은 무엇인가
잠들지 못하는 식당 손님들은 이 기호들과 접속하는 자들이다. 기계적 접촉과 자동성의 메커니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있다. 도시에서 사람의 만남은 거대한 형식주의 그물망으로 짜인다. ‘네트워크’라는 기계적 용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드러나지 않은 어둠에 귀기울기보다는 열 명, 백 명의 드러난 마스크와 네트워크적 관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SNS라 불리는 온라인인간망은 사이버 세계가 아니라 오늘날 도시적 인간 관계망의 축소판이다. 타인이 타인의 얼굴을 알 수 있고 스스로를 타인에게 개방시키지만, 결코 한 인간의 내면의 어둠과 접속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세계. ‘너는 누구인가’라는 거인의 물음에 대한 오디세우스에 대답처럼, 여기에서 ‘얼굴’은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
호퍼의 풍경에서 식당 내부의 유난스러운 빛은 거리의 어둠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공허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다. 이 공허와 호응하는 남자의 몸뚱어리 절반을 지우고 있는 그림자는 02시의 것이다. 두세 시간만 지나면 다시 낮의 시간과 그들을 이어주는 첫차가 다니겠지만, 그는 첫차에 무심할 것이다. 한 끼의 늦은 식사, 늦은 커피를 마시고 집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는 바로 잠들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다시 02시 DJ의 ‘해적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을까.
‘02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어둡다고 밤이 그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밤은 밤에 관한 질문이 도래하는 시간에 비로소 찾아오는 시간이라고 해야 한다. 그 시간은 낮의 시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도시의 낮은 이 질문 대신 삶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추동시킨다. 밤이 ‘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도래하는 시간이듯, 낮은 늘 ‘낮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망각시키는 시간이다. 하지만 02시에 라디오를 듣는 불면증 환자가 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접속하고 있는 주파수는 이 ‘질문’이다.
* 02시 라디오 DJ ‘마왕’의 회복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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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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