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이 연재됩니다.
결국 ‘사랑은 없다’는 걸 구구절절 말하기 위하여 사랑에 대한 산문을 썼다는 한 사나이에게 나는 말했다. 사나이들에게 사랑이 없는 것이지 사랑이 이 세상에 없는 건 아니라고. 그 사나이도 끄덕였다. 사나이는 원래 그런 놈이라고. 사랑에 대한 탐구가 늘상 욕망에 대한 탐구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탐구를 대개 사나이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사나이들은 욕망을 구가할 타자를 먹잇감처럼 차지하는 노고를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물론, 사나이의 사랑에 대한 욕망은 성적인 본능 외에 꽤 다양한 층위의 또다른 욕망이 한데 뭉개져 있다.)
그나마 욕망과 구별지을 수 있는 사랑에 관하여 ‘없다’라고 시인했다는 점에서 그 사나이는 여느 사나이하고 좀 달라보였다. 그런 사나이라면, 마주 앉아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오래 세세히 나누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 끝에서 그 사나이와 내가 사랑에 대하여 좋은 결론을 얻거나 또다른 새로운 질문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았다.
“사랑에 대한 글은 이제는 읽기도 쓰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이 실은 본능, 충동, 욕망 등의 변장일 뿐이라고 단정하며 짐짓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성숙하다고 믿는 미성숙한 소년들을 뿌듯하게 만들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온갖 미신과 기만을 재생산하는 담론들 속에서 달콤하게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태도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는 본능, 충동, 욕망과 다른 것이라면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행위의 고유한 구조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신형철 산문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신형철은 어떤 개념을 잘 말하기 위하여 추출법을 구가하곤 한다. 혼합된 개념 속에서 특정한 성분을 분리해낸다. 그 분리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개념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내용물이 정제되어 제시된다. 인용한 저 구절에서는 욕망을 사랑과 분리해낸다. 정제된 사랑을 보여주니 사랑이 비로소 보인다. 우리들의 사랑이 얼마나 사랑과 멀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영원성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신형철이라는 정확한 사나이가 욕망에서 사랑을 추출함으로써 사랑을 얘기할 자격을 얻었다면, 사나이가 아닌 여성으로써는 판타지에서 사랑을 추출함으로써 사랑을 얘기할 자격을 얻어야 할 것이다. 여성은 자신이 겪은 사랑의 경험치와 무관하게도, 사랑에 대하여 일정 정도의 판타지를 가진 존재들이다. 여성은 어릴 적부터 사랑을 이야기하는 너무 많은 텍스트들에 감염되어, 사랑에 대하여 그리 현명한 상태가 못 된다. 제 아무리 이성적으로 사랑을 재인식하는 어른이 되었다 할지라도 미량의 판타지가 여성의 목덜미에는 서늘하게 매달려 있다. 그 판타지를 사랑으로 둔갑시킨 아둔함, 낭만적 설렘 혹은 감정의 집중과 고양만을 선호하며 연애를 소비하는 어리석음, 외로움과 나약함을 보완할 타자를 곁에 묶어두기 위하여 자기 함정을 파고 마는 속단. 이 정제되지 못한 사랑의 판타지로써 늘상 사랑을 훼손했고 자신을 망쳐왔다.
판타지에서 사랑을 추출하고 가장 사랑인 것을 정제하여 감각하는 능력은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그러니까 신형철 식으로 말하자면, 결여된 어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연민과 꽤나 닮은 동감의 형태로 두 사람이 사랑을 시작했다 하자. 이 좋은 예감으로 시작된 사랑은 어떤 과정을 거쳐 떠날 필요가 없는 사랑으로 지속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줌파 라히리는 사랑을 좀 다르게 본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 『축복받은 집』에 등장하는 남녀는 서로를 알아본 자들이 아니다. 도리어 서로를 전혀 모르는 자들에 속한다. 서로를 충분히 알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 자들이지만 충분히 알았다는 그것이 꽤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해였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제시해나간다. 내가 알던 사람은 저런 식으로 행동할 수 없고 저런 식으로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촘촘하게 그려나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엔 사랑이 흐른다. 기괴하고 야릇하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여 두 장의 이질적인 헝겊을 봉합하듯 서사가 흘러간다. 매순간 발견하는 동질감이 아니라, 매순간 돌발하는 위화감으로 두 사람은 유대의 두께를 다져나간다. 조목조목 설득력이 있다. 각기 다른 전통 속에서 살아온 아주 다른 두 사람이기 때문에 뼛속 깊이에서부터 마찰을 감내하긴 하는데, 그 마찰을 감내하는 능력이 인내심은 아니다. 인내심보다 좀더 자애롭거나 해괴한 어떤 것이다. 동력이라고 표현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가 돌듯이 저절로 움직이는 어떤 능력. 이 동력이 자못 신비하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군더더기없는 문체와 촘촘한 서사를 통해서 이 신비하고 모호한 동력을 신비하고 모호한 채로 제시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우리 곁에 다녀왔으나 우리가 아둔하여 그것을 하나의 신묘한 경험이었다고 감히 말하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엉뚱한 듯도 하고 기묘한 듯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듯도 하고 해괴한 듯도 하여, 어딘가 눈물겹고 어딘가 신비해지는 이야기들. 사소하다 싶은 것들이 누적되어 인간의 깊숙한 곳까지 손을 뻗는 이 서사들은, 다른 사랑을 제시하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다르게 제시하려는 능력에 가깝다. 우리는 모두 거기서 거기이지만, 사랑에 대한 인지적 관점을 다르게 만들 때에만 도처에 즐비한 사랑을 가까스로 인지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기리란 걸 줌파 라히리는 믿는 사람 같다. 그런 능력은 문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일지 모르겠다. 문학은 우리를 둘러싼 정체불명의 사연들을 정체불명인 그대로 덩어리째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보다 촘촘한 서사를 통해 보다 간결한 문체로써.
사랑을 시작하는 능력은 있어도 사랑을 훼손하지 않은 채로 오래 지속하는 능력은 없는 자들은 종내에 사랑했던 사람을 탓하고야 마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그런 사람과 사랑에 빠졌던 과오를 뉘우치는 어리석음은 결국 그 비슷한 사랑을 한번더 한번더 체험하다 지쳐간다. 그리하여 사랑을 회의하거나 부정한다. 사랑했던 사람을 탓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실은 발전된 모습이기는 하다. 사랑의 시작에는 점점더 유능해가지만 사랑을 지속하는 일에는 점점더 무능해져간다. 그 과정을 통하여, 자신을 기만하고, 사랑했던 사람을 소진시키고, 두 사람의 사랑을 모독하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사랑은 어차피 혼란이고 위험이지 않느냐는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사랑을 꿈꾸는 일을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어쩌면 더 사랑에 중독되어 뻔한 사랑을 되풀이한다는 점 때문에 점점더 무능해져가는 사랑은 사랑의 기만인 것이다. 사랑을 쉽게 시작하는 능력과 사랑을 쉽게 그만두는 능력만이 점점 커져가는 자 앞에 사랑은 번번이 가장 왜소한 욕망과 판타지만 남게 된다.
사랑의 능력은 사랑을 시작하는 것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지키는 것에만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재배하는 능력이 되어야 맞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하는 일을 시작으로 하여, 사랑이 더이상 ‘감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의 ‘체제’로 구축되는 일, 그리하여 사랑을 어떻게 지속할지에 대하여 사랑이라는 강렬하고 뜨거운 이름 아래에서 감각으로써 함께 궁리하는 일, 그리하여 두 사람이 같은 속도로 성장을 하고 그럼으로써 두 사람을 에워싼 사랑을 재배하는 일이 사랑의 능력이 되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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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저/서창렬 역 | 마음산책
첫 소설집으로 1999년에 오 헨리 문학상과 펜/헤밍웨이 문학상, 2000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미국 문단에 등장한 줌파 라히리도 어느덧 데뷔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은 중견 작가다. 단편소설집과 장편소설을 각각 두 권씩 번갈아 발표하며 자신의 문학 이력을 차곡히 쌓은 그의 문학사는 단순히 작가 한 사람의 문학사가 아니라 미국 문학, 세계문학 전체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이민자 문학’은 없다며, 그런 문학이 있다면 ‘거주자 문학’이 따로 있느냐고 반문하는 라히리의 목소리는 정체성을 규정당하기를 거부하는 문학 본연의 목소리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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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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