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의미에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예산으로 일정 정도의 흥행도 보장이 되고, 동시에 사회문제를 은유를 통해 공포로 치환시킬 수 있는 열린 가능성 때문에 한때 공포영화가 재능 있는 신인감독들을 발굴해내는 역할을 하던 시기도 있었다. 1998년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 탕웨이와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김태용 감독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등 학교 괴담을 다룬 영화가 줄줄이 이어졌다. 중산층 가정의 몰락을 공포로 풀어낸 윤종찬 감독의 <소름>이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이수연 감독의 <4인용 식탁> 등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낸 영화도 있다.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의 영향을 받은 슬래셔 무비 <해변으로 가다>, <찍히면 죽는다> 등 공포영화가 새로운 장르영화로 각광받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흥행코드’만 무한복제하면서, 공포도 이야기도 시원찮았던 작품들의 연이은 실패 때문에 여름, 극장가에서 공포영화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아졌다. 그런 점에서 2014년 여름,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오인천 감독의 <소녀괴담>은 유독 반갑다.
어린 시절 죽은 친구를 본 충격으로 외톨이처럼 지내는 소년 인수(강하늘)는 왕따를 당한다. 어느 날, 기억을 잃은 채 학교를 떠도는 또래 소녀 귀신(김소은)을 만난 인수는 그녀와 우정을 쌓으면서 마음을 열고, 저주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재능도 받아들인다. 학교에서는 핏빛 마스크 괴담이 떠도는 가운데 반 아이들이 한둘씩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미스터리를 밝혀가던 인수는 괴담 속 마스크 귀신과 소녀 귀신 사이의 비밀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스토리는 간략하고, 소재도 익숙하다. 아쉬운 점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소재와 이야기를 역시 익숙하고 새롭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이다. 귀신을 보는 주인공 이야기는 오래 전 <식스 센스>부터 얼마 전 드라마 <주군의 태양>에서 충분히 보았다. 왕따 문제로 촉발되는 학원 공포는 <여고괴담>과 <고사> 시리즈를 통해 여러 변종들을 확산시켜 왔다.
다른 공포 영화와 차별화를 위해 <소녀괴담>이 선택한 것은 소녀 귀신과 소년의 달달한 로맨스와 의외의 순간에 맞이하게 되는 코미디이다. 공포, 호러, 로맨스라니 잘만 버무리면 B급 감성의 색다른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우리는 이미 좀비와의 로맨스 <웜 바디스>와 미드 팬이라면 익숙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를 통해 사람과 귀신의 로맨스에도 익숙하다. 코믹 호러물이라는 장르도 신선하진 않다. 그런 점에서 <소녀괴담>은 은근히 90년대 복고적 감수성에 의지하는 부분이 있다. 지하철 귀신이나, 불쑥 튀어나오는 공포 효과 등도 살짝 추억 돋는 1차원적 공포를 선사한다.
하지만, <소녀괴담>은 단점만큼 장점도 명확한 콘셉트 영화의 순기능도 가지고 있다. <소녀괴담>은 지루하지 않고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흘러간다. <여고괴담>을 보지 못했을 지금의 10대들에게 <소녀괴담>이 보여주는 학교 속 무관심이라는 공포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느껴질 수도 있다. 올 여름 대작들과 경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포영화라는 점, 학생들이 방학을 앞두고 있다는 점 등이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역시 젊은 배우들의 등용문으로서의 학원 공포라는 점에서 <소녀괴담>의 배우들은 신선하고 재능 있다. 주인공 강하늘과 김소은은 완전한 신인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중심에서 감정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각자의 매력을 펼쳐낸다. 덕분에 두 사람의 로맨스는 하이틴 영화처럼 풋풋하고 예쁘다. 일진소녀 한혜린의 리얼한 연기는 강렬하게 기억되고, 박두식도 다른 배우들과 잘 어우러지면서도 개성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학교괴담의 역사 속 <소녀괴담>
1998년 입시지옥을 만들어내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괴담이라는 형식에 담아낸 <여고괴담>은 장르영화와 시리즈 영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이후 공포영화가 흥행 가능한 장르영화로 정착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지금 보면 조금 촌스럽지만, 획기적이었던 점프 컷의 공포와 신인 여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신선한 연기, 동질감을 얻은 여고생들의 단체관람이 이어지면서 지금까지도 가장 성공적인 공포영화의 하나로 남았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퀴어 코드를 담아내면서 시리즈 영화로 정착할 수 있었다. 전작들이 보여준 새로움을 걷어버리고 수많은 이미지를 차용하고 짜깁기하는 가벼운 구성 때문에 시리즈 영화로서의 가능성을 유보하게 만든 <여우계단>은 전작들과 달라지려다가 길을 잃었다.
여고라는 폐쇄된 공간을 공포의 공간으로 환치시킨 <여고괴담> 시리즈가 사라진 후, 완성도와 상관없이 하이틴 공포영화로서의 위용을 세운 <고사> 시리즈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공포영화는 다시 여름 시즌을 겨냥한 상품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학교괴담을 다룬 영화 속 <소녀괴담>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을까?
2009년 <여고괴담 5 : 동반자살>이 시리즈를 끝내는 유서였던 것처럼, <소녀괴담>은 ‘괴담’을 바탕으로 한 학교 공포 영화에 일종의 마침표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영화의 승패는 공포 그 자체가 아니라, 공포를 자아내기 위해 세밀하게 직조되어야 할 이야기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장르영화의 특성상, 그 표현에 있어서 유달리 특별한 변화를 담아내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익숙함을 무기로 그 속에 누구도 하지 않았던 얘기를 담아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익숙한 이야기를 치장하고 더 깜짝 놀라게 만드려는 기술적 고민 대신, 공포라는 감정을 공유하는 관객과의 심리전, 그 본질에 대한 고민. <소녀괴담>이 놓치고 있는 건 그 본질적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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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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